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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07. 2024

글을 쓸 때면 구 세대가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스스로의 힘으로 문맥을 읽으려 하지 않는 사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난 뒤 휘발되는 감상과 잔영을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작은 욕심이었다. 영화와 무관한 경영학을 전공했고 읽는 일은 좋아했지만 쓰는 일을 체계적,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다 보니 내게는 세상 모든 글들이 그리고 그것들을 쓰는 이들이 곧 선생이었다. 여러 시인과 소설가와 기자, 평론가 등의 문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처럼 쓰고 싶다고 여겼고 만난 적 없어도 그들은 내게 마음속 선배였다.


어떤 영화에 대한 관객과 기자/평론가들 사이의 온도차가 있을 때, 특히 유명한 평자의 한줄평이나 별점은 여러 의미로 화제가 된다. 문제는 화제가 되는 계기가 대부분 관객들이 자신들의 평가에 기자/평론가의 그것을 맞추기를 요구하면서 나타나는 반응과 그 확산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평가의 이유나 자세한 설명 등을 질의하면 좋겠지만, 댓글 등에서 표출되는 반응은 그보다 훨씬 단순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화사에 돈 받았냐?", "감독이랑 친하냐?" 어떤 경우에는 매체의 존재나 '비평의 의미'까지 문제 삼는다. "(씨네21) 한겨레 아니랄까 봐"라든지. 실은 그 모든 이야기는 아래 둘 중 하나로 대체될 수 있다.


1. "이 영화에 왜 별점을 그만큼밖에 안 주나요?"

2. "이 영화에 왜 별점을 그렇게 높게 주나요?"


저 멀리(?) <연평해전>(2015)이나 <인천상륙작전>(2016) 같은 영화의 개봉 때에도 그랬지만 2020년대에 와서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생충>(2019)의 이른바 ‘명징-직조’ 논란을 기점으로 더 심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래에는 여기에 문해력이나 반지성주의 같은 화두도 개입된다. 자기 취향을 존중해 달라고 외치면서 다른 사람의 그것에 대해서는 쉽게 재단하고, 오히려 자신이 영화평의 소비자인 것처럼, 코멘트의 수준을 넘어 요구를 해도 되는 것처럼 구는 반응들을 보면 어리둥절해진다. 황석희 번역가의 에세이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간혹 이런 유형의 영화평을 본다. 타인의 영화평이 마음에 안 든다는 영화평. 내가 그 작품을 좋게 봤으면 그것으로 된 거고, 그 작품을 좋지 않게 봤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남이 호평을 하든 혹평을 하든 상관없는 일이다. (...) 이런 글에 가장 불필요한 것은 '왜 이런 걸 재미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예광탄을 기점으로 발사되는 자기애적이고 현학적인 해설이다. '왜 이런 걸 재밌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로 시작되는 반대 입장의 글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를 좋게, 혹은 좋지 않게 봤다면 내게 어떤 면이 좋았고 좋지 않았는지, 어떤 감상이 있었는지를 쓰면 된다. 남의 감상을 끌어와서 평가하는 건 영화평이 아니라 '타인의 영화평에 대한 평'이다."

-황석희, 「취존이 어렵나?」, 『번역: 황석희』에서, 달, 2023, 194쪽



상술한 '반응'(리액션)을 볼 때 자주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이 과연 영화평의 독자가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씨네21』과 같은 영화 관련 지면을 사서 읽거나 그것을 온라인으로 보는 사람, 혹은 영화에 대해 평하거나 글을 쓰는 활동을 하는 이들의 책 등을 읽는 사람이다.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영화 감상에 숫자만 있지 않고 좋았던 영화와 별로였던 영화 사이에 수 십, 수 백 가지 이상의 다양한 경로와 맥락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반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씨네21』 김혜리 기자가 블로그에 "20자 평과 별점은 영화 기자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붙이는 추신에 불과하니 영화 저널리즘을 그것과 동일시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문장을 남긴 적 있다. 나는 <사냥의 시간>(2020)에 대한 『씨네21』 기자/평론가 별점 갈무리 게시글에 여러 사람들이 "넷플릭스 씨네21에 돈을 얼마나 준 거냐"와 같은 식의 댓글들을 남기는 것을 보며 거기에 저널리즘에 관한 위 인용을 덧붙여 20자 평과 별점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남겼다가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답글을 받은 적 있다. (거기에 내 의견을 쓰려고 했는데 몇 분 뒤 그 댓글은 삭제됐다.) 내 요지는 기자/평론가들이 좋은 평가를 하는 건 돈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작품에 대해 좋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왓챠피디아 앱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는 종종 "한줄평이 성의 없다"라든가 "별 3점이 진심인가" 같은 댓글이 달린다. 꽤 자주. 아니, <범죄도시 3>에 별점 3점 주면 안 되나요? (이동진 평론가는 자신의 한줄평과 별점의 의미에 대해 여러 차례 블로그나 유튜브 채널, 방송 등을 통해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처음에는 그 마음속 선배들의 직업에 대한 일종의 연대감에서 이슈가 있을 때마다 별점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리뷰하기'라는 행위 자체가 온라인 공간의 사람들이 말하는 쓸모의 영역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다고 여겨져 나름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조금 더 힘주어 쓴다.


내게 그들의 댓글은 글을 읽고 글쓴이와 상호작용하는 독자의 행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보고 거기에 '리액션'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특정한 사고방식과 그 표현의 총체로서 길든 짧든 글의 탄생 과정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글을 직접 써보았거나 혹은 거기에 담기는 노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댓글은 리액션에 그치지 않고 조금 더 건전하거나 생산적인 대화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현상의 이면을 단순화시키는 일이다. 그렇지만 같은 현상을 10년쯤 지켜봤으면 이제는 조금 단호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언제나 매사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쪽은 타인의 생각과 관점을 더 잘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다. 자신이 대단한 소비자이자 독자인 것처럼 저널리즘 종사자들의 노력을 재단하고 폄하하는 이들에게는 말과 글에 권리 이전에 책임이 따른다는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결여된 인식을 토대로 한 리액션을 나는 별로 존중할 생각이 없다. 어쩌면 이것도 '글을 쓰는 사람'이 갖는 종류의 자의식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글을 쓸 때면 자꾸만 구 세대가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쇼츠와 릴스와 세줄 요약의 시대에 길고 긴 문장을 자꾸만 써 내려가면서 그것이 축약되고 계량될 수 없는 것이라고 애써 믿는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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