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불안과 불확실들
어쩌면 10년 이상 글쓰기를 지속하는 일이 내게 허락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건 전적으로 쓰는 행위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그 시기에 내가 썼던 글을 다시 읽었다. 2019년 3월 27일의 기록이다.
오늘은 참석하기로 한 시사회가 있는 날이었는데, 초과 모객 등의 몇 가지 사정으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대개 그 배경에는 사소한 선택들이 있다. 이를테면 카페에 앉아 있다가 조금 더 일찍 나서지 않은 것이라든가. 승강장에서 바로 온 지하철을 보내고 다음 열차를 타기로 한 것, 같은 일. 업계에 종사하면서 시사회의 모객과 진행 절차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지 못한 건 오로지 내 하루 중 있었던 작은 선택의 선택들이 모인 결과다.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 낮에 본 다른 영화의 포토티켓을 출력하고 함께 간 지인과 근황을 나눴다. 영화 보고 책 읽고 글 쓰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불안한 봄을 맞이하는 중이다. 지금 걸어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질까, 잘 걸어가는 중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엄마의 전화가 온다. 한쪽에서는 "잘할 거야"라고 하시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두 가지 이야기를 함께 하시는 분. 이직 준비를 하면서도 (몇 안 되는) 글쓰기나 모임, 강의 같은 것을 통해 '먹고살고 있다'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처럼 이라면 '먹고 살'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한다. 은유 작가님이 말한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면 이런 것일까. 좋아하거나 추구하는 것들은 대체로 무용하거나 당장 드러나지 않는 것에 있다. "뚜벅뚜벅 더 걸어가 보기로 한 것, 다행이다."라는 한영옥 시인의 말이 언젠가의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집 근처의 자정 무렵의 카페. 밤에는 거의 다 마신 채 얼음만 남은 플라스틱 컵이 있고, 책 두 권과 펜과 노트가 있으며, 보고 싶거나 봐야 하는 영화나 드라마, 책들이 쌓여 있다. 크고 불확실한 행복을 오늘도 생각한다. 앞으로 할 것들의 공지를 올리고 내용과 이야기 준비를 하면서, 지난 일들을 가능한 떠올리지 않기로 마음먹으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한 번 더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극장에서 몇 달 전에 본 영화의 주제곡을 아직도 듣고 있는 일이라든지. 다음 주에 참석할 시사회라든지. (2019.03.27.)
당장 내 생활이 지속되기 어려우면 사소한 하루의 일상에도 경제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 순간 글 쓰는 일은 지속불가능해진다. 덕업일치도 좋고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과정도 소중하지만 지나고 보니 쓰는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쓰는지도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상을 설정해 놓고 그것만을 따라가야만 삶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쓰는 일을 놓지 않을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되어야 하고 그래야 나중에 무엇이든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뭔가를 쓰고 있고 그것 자체는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글을 누가 읽을까? 단지 한두 명의 우연한 독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시큰둥하게 내 글을 지나칠 수 있다. 내 한 편의 글을 브런치에 발행하는 순간 그 글이 세상 많은 독자들에게 노출되고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일단 접을 필요가 있다. 많은 글에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쓰는 일은 철저히 혼자가 혼자에게 전하는 나만의 대화가 된다. 그럼에도 쓰기를 지속하게 해주는 요소란 불확실함 속에서 무엇이든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태도와, 지금의 불안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용기, 그리고 하나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쓰는 일 자체에 커다란 목표나 지향점을 설정해두지는 않는 것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