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의 시절을 지나게 한 원동력
단순 ‘구직자’의 신분이기만 했디면 부푼 희망과 낙관 속에 퇴사했으나 생각만큼의 방향으로 이직하지도 못한 채 시간(그리고 돈)을 허비하고 있었던 그 시기를 잘 보낼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 방금 말한 ‘그 시기’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 분명 일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만나는 사람들은 흔히 “요즘 바쁘시죠?” 같은 물음을 인사로 건넸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4대 보험에 가입된 ‘근로자’로서의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도 무언가 하기는 하고 있었다.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을 2015년 하반기부터 해왔고 그때만 해도 수익을 얻는 활동은 아니었으며 취미이자 여가의 일환이었지만 2017년 말부터는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로부터 매월 일정한 참가비를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건 대단한 수익이 될 리 없고 신청 대비 실제 참가율을 높이기 위한 보증금의 성격이 더 강했다. 거의 모든 모임, 강의 등의 프로그램에서 참가비가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즉 무료 프로그램인 경우보다 훨씬 더 참가율이 높다. 아쉽지만 사실이다.)
누군가 봤을 때 내가 바빠 보였다면 그건 실제로 바쁘기 때문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를 통해 게시된 영화 모임 공지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아 이 사람이 이것저것 하고 있구나’ 하고 여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마치 자동차 백미러에 작게 쓰인 글자처럼, ‘이 사람은 실제 보이는 것보다 더 바빠 보일 수 있음’ 이렇게 소셜미디어 프로필 등에 쓸 수 있다면 어떨까 거의 장난처럼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저 안 바빠요! 모임이든 강의든 다 할 수 있으니 막 불러주세요!!라고 말하듯이)
그러나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로 지내던 그 시절에는 모임 한 번을 해서 남게 되는 그 몇 만 원도 제법 소중했다. 고정된 월급을 받는 것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영화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자각을 잃지 않게 해주는 숫자들이었다. 모임을 운영하고 진행하는 온오프라인의 환경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영화 모임’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통해 몇 년 전 자세히 쓴 적 있다.
https://brunch.co.kr/@cosmos-j/823
내가 모임을 운영했던 장소는 서울 소재의 독립서점 혹은 동네서점들이었다. 북티크, 서점 리스본, 생산적헛소리, 관객의취향 등. 그 사이 없어지거나 위치를 이전한 곳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나를 온전히 백수는 아닐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찍이 영화 모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서점이었고 독서 모임 활동도 오래 했었기 때문에, 한 서점에서는 평일 저녁 특정 요일의 독서 모임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또 다른 서점에서는 (지금의 내 활동들에 실질적으로 큰 영향을 준) ‘영화 글쓰기 강의’를 하게 됐다. 2018년 9월 ‘써서 보는 영화’라는 제목으로 초급반 성격의 4주차 영화 리뷰 쓰기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것. 그것이 지금의 출강 활동이나 그밖의 다른 콘텐츠들의 밑거름이 됐다.
https://brunch.co.kr/@cosmos-j/463
언젠가 ‘영화 덕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쓴 위와 같은 글에서도 영화 모임에 대해 언급했는데, (짐작하겠지만, 나는 대화 중 떠오른 화제라든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과거 정확히 서술해 둔 무엇인가가 있다면 ‘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라며 불쑥 링크 같은 것을 꺼내는 사람이다) 이 글은 백수에 가까운 생활을 지탱해 준 것이 영화 모임 등을 통한 수익 활동이었다고 말하기 위해 쓴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영화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취향이 비슷한(물론 다르더라도 상관없다) 타인들과 그것을 함께 향유하는 일이다. 마치 PR/마케팅 현업에 있을 때 여러 영화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협업하던 것처럼, 같은 영화를 주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 감상을 소개하거나 혹은 그들의 감상을 청해 듣는 방식으로 이야기 타래를 만들고 넓히던 순간들이 내게는 ‘영화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해 주었다.
코로나19의 직접적 영향으로 오프라인에서 영화 모임을 한동안 운영하지 못하다가 최근(2023년 8월)에야 오랜만에 글쓰기 강의가 아닌 영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과거 진행했던 모임으로 인연이 된 기획자 분과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불쑥 기획이 만들어졌다. 글을 쓰든 말을 하든 나는 영화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 이라고 지난 시간들이 말해준 것처럼 2015년에도, 2018년에도, 그리고 2023년에도,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의 시절을 지나 나는 어디선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지금 이 기록도 남길 수 있다.
그 무렵 본 영화 - <라이프 오브 파이>(2013.01.01 국내 개봉)
(…) 우리의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너무도 많고, 이해했더라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들도 너무나 많다. 그런 것들을 겪고 나면 누군가에게 들려줄 나만의 이야기가 생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자신이 겪지도 않은 것들에 웃고 울며 여운을 느끼곤 한다. 언어를 초월하는 경험은 이렇게 완성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어딘가에, 어디든 숨어 있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희망과 절망을 모두 안겨주며 또 살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삶은 흔히 여행에 비유되곤 한다. 그래서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믿으며,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직접 겪으며, 또 겪지 못한 것들에 눈물 흘리며, 그 눈물들로 내일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과 ‘사이’가 아닐까. (…) <라이프 오브 파이>가 전하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꿈같은 체험은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잔혹하지만 희망적이다. 파도가 지나가고 나서도 마음은 요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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