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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22. 2018

'좋은 이별'에 대해 생각하다

그것은 가능할까

얼마 전 '좋은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지난 날의 일들을 안주 삼아 거닐었던, 그 대화의 답은 '과연 그런 게 어디 있겠냐'는 것이었고 대화의 주된 화제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거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것이었지만, 며칠 동안 나는 그 단어에 대해 더 생각했다. 좋은 이별. 이별은 좋은 것일 수 있는가. 평생에 사랑은 단 한 번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어도, 헤어짐은 겪기 힘든 것이며 가능한 겪고 싶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에 '헤어지면 어떡하지' 싶어지는 그 불안을 나 역시 헤아릴 수 있다. 그러니 질문을 조금 고쳐 적어야 하겠다. 이별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 혹은 가장 좋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컷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됩니다.


상실의 태도에 관하여 돌아보던 중 마침 최근에 다루게 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들이 일본 영화를 이야기할 때 여간해서는 몇 손가락 안에 들지 않는 경우를 보기 어려운 영화다. 이 영화가 2016년 재개봉했던 것을 제외하면 최근에야 국내에 소개되는 작품이 뜸하지만, 이누도 잇신 감독은 자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작품으로 감독상과 각본상을 모두 수상했을 만큼 영화 언어로 이야기를 만드는 솜씨를 인정받은 감독이다. 개봉 당시의 국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끝내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게 사랑이고 연애"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영화의 내용을 되짚어보려다 이 말에서 다시 멈췄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 언제든 끝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다가오지 않은 영원함을 기약하지 말고, 늘 곁에 있는 불확실함을 믿자"라고 적은 것은 2년 전의 일인데, 나는 지금도 그때 쓴 문장을 잊지 않고 있다. 헤어짐의 (잠재적) 존재를 안다는 일은, 우리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으니 지금 잘 만나봐야 무슨 소용, 이겠느냐 여기며 현재를 통째로 비관하는 일이 아니다. 이 문장을 쓴 진의는,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현재의 매 순간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영원함과 불확실함이라는 표현을 끌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 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박소란, '다음에' 전문
창비시선 386 [심장에 가까운 말] 중에서 (2015)


어떤 약속을 할 때 아무리 순간의 진심이 담겨 있다 해도, 너무 많은 약속과 너무 먼 기약은 상대를 때로는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약속을 하는 것에 대해 나는 늘 조심스럽다.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약속이 아니면 과연 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독설이 아니다. 조금 돌아왔지만 당겨 말하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나와 너는 평생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언젠가, 갑작스러운 헤어짐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음 한편에 넣어두자는 것이다. 어제에 이어 오늘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마침내 내일도 곧 오늘이 된다는 사실을 고마워하자는 말이다.


인스턴트 메시지로 헤어지자는 말을 주고받았든지, 아니면 조용한 찻집에서 만나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웃으며 담담히 마지막 인사를 건넸든지 간에, 헤어짐은 이미 헤어진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이다. 이별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라고 받아들일 만한 것은 무엇일까. 내게는, 이별 이후에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그것이겠다. 생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부분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커서 전부나 다름없었던, 하나의 세계를 잃는 일은 무엇으로도 비교하기 힘들 만큼 아프고 아픈 일이다. 이별을 이미 겪어봤다고 하여 이후의 또 다른 이별이 익숙하거나 둔감해지지는 않는다. 그건 언제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별'이 있을 것이라 믿어보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 역시도, 세상의 모든 사랑을 겪어본 사람처럼 답과 정의를 논하기란 불가능하다. 나 같은 우주 먼지의 존재가 세상 만물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사랑을 논하다니, 당치 않은 일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컷


그러니 그저 영화 하나를 끌어와 그것이 이 물음의 일부를 해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다시 이야기해보려는 것이다. 영화의 주된 화자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이지만 제목이 말하듯 좀 더 밀접한 주인공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일 것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는 사랑의 감정이 타오르는 절정의 순간도, 격정적인 관계를 나누는 애정의 순간도,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된 눈물의 홍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아낌없이 써버린 채 관계의 생명력이 다했음을 깨닫는,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받아들임'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컷




