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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17. 2023

08. IR 담당자는 안 해봤는데요

생각하지도 않았던 분야로의 이직

IMC 대행사에서 몇 개월 일하면서 어느 정도는 회사 생활에 다시 적응한 것 같다고 여기던 2020년의 가을, 생각지 못한 이직 제안을 받았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당시 내 사수였던, 몇 개월 뒤 퇴사하여 다른 회사로 이직한 팀장님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할 생각 있어요?"


평일 저녁 공덕의 어느 족발집에서였다. 정확한 멘트가 생각나는 건 아니다. "IR 담당자로 일해볼래요?" 같은 말이었나. 요는 팀장님이 다닌 지 몇 개월 된 회사의 IR 담당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PR만 해봤고 IR이란 건 해본 적도 없는데요. 게다가 회사에 대해 찾아보니 신약을 개발하는, 주식이 상장되어 있는 바이오 기업이고... 상장기업인 건 그렇다 치고 나는 문과인데. 그러자 돌아오는 팀장님의 대답은,


"동진 씨 글 잘 쓰잖아요"


였다. 팀장님은 내가 브런치 등을 통해 글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그 회사가 한창 바쁘면서도 중요한 시기였는데 홍보팀(PR과 IR을 함께 수행하는)에서 팀원이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었고, 내가 하게 될 일은 회사 홈페이지 등에 게재하는 뉴스레터와 같이 대외적으로 보이는 채널에 회사의 사업 현황이나 투자자에게 전하는 소식 등이 담긴 글을 쓰는 것이었다. 말이 '이직'이지 사실상 전혀 경력도 없는 분야에 신입으로 뛰어드는 일이었다.


그 회사에는 재직 중인 직원의 추천으로 새로운 직원이 입사해 일정 기간을 근속하면, 그 추천 직원에게 작은 보너스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력서를 보내주면 내부에 보고해 보겠다고 했다. 마침 다니던 회사에서는 입사 동기 등이 연이어 퇴사하고 인력이 많이 줄어 있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세세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입사할지 여부를 떠나 면접이라도 한 번 보는 건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 같다.


며칠 뒤 이력서를 써서 팀장님에게 보냈고,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 면접이 잡혔다. 강서구에 위치한 사무실에 다녀왔고, 팀장님과 다른 팀 직원, 그리고 그 부서의 업무를 총괄하는 임원이 함께 자리한 실무 면접이었다. 팀장님은 업무를 하면서 감정소모를 크게 하지 않는 내 성향을 그 업무에 적합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대면 면접 이후 얼마 뒤 비대면으로 HR 담당 부서에서 추가로 면접을 보았다. 희망 연봉이나 가능한 출근 시기 등 일반적인 이야기들이 오갔다.


새 회사에 처음 출근하던 날의 정돈된 듯 어수선한 책상.

막상 면접 전형에 합격하고 나니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새 길에 들어설지 기존에 하던 PR 업무로 계속 경력을 쌓을지 여부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이유는 경력직이 아닌 신입으로 입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봉 테이블 자체가 이전 직장 대비 꽤나 올라간다는 점, 그리고 (팀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야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대행사와 달리 인하우스이기 때문에 평시에는 야근까지 할 일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직원 수 등 규모 면에서도 그간 다녀왔던 5~10명 규모의 대행사들에 비하면 더 큰 회사라는 것도 고려 요소였다.


그래, 아무리 경력직이라 해도 어떤 회사든 새로 들어가면 그만큼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이 생기고 적응해야 할 낯선 환경과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또 넓은 의미에서 PR이든 IR이든 대외적인 'Relations'를 담당하는 일이고 그 일의 기반은 글이다. 문서의 형태로 된 커뮤니케이션. 대학교 1학년 경영학원론 수업 때 교수님이 늘 강조했던 'Written Communication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중요할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뭐든 쓰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가보면 알겠지. 그런 마음으로 IR 담당자가 뭔지도 모른 채 일단 이직을 확정했다. 기존 직장에서 1년 가까이 다니고 있던 때였다. PR/마케팅에서, IMC를 거쳐 다시 IR(+PR)로 일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연봉 계약서를 쓰면서 또 한 번,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가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 국내 포스터
그 무렵 본 영화 - <천공의 성 라퓨타>(2004.04.30 국내 개봉)

(...) 그 경이로웠던 마음을 지금도 기억하는지. 책이든 영화든 게임이든 여행이든 무엇으로부터든 간에. <천공의 성 라퓨타>를 두 번 다시 보면서 주로 눈과 마음에 들어왔던 건 있을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라퓨타를 본 파즈의 표정과, 자신도 몰랐지만 스스로의 뿌리를 둔 곳임을 알며 그곳을 보게 된 시타의 표정이었다. 나아가 지금은 해적단을 이끌고 있지만 과거 남편과 함께 모험가로 각지를 누비며 활약했던 도라가 파즈와 시타를 보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할머니로 불리지만 도라의 방에는 그가 젊었을 때의 사진 - 지금과 똑 닮은 머리 모양을 한 채로 위풍당당히 서 있는 - 이 걸려 있다. 비행선 위에 올라가 보초를 서던 파즈와 거기 몰래 올라간 시타의 대화를 통신 장치로 듣게 되는 도라의 표정이 떠오른다. 도라는 두 소년 소녀를 보며 자신의 유년을 떠올렸겠지. 눈을 감고도 그것들이 선연히 그려졌겠지. 본 적 없는 세계가 다른 어떤 이에게는 생생히 경험한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끝내 그 세계들 사이를 누비며 기억을 더듬고 또 그리움 저편을 넘나들며 추억 하나를 갖게 되겠지.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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