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도 기록한다는 건 늘 미완의 문장을 겨우 남겨두는 일이다. 완벽할 수는 없을 문장들로 매 순간 쓰는 생각과 감정의 잔영들. 내가 오늘 본 그 영화의 뒷맛 또한 영화가 끝나는 즉시 휘발되기 시작할 뿐 아니라 영화의 상영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언제든지 새로운 것들로 대체되고야 만다. 보는 동안 무의식 중에 중요하다고 느꼈던 장면이나 대사도 보고 나면 다 기억해내지 못한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 이 순간에도 새로운 콘텐츠는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 기록하다 보면 ‘이 느낌이 내가 그때 그 장면에서 본 그게 맞나?’, ‘이렇게 표현하는 게 과연 정확한가?’ 따위의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록이 그것이 완전하고 정확해서가 아니라 쌓이고 쌓여 생겨나는 역사성으로 인해서 가치 있어진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기록을 쓴 바로 자신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나날이 성숙해 가면서 생겨나기도 하는 게 개인의 역사다. 매일 무엇인가를 돌아보며 끼적이다 보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 쓰임의 흔적들이, 행위들이, 그 과정에서 남은 것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지난 하루를 말해주는 증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당장의 기록이 모두 정확하고 철저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 돌아보면, 그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문장들도 단서가 되고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함께 거닐었던 길의 풍경과 한낮의 하늘 색깔과 구름의 모양들, 어제 먹은 점심 메뉴의 종류와 저녁에 마신 위스키의 풍미. 읽고 있는 이 책에서 공감되어 마음에 와닿은 어떤 문장. 친구와 전화하다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다정한 위로의 말들. 다음 주에 예매하기로 한 콘서트 티켓. 이건 소설이든 드라마든 어디에 대입해도 괜찮고 대중문화나 예술이 아니라 당신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게 있었다’ 정도의 감각으로만 막연하게 남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들여다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사이에 알지 못하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 ‘어떤 일’이라는 건 기록하기를 통해 삶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기록으로 삶의 진실성을 획득한다는 건 식사를 하고 양치를 하듯 글을 쓰는 게 자연스러워진다는 뜻이다. 이건 시간을 들여야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진실한 것은 말 그대로 글을 멈추지 않고 쓰는 것. 글 한 편만 써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영화 한 편에 대해서도 재미있었다고 평점 5점을 주고 다음날 잊어버리는 삶과 그 영화에 대해 노트나 블로그에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삶은 다른 삶이 된다. 쓰기를 한 달, 여섯 달, 일 년쯤 계속하다 보면 그 전후에는 분명 어떤 변화가 있게 된다.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개연성을 지나 핍진성으로 향하는 다리. 계속한다는 건 개연하기만 한 게 아니라 핍진(진실에 가까움)해진다는 뜻이다. 언제나 대단한 걸 쓸 필요는 없다. 시작은 “대박 꿀잼이었다!” 같은 단순한 표현일 수도 있다. 다음날에는 재미있었던 장면에 대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날에는 그 장면에서 주인공의 말과 행동이 어땠는지를 떠올려볼 것이고 또 어느 날에는 언젠가 재미있게 봤던 어떤 영화의 패러디가 거기 담겨 있었다고 떠올릴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만큼의 삶을 살아도 특별할 것 없는 ‘남들만큼’의 순간으로 채워질 수도 있고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순간의 경험을 최선을 다해 만끽하고 그 여운을 즐기는 동안 더 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수 있는데, 이는 매 순간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고 평범해 보이는 나날에서 사소하지만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그 태도를 태도에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만드는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일상을 기록하길 멈추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