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Nov 01. 2019

'무조건적 취향 존중'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좋은 해석 찾기: 영화 감상의 숲과 나무

영화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방정식의 해를 찾는 것과 달라서 정해진 답이 없다. 일단 창작자의 의도를 헤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감독과 작가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특정한 시각과 관점을 말하기 위해 그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관객이 반드시 그들의 의도에 따라서 영화를 해석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공감과 이해의 영역에 가깝지 설득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정해진 답'은 없어도 '좋은 답'은 있지 않을까. 쓰고 보니 '답'은 단 하나의 것을 말하는 것만 같으므로 '좋은 해석'이라고 고쳐 써보자.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하려 한다.


기록하는 일은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과의 상호 작용을 포함한다. 상호 작용이란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다. 작정하고 특정한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게 아닌 한 누군가 영화에 대해 "제가 보기엔 이런 영화였는데요, 당신도 꼭 제가 본 것처럼 보셔야 합니다!"라며 주장을 주입하려 든다면 독자가 달가워하기 어렵다. 독자도 글 쓴 사람의 관점에 동의했다고 해도, 여기에는 '내가 느낀 게 맞다'라는 무언의 강요 내지는 상대를 설득하고 싶은 의지 같은 것이 묻어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화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과 별로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말하겠다. 아무리 영화 이론적인, 영화 언어의 접근 방법으로 그 영화를 해석한다 해도 그 해석은 완벽해질 수 없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해야겠다.


그러면 무조건 '네 말도 맞고 내 말도 맞고 우리 모두 사이좋게 해피엔딩'인 대화만 하라는 거냐고 누군가는 묻겠다. 그렇지 않다. 어쩌라는 거냐고? '완전한 정답은 없는 것'과, '모든 게 정답인 것'은 다르다.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일에 있어서는 온전히 논리적이고 공학적인 접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감상자가 살아온 경험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가치관과 세계관이 그 영화를 바라보는 일종의 색안경처럼 기능하며 그 색깔의 RGB 값이 완전히 동일한 두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감상이 논리공학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은, 감성직관의 영역이 포함된다는 뜻이다.



한 영화에서 특정 장면에 대해 누군가 "그 장면은 너무 주제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어서 좀 별로였다"라고 말할 때 적어도 그 사람의 세계에서 그 해석은 맞을 것이다. 무엇이 과잉이라고 느꼈는지, 그 주제란 무엇이고 '너무 직접적'이라고 판단한 배경은 무엇일지를 차근차근 들어본다면 (즉, 그 사람의 말이나 글로 된 감상평에서 그것이 충분히 드러난다면) 나는 "당신의 해석은 꽤 타당하군요. 그럴 수 있겠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인정하되 동의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일부 수긍할 수 있고, 아니면 물론 전적으로 공감할 수도 있다. 자연히 내 감상에 따라 몇 가지의 선택지가 있을 텐데, 가령 나는 똑같은 장면을 두고 "바로 그 장면이 있어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담아내고자 하는 바를 납득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후에 나 역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나름의 언어로 정리해볼 것이다. 두 견해가 대체로 비슷하거나 정말 서로 맞닿아 있다면 공감대를 형성하고 확인하는 일이겠지만, 서로 다른 견해라면 그건 각자의 견해가 무엇인지 헤아린 뒤 자신이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관점을 깨닫는 일이다. 둘의 입장 차이를 좁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야 하는 게 아니다. 대화는 상호 존중을 필요로 하고, 좋은 대화는 각자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내 생각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라는 전제를 잊지 않을 때 가능하다. 한 영화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다면 그건 위험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과거 국내외의 여러 독재 정권에서 영화를 비롯한 문화 예술 작품을 검열하거나 그것을 정치적 선전을 위해 이용했던 사례를 여기서 떠올려 보는 게 아주 동떨어진 예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건 다름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옳음과 나머지 모든 틀림만 있음을 뜻한다. 그럴 때 문화와 예술은 존재하지 않거나 배척받는 것이 된다.


'무조건적인 취향 존중'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지 이제 말할 차례다. 앞에서 하나의 답을 정해놓고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그것과 동반해야 하는 게 하나 더 있다. 모든 생각이 그 자체로 다 정답은 아니라는 말은, 어떤 답은 '좋은 해석'에 가깝고 또 어떤 것은 '좋은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취향 존중을 외치는 시대지만 어떤 취향은 존중하기 어려운 취향이다. 어떤 생각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생각이다. 그건 어떤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그다지 유의미하다고 보기 어렵거나 너무 지엽적인 요소를 전체로 확대하는 생각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가령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2017)라는 영화에 대해 말한다고 해보자. <레이디 버드>는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의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고등학생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은 '크리스틴'이 고교생이라는 점과 여성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감독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든 <레이디 버드>를 말할 때 인종 문제는 중요한가? 만약 <레이디 버드>의 서사를 논할 때 인종 문제가 얼마만큼의 중요도를 갖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면 인종 문제는 마땅히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각 캐릭터들의 성별은 중요하지만 그들이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백인인지 흑인인지는 내용 전개의 핵심을 벗어난다. 어떤 사람은 <레이디 버드>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백인이어서 아쉽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누군가 <레이디 버드>를 인종 문제를 중심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을 별로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조금 앞서 말한 '너무 지엽적인 요소를 전체로 확대하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반면 누군가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의 성장 과정을 서술하는 방식에 있어서 느낀 어떤 종류의 아쉬움에 대해 말한다면 그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겠다. 나는 <레이디 버드>를 볼 때 내 졸업식 날 가족들과 보낸 시간과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떠올랐을 만큼 영화 속 '크리스틴'과 그녀의 어머니의 관계가 설득력 있고 진솔하게 그려졌다고 느꼈지만 누군가는 이에 공감하지 않거나 영화에서 기대한 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모든 생각을 그 자체로 다 존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추었을까? 음, '좋은 해석'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았다.




*이메일 영화리뷰&에세이 정기 연재 <1인분 영화> 11월호 구독자 모집: (링크)

*신세계아카데미 겨울학기 영화 글쓰기 강의: (링크)

*4주 영화 글쓰기 클래스 <써서 보는 영화> 11월반: (링크)

*글을 읽으셨다면, 좋아요, 덧글, 공유는 글쓴이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이전 06화 그 영화는 정말 내용이 없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