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웃집 토토로'(1988) 리뷰
'그것은 여름 내내 여러 마음이 엇갈리고, 지구의 위기까진 아니어도 마을의 위기쯤은 되는 사건을 해결한 뒤의 일
(...)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황인찬, ‘재생력’ 부분,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 창비, 2019
황인찬의 시는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날 때 자주 떠올린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만날 때면 더욱 그렇다. 그건 꼭 <천공의 성 라퓨타>(1986)라든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에서처럼 낯설고 신비로운 세계로의 모험일 필요는 없다. 5월이면 생각나는 작품 중 하나는 <이웃집 토토로>(1988)다. 봄이 저물고 여름이 서서히 오고 있음을 알리는 듯한 단비를 기다리게 만드는 계절에 딱 맞는 영화라고 하면 어떨까. 1950년대 초반 일본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일가족이 마을에 이사 온 뒤 아이들이 겪는 일련의 소박하고도 귀여운 사건들을 그려낸 작품이다.
사츠키(‘5월’이라는 뜻)와 메이(‘May')는 새 집과 마을 주변을 누비며 마치 '어린 시절에만 나타나는 요정'과도 같은 그 무엇들을 본다. 작중에서는 ‘마쿠로 쿠로스케’로 불린다. 새 집에 이사 갔을 때 처음 만날 법한 어딘가의 먼지도 사츠키와 메이에게는 신비감을 주는 존재가 된다. 아버지가 일을 하고 어머니가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아이들에게는 집과 그 주변이 곧 놀이터가 된다. 집을 그늘로 감싸주는 커다란 녹나무도 아이들에게는 단지 계절감을 나타내는 환경의 일부를 넘어 터널 속 미지의 세계를 감춘 넓은 품이 된다. 신록의 정경이 아이들에게는 하나하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자신들의 키보다 수십 배는 더 높이 자라 있는 나무들에서부터 흙바닥에 자그맣게 돋아난 새싹들까지.
<이웃집 토토로>에서 눈여겨볼 점 중 하나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시시하지 않게 듣는다는 점이다. 마쿠로 쿠로스케를 봤다는 메이의 말에 할머니는 자기도 어릴 때 그런 요정을 본 적 있다고 화답하고, “이 집에 뭔가 있나 봐요”라는 사츠키의 말에 아버지는 “아빠는 귀신 집에 사는 게 꿈이었단다”라며 딸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받아넘기지 않는다. 아이들이 “오잉?” 하면서 집안 곳곳에서 만나는 것들을 모험담처럼 소화하는 동안 어른들은 번역(사츠키와 메이의 아버지는 고고학 강사로 대학에서 일하며 중국어 번역을 한다) 일을 하거나 밭일에 열중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시야에도 집중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리는 사츠키와 메이의 곁에, 드디어 ‘토토로’가 함께한다. 가만히 비를 맞고 선 토토로는 숲의 정령이다. 아이들을 따라 우산을 쓰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소환하듯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기도 하는 토토로는 그야말로 아이들의 수호신이다. 덩치가 몇 배나 큰 토토로는 사츠키와 메이의 안길 품이 되며 토끼를 닮은 토토로의 친구들은 메이가 뒤쫓는 동안 몸이 투명해지거나 하며 그들이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처음 사츠키와 메이 가족의 이사를 도왔던 이웃 할머니의 밭에는 옥수수며 오이, 토마토 등 없는 게 없고 아이들의 텃밭에도 싹이 난다. 비가 오면 제 우산을 내어주는 소년이 있고, 아이를 찾아 온 마을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선다. 이것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가 의도한 사츠키와 메이의 유토피아와도 같다. 5월부터 8월까지 늦봄에서 여름까지 몇 개월을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마주하는 풍경은 곧 자연 그 자체다.
<이웃집 토토로>는 ‘이세계’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사츠키와 메이의 시선에서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들에게만 보이는 마을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 가령 ‘고양이 버스’는 사츠키와 메이가 필요로 하는 곳에 정확히 데려다준다. 때로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가로이 농사짓는 시골 마을의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이웃집 토토로> 속 장면 하나하나가 2024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느 한 시절을 상기시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언제나 자연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자연에게 갖는 경외감에는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쪽으로든 흘러가는 그 대범함이 깃들어 있겠다. 4월을 보내고 5월을 맞이하면서 생각한다. 이따금 비가 쏟아지거나 갑자기 햇살이 내리쬐는 5월만큼이나 우리를 맞이하는, 전에 없던 생명력에 관하여. 이 글을 읽어준 모두로부터 비롯된 다음 계절의 생명력이다.
https://brunch.co.kr/@cosmos-j/1530
https://brunch.co.kr/@cosmos-j/1351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