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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14. 2023

06. 영화에 관해 쓰는 사람임을 지키게 한 사람들

‘쓰는 사람’들과의 느슨한 동질감


글쓰기는 혼자의 문장 노동이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 말고도 주변에 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들과의 상호 작용이, 홀로 쓰는 일에 영감이나 활력을 준다. 그건 대단한 에너지가 아니라 단순히 오늘 무언가를 쓰듯 내일도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작은 응원에 가깝다.


2주 인턴을 지나 IMC 대행사에서 AE로 일하는 기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대행사 라이프’로 돌아갔다. 고객사의 불규칙한 업무 요청이라든지 회사 상황상 생겨날 수밖에 없는 야근들. 어떤 날에는 자정이 넘어서 퇴근하기도 했다. 저녁 영화 모임이 예정되어 있던 날, 퇴근을 늦게 해서 모임 진행자(나)가 모임에 늦게 참석한 날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모임을 시작해 주셨던 ‘생산적헛소리’ 사장님, 고마워요!) 예매한 영화 관람 시각에 늦은 적도 있다.


그렇지만 야근의 반복과 불규칙한 생활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요인은 몇 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1) 월급이 들어온다. 같이 일하는 분들과의 관계가 괜찮았다. 2) 집과 회사 사이의 거리가 4킬로미터 남짓이어서 어떤 날은 걸어서 퇴근을 했다. 3) 지금 말할 것은 바로 이 세 번째다.


늦게 퇴근하던 어느 날 저녁의 여의도, 그리고 그 무렵 내 책상

어차피 (소셜미디어 등) 외부에서 보기에 나는 ‘영화와 관련해서 뭔가 이것저것 활동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다른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내 환경이나 생활에 달라진 점이 없었다. 영화 모임을 진행하고 영화 리뷰를 쓰는 사람. 말하자면 내가 프리랜서처럼 보이는 백수든 식음료와 제약 분야 고객사를 담당하는 IMC 대행사 직원이든 간에 인스타그램과 브런치(현재의 브런치스토리)에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이상 나는 ‘나’다. 그렇게까지 괄목할 만하거나 유명한 이력을 남겼다고 하기는 주저스러운 일개 몇 년 차 브런치 작가를, 주변의 다른 브런치 작가 분들이 마치 뛰어난 작가처럼 추켜세워주시고 대단하다고 여겨주셨다.


https://brunch.co.kr/@cosmos-j/884


예를 들면 (새 직장 입사 전이었지만) 노들서가에서 열렸던 ‘2019 카카오 크리에이터스 데이’ 행사라든지, 이따금 찾는 독립출판 분야 행사나 동네서점에서 열리는 독서 모임, 출판사에서 주최하는 출판 기념 북토크나 낭독회 같은 행사들에서는 어김없이 알거나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나거나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몇 년 동안 인스타그램으로 책 이야기 등을 교류해 왔던 경우도 있고 출판사에서 마케터로 일하는 분이나 내게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처음 소개해준 지인도 있다. 브런치 초창기였던 2015년에 열린 영화 상영회와 같은 갖가지 인연들로 그들은 내게 ’글 쓰는 사람‘들이었다. 꼭 친하지 않고 잘 알지 못하더라도, 막연하게나마 마음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나와 같은 ’쓰는 일‘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 무렵 여러 동료 작가 분들과의 간헐적인 교류라든지, 각자의 쓰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좌) ‘서점 리스본 포르투’에서, (우) ‘씨네엔드’에서


그들 모두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거나 ‘친구‘의 범주에 있다고 표현하기는 모호할 수 있지만 나와 그들 사이에는 제법 오래된 시간이 있다. 불과 한두 번 잠깐 인사 정도만 나눈 사이라 해도 그들의 새 글을 접하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자극을 얻는다. 이메일 연재를 하는 동안 “글을 읽는 동안 마음 안에 안도와 희망이 조금씩 또 새롭게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라며 회신으로 후기를 공유해 준 분도 있다. 안도감과 희망감이 생겨나는 기분.


누군가의 글을 읽는 일은 그러한 영향을 받게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가서 닿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체감하는 일 또한 아무에게도 닿지 않은 채 그저 홀로 쓰는 일보다 좀 더 각별하다. 단지 나만의 사소한 의미 부여일까. 그렇다 해도, 꼭 영화가 아니어도 각자의 분야에서 계속해서 쓰는 사람들의 존재는 내게도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라고 영화 <작은 아씨들>(2019)에서 에이미가 조에게 말해주듯 분명한 다독임이 되어 다가왔다. 그래서 나 또한 지금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영화 ‘작은 아씨들’ 국내 포스터
그 무렵 본 영화 - <작은 아씨들>(2020.02.12 국내 개봉)

(…) 그 시대에 루이자 메이 올컷은, 그리고 그가 쓴 이야기 속 조 마치는 글을 썼다. 처음에는 ‘친구가 쓴 글’이라고 했던 ‘조’는 당당하게 자신이 쓴 이야기임을 밝히고 편집자와 인세를 흥정하며 판권을 넘기지 않는다. 그 글은 자신이 겪고 보고 듣고 느껴온,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의 많고 많은 빛나는 장면 중 해변에서의 대화. ‘베스’에게 ‘조’는 자기가 쓴 글을 읽어주기 전에 조지 엘리엇의 『플로스 강변의 물레방아』 속 한 대목을 읽어준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모든 것이 자명하고 또 자명하기에 사랑받는 이 달콤한 단조로움.” 그 단조로운 이야기들이 100년도 넘게 이야기되어 나날이 새로워지고 변화한다. 그 단조로움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이야기를 결코 만나지 못했으리라.

숱한 일들의 희로애락을 지나온 ‘조’는 어떤 계기로 인해 쓰지 않겠다고 했었던 결심을 꺾고, 다시 글을 쓴다. 그에게 마찬가지로 비슷한 종류의 숱한 일들을 지나온 ‘에이미’는 이렇게 말해준다. “계속 써야 더 중요해지는 거야.” <작은 아씨들>이 ‘팔리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있을 수많은 골방 작가들에게 하는 말이며,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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