담담한 내레이션 이후, 길을 걷다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츠네오'의 경우를 먼저 생각한다. 과연 그는 도망쳤기 때문에 우는 걸까. 이것은 죄책감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이 감정의 성숙이라는 한 단계를 지나왔음을 발견한 데에서 오는 성장의 눈물이다. 단지 '도망쳤다'라는 해석만으로 누군가를 탓해야만 한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랑의 절반은 전과가 될 것이다. 헤어짐을 선고하는 이는 죄인이고, 그 헤어짐을 당한 이는 피해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을 겪은 이라면, 이는 결국 시간이 흘러, 나는 먼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라는 판단의 명제가 아니라 어떤 관계가 끝났다, 라는 서술의 명제가 되어갈 것임을 알리라. 사랑이 끝난 후 마주하며 겪게 되는 애도의 시간이란, 바로 그 명제의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에 해당할 것이다. 그간의 사랑 하에 서로가 나눴던 약속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약속으로만 남았음을 직시하는 과정이며, 이제는 서로의 존재가 더 이상 함께일 수 없다는 거리의 자각이기도 하며, 이제는 그때의 마음과는 다른 다음을 맞이해야만 한다는 일을 생각하는 과정에 놓이는 것이다. 이별 후의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보낼지는 사랑의 생애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앞서 '헤어짐의 존재를 안다는 일'이라고 적은 바는 사랑이 낭만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 자각에서 나온다.


이상적으로 꿈꿔본다면야 나는 누군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으면 좋겠고 그 사랑의 주체와 대상 역시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유일의 존재라면 좋겠지만, 여기쯤 왔다면 서술하지 않아도 이미 다들 알고 있으리라. 그러니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해야겠다. "내가 당신의 첫사랑이 아니었듯, 마찬가지로 마지막 사랑 역시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 사랑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생각하고 만끽하자."라고 말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컷


이제 '조제'이자 '쿠미코'의 경우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그녀의 이름은 '쿠미코'이지만, 그녀는 '조제'로 불리고 싶어 했으므로 '조제'를 앞에 적는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딴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에서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말은 사랑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일 테니, '조제'이기를 바란 '쿠미코'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나온 말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츠네오'와 함께 동물원의 호랑이를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고 싶었다던 바로 그 호랑이. 물고기도 보았다. 끝없는 바다 밑을 유영하는 물고기는 어딘가로 헤엄치고 나면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영화의 제목이 철저히 '츠네오'가 아니라 '조제'라는 인물을 부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뜻한다.


지나간 사랑을 돌아볼 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랑에 실패했다"라고. 만약 이 문장을 "나는 그 사랑에 실패했다"라고 적는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내가 만약 당신과의 사랑이 평생 지속되기를 꿈꿨다면 그것은 달성되지 못한 꿈일 테니까. 하지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면서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면, 앞의 문장을 나는 이렇게 고치겠다. "나는 그 사랑을 겪는 데 성공했다"라고. (이는 "나는 그 이별에 성공했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다소 과격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좋은 이별'임을 누구나 수긍하게 할 만한 단 하나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이별'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사후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이별'은 방식이 아니라 그 이후의 나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다. 사랑이 끝난 후 얼마간은 분명 더 외롭겠지만, 나는 다시 '다음'과 '우리'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이는 '조제'와 '츠네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다. '츠네오'는, 자신이 이별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제'는, 자신이 사랑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츠네오'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난간에 몸을 기댄다. 집에서 요리를 하던 '조제'는 또 넘어진다.


그러나, 내가 넘어진 자리여기라는 바를 아는 사람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막연한 환상에 기대지 않은 채 나에게 '다음'이 분명 없지 않을 것임을 믿는 한, 나는 앞으로도 넘어진 곳에서 다시 몸을 일으킬 것이다, 비록 상처투성이라 할지라도.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 역시, 넘어져 있다면 꼭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한다. 우리가 넘어진 자리는 아픔을 준 곳이지만, 우리가 일어설 때 그곳은 '아픔이 있었던 곳'이 될 테니까. 다리 대신에라도 손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될까. 좋은 이별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주저앉아 있던 순간에도 내 눈물을 닦은 게 내 손이었다는 걸 잊지 않게 되는 순간 찾아오지 않을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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