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 오해, 몰이해, 무례함
한 온라인 서점에서 한강 작가 소설의 판매지수가 연이어 급상승하는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600만이라니.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며칠간 그 책을 구하기 쉽지 않았고, 수상 직후 온라인서점에서도 주문 후 수령하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보여주기 또는 유행이라 할지라도, 문자 언어로 된 이야기를 접하는 일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기록의 힘은 그것을 읽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일 자체에서 비롯한다. 책이 유행하고 많이 팔리는 현상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한다.
아쉽게도 책과 글은 '텍스트힙'이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들려올 만큼 신기하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분야일지도 모른다. 읽으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휘발되는 자극만 찾는 사람이 된다. 다시 말해 쉽고 편한 것만 찾게 된다는 뜻이다. 작년 방영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지구별 잡학사전>('알쓸별잡')에서 김상욱 교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복잡한 인과나 논리 체계의 문제는 눈으로 봐야 보인다. 문자를 썼기 때문에 인류가 논리적 사고를 하게 됐고 세상을 보는 틀을 완전히 바꿨다. (...) 새로운 세대가 책과 문자를 통하지 않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려해봐야 한다"라는 것. 이게 단순히 기성세대의 우려에 불과할까. 단순히 현생이 팍팍하고 사회에 온갖 이슈와 자극이 넘쳐나서 라고 하기에는 세상이 그렇게 쉽고 편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는 게 문제다.
당장 여느 유튜브 영상의 댓글들만 살펴봐도 그 댓글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의미와 맥락을 헤아리는 노력 대신 즉각적인 판단으로 영상 속 정보의 단면을 통해 전체를 재단한다. 가령 어느 영화평론가가 특정한 영화에 대해 어떤 한줄평(또는 20자 평)을 쓰거나 별점을 주면 거기에 대해 댓글을 작성하는 사람들은 마치 평론가가 서비스직 종사자인 것처럼 자신의 취향과 평가 방식에 평론가의 그것을 맞출 것을 '요구'한다. 평론가가 자신의 견해를 나름의 방식으로 정연하게 말과 글로 풀어낸 것에 대해서 의견을 내는 차원을 넘어 무례한 언어로 반응하는 모습에서 나는 단순히 문해력과 같은 키워드만이 아니라 비평, 나아가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몰이해를 본다. 자신의 시야만 생각하고 타인의 감상과 가치관에 대해 "왜 어려운 단어 쓰냐", "있어 보이려고 억지로 좋게 평가해 준다" 따위의 리액션을 하는 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전제해야 할 사실은 1) 이것이 그 사람이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는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며, 2) 어떤 평론가의 평가가 그 자체로 정답 이거나 반론이 제기되지 말아야 할 절대적인 기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비평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한 상기의 '반응'들에 대해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내 의견일 뿐인데 왜 존중 안 해주냐"라고 한다. 무례함과 몰이해는 존중받을 수 없다. 모든 생각과 표현을 그 자체로 다 존중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둔감한 언어들이 모든 사람의 그것을 대변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온라인 공간에서 정제되지 않은 댓글을 통해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읽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