작품의 입지나 위치로 따지면 인피니티 사가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 격의 작품인데 <이터널스>(2021)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은 그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다. 캐릭터 수도 더 많고 다루는 세계의 범위와 깊이도 이쪽이 더 넓고 깊다. 전자는 <어벤져스>(2012)의 대성공 이후 만들어졌지만 이쪽은 그만한 주축이 아직 만들어진 것도 아니어서 난이도는 더 어려웠을 수밖에 없다. 할 일은 많고 관객들의 기대치는 높은 이 기획의 시작이 걸작으로 남기란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사가의 시작점에 있는 만큼 드라마에 충실하리라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디즈니와 마블 스튜디오를 설득해낸 클로이 자오의 비전을 지지할 수 있을 것 같다. 7천 년 동안의 여러 시간대를 오가는 동안 열 명의 캐릭터 모두를 알맞은 비중으로 기억에 남게 해주는 각본과, 감독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클로이 자오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영상 연출은 물론이고 내 기준에서는 시각적인 즐길거리에도 충실했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아리솀'의 피조물이라고 해서 인간 세상을 굽어보는 신적인 집단인 게 아니라 '이터널'들도 감정, 사랑이 있고 언제나 옳은 행동을 하지는 않으며 인간에게서 양면적인 것들을 보고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가장 가까운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수천 년 동안 옳다고 믿어온 가치가 무너지거나, 혹은 자신의 신념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혹은 몇 세기 동안의 판단을 뒤흔드는 만큼의 사랑이 찾아오거나. <이터널스>가 캐릭터들의 감정을 다루는 태도는 영상 연출의 방식과 맞물려 흥미롭기도 했다. 마치 이들은 이미 수천 년 동안 비슷한 일들을 숱하게 겪어왔다고 말해주는 듯한 장면과 장면의 흐름. 짧지 않은 상영시간이지만 <이터널스>는 특정한 상황에 관객이 오래 머무르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호흡을 조절해낸다. BC 5세기의 바빌론으로 갔다가도 우리는 이내 현재의 런던으로 돌아와야 한다. 누군가의 목적과 계획에 의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기억하고 사랑을 지켜냄으로써 '우리'는 영원해진다. 여기서의 영원은 늙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에 생을 거는 일을 통해서 일어난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열 명의 ‘이터널스’ 모두를 각인시키는 이야기
<이터널스>의 큰 발단은 5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데비언츠’들이 어떤 일로 깨어나면서 그들을 막기 위해 활동해왔으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터널스’가 다시금 팀업 하는 과정이다. 원작 코믹스를 알지 못한다면 관객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을 소개하려다 보니, <이터널스>의 상영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최근 관람한 <007 노 타임 투 다이>, <듄>, <이터널스>가 모두 150분대의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다) 리더 격인 프라임 이터널스 ‘에이잭’(셀마 헤이엑)을 비롯해 ‘세르시’(젬마 찬), ‘킨고’(쿠마일 난지아니) 등 서로 다른 배경과 특성, 능력을 가지고 있는 각 인물들을 단순히 순서대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이터널스>의 선택은 ‘테나’(안젤리나 졸리)와 ‘길가메시’(마동석)의 관계처럼 몇 쌍을 이루어 병렬적인 구조를 만든다.
<노매드랜드>(2020)를 본 관객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클로이 자오 감독의 연출은 비전문 배우, 그러니까 얼굴만으로 캐릭터의 상당 부분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영상 언어의 일부만이 아닌) 인물의 삶이 지닌 여러 면들을 공들여 묘사하고, 탐미적인 영역까지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유려한 영상을 매 장면 뽑아낸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작품들을 극장에서 즐겨온 관객들이라면 이 세계관의 작품 대부분은 이미 시각적 즐길 요소를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담보하므로 각 캐릭터가 지닌 능력을 기반으로 한 액션 연출 - 장면이나 구도의 다양성, 액션을 펼치는 캐릭터들이 서로 주고받는 합과 같은 것들 - 을 기대할 것이다. 조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클로이 자오의 <이터널스>는 서사의 비중상 액션보다는 드라마가 중심인 데다 (그렇다고 해서 액션의 분량 자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블록버스터 연출이 처음인 감독이 자신의 역량 혹은 시도를 평가받기에는 관객들의 니즈를 충족하지 못할 공산도 크다. 게다가 <이터널스> 중후반 전개의 핵심은 빌런보다는 이터널스 멤버 내부에서 비롯한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그 어느 MCU 작품보다 강화된 다양성
<이터널스>에서 또 하나 돋보인 점은 그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등장인물들의 성별, 연령대, 성적 지향, 인종 등이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수어를 사용하는 대신 진동에 누구보다 민감한 ‘마카리’(로런 리들로프)부터 동성 연인이 있는 ‘파스토스’(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등에 이르기까지 열 명 각각의 캐릭터는 존재 자체로 다른 이터널들과 특정하게 구분된다. 영화 제작에 대한 사항들과 별개로, 7천 년 동안 세계 각지를 누비며 수많은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해왔을 이터널들에게 이는 자연스럽다.
근래의 영화들 중에서 오히려 MCU 작품들보다 먼저 떠올린 것은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한 넷플릭스 영화 <올드 가드>(2020)였다. <올드 가드>의 주역들은 <엑스맨> 시리즈의 ‘울버린’처럼 혹은 <이터널스>의 ‘에이잭’처럼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고 늙지 않는다. 수천 년을 ‘생존’해온 ‘올드 가드’들에게서 히어로의 카리스마보다는 고독감을 먼저 느낀다. <이터널스> 속 몇몇으로부터 느끼는 정서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이터널’ 개인이 살아온 7천 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영화가 다루는 수억 혹은 수십억 년에 이르는 세월이 주는 광활하고 막막한 감흥은, ‘테나’가 관객에게 주는 삶과 기억에 대한 물음과 맞물려 후반에 이르러 깊은 여운을 안겨주기도 한다.
영화 '이터널스' 스틸컷
Eternals Will Return
아직 디즈니와 마블 스튜디오가 공식화한 것은 아니나, 감독인 클로이 자오 본인은 속편을 맡을 의향이 있음을 몇몇 매체에서 언급한 적 있다. 통상적으로 MCU 영화의 속편은 2년에서 3년 정도가 걸려 나오는데, 그간 몇 편의 MCU 새 영화들이 ‘페이즈 4’의 조각들을 큰 그림으로 이어나가길, 그리고 다음 <이터널스>가 그 중심에 서 있기를 바라면서 두 번째 엔딩 크레디트 영상까지 모두 본 뒤 상영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