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이빙 MR. 뱅크스>(2013)로부터
"바람이 동쪽에서 불고 안개가 끼기 시작하면
뭔가 심상찮은 일이 시작될 징조.
그게 뭔지는 뭐라고 꼬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느낄 수 있어, 전에도 일어났던 그 일."
영화 <세이빙 MR. 뱅크스>(2013)는 이 세상에 '이야기꾼'이 왜 필요한지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앞뒤에는 위와 같은 내레이션이 배치되어 있다. 위 내용이 무얼 뜻하는지에 대해선 조금 뒤에서 서술하도록 하고, 우선 작품의 배경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하겠다. 월트 디즈니(이하 '월트', 실제로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보다 이름을 부르길 원했다)는 우연히 자신의 딸이 읽고 있는 동화 『메리 포핀스』를 알게 되고는 그 작품에 흠뻑 매료된다. '메리 포핀스'의 이야기를 딸에게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원작자인 P. L. 트래버스(이하 '트래버스', 본명은 헬렌 린든 고프. 그가 왜 P. L. 트래버스란 이름을 쓰게 되었는지는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를 설득하지만, 트래버스는 판권을 넘기길 거부하며 월트의 설득은 20년 동안 계속된다. <세이빙 MR. 뱅크스>는 『메리 포핀스』의 트래버스와 월트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극화한 작품이다.
영화 <메리 포핀스>(1964)의 존재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으므로, <세이빙 MR. 뱅크스>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 세상 많은 이야기의 핵심은 언제나,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 몇 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작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작가는 어째서 그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메리 포핀스』의 원작자는 어떤 삶의 과정을 산 인물일까. 월트는 그 작품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
그러니까, 우여곡절 끝에 트래버스가 <메리 포핀스>의 영화화를 허락했으리라는 바를 알고 있는 우리는 <세이빙 MR. 뱅크스>를 보며 자연히 트래버스의 과거사에 주목하게 되고 영화 역시 1908년 호주와 1961년 영국을 오가며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과정을 찬찬히 훑는다. 영화의 시작 전부터 이미 트래버스는 월트의 설득을 20년간 꾸준히 거절한 상태이므로, 영화에서 중점이 되는 건 월트가 어떻게 트래버스를 설득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중요한 대목은 월트와 트래버스, 트래버스와 월트 사이의 대화에서 많이 나온다.
트래버스는 <메리 포핀스>가 뮤지컬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작품 내 삽입되는 애니메이션 역시 강하게 거부했다. 그런 그를 월트가 설득하게 되는 건, '월트 디즈니'에게도 자신과 비슷한 과거사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트래버스가 『메리 포핀스』를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써 내려가야 했는지에 대해 월트가 진심으로 헤아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능해진다.
이 글의 서두에 있는 내레이션의 내용을 다시 보자. 영화 <메리 포핀스>를 감상했다면, 저 내용이 다름 아닌 <메리 포핀스>에서 '버트'(딕 반 다이크)가 부르는 노래의 일부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당겨 말해 <세이빙 MR. 뱅크스>는 작품 『메리 포핀스』와 작가 'P. L. 트래버스'를 일종의 공동 운명체로서 헤아리려 노력한 영화다. 'MR. 뱅크스'는 물론 <메리 포핀스>의 '조지 뱅크스'를 지칭한다.
트래버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린 날의 자신을 생각하며 『메리 포핀스』를 썼다. 작품과 작가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동시에 쓰인다고 한다. 『메리 포핀스』는 어쩌면 자신의 쓰라린 과거와 아픈 기억을 떨쳐내지 못했던, 그래서 그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삶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트래버스의 인고의 역작이 아닐까.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했던 꿈에게, 이야기 속에서나마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서. 슬픈 동화에 지친 자신에게 삶의 작은 희망 하나를 심어주기 위해서. 지난 삶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이야기꾼'의 존재는 한 번뿐인 인생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가능한 더 좋은 쪽으로.
본 글은, 3월 11일(월)부터 시작될 연재 [봐서 읽는 영화] vol.01의 '파일럿 에피소드' 성격의 글입니다. 4주간 14편의 영화 글이 이메일로 전달되는 [봐서 읽는 영화] vol.01의 신청은 (링크)에서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