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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Nov 17. 2019

영화에 '좋은 해석'이라는 게 있다면

성실히 질문하고 답하기

'좋은 해석'에 대해 말해볼 차례인데 전제하자면 "이렇게 보면 영화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대단한 답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게 답을 내릴 수 없기도 하거니와, 스스로 성의껏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자격으로 전문가가 된 것처럼 영화에 대한 좋은 해석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싶기도 해서다. 다만 써보는 것은, 글에 자격을 부여해주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부여한 최선의 책임감과 사명감. 어떤 영화가 내게 질문을 제시했을 때 회피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자신만의 답을 글의 형태로 남겨두는 일이다.


"원칙적으로 해석은 무한할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평등하게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나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이야기한 '더 좋은 해석'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나는 창작자의 의도를 가능한 헤아려낸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 있는 질문을 제시하는 해석이다. 이 둘은 종종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하기도 한다. 연출자와 작가가 자신들이 다루는 이야기를 통해 항상 특정한 메시지를 담는 것은 아니며 영화에서 펼쳐진 이야기가 연출자와 작가의 가치관을 반드시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내지는 태도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는 있다. 엔터테인먼트에 충실하고자 오락성을 고려하는 것이든 아니면 작품의 세계와 거기 담긴 주제 의식을 창작자 본인이 마땅하다고 믿는 가치와 철학에 따라 예술적으로 전하는 것이든.


잘 만든 영화일수록 영화 스스로 결론을 내리거나 가치관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영화가 끝난 후 관객이 직접 돌아보고 생각하게 유도한다. 즉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남긴다. 결말은 왜 그렇게 맺어졌을까. 주인공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그러한 선택을 인정하거나 공감할 수 있을까.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을까. 질문은 관객 각자에게 저마다의 상황과 저마다 지닌 가치관에 따라 달리 전달된다. 한 사람에게 중대한 물음표를 남긴 영화가 다른 한 사람에게는 시시하고 뻔한 오락 영화로 기억될 수 있다. 이것 자체에 어떤 우열을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라, 좋은 해석이라는 건 그만큼 영화가 남기는 질문에 대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혹은 성실하게 자신의 답을 찾으려 노력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영화 <틴 스피릿> 스틸컷


<틴 스피릿>(2018)이라는 영화에 대해 해설을 할 기회가 있었다. 엘르 패닝이 연기한 열일곱 살의 '바이올렛'은 '틴 스피릿'이라는 오디션을 통해 작은 섬마을에서 영국 본토로 향한다. 자신이 자라온 곳을 떠나 새로운 관문으로 접어드는 동시에, 자란 곳에서의 생각과 경험이 노래와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 수많은 경연 프로그램을 시청해왔고 여러 음악 영화들을 만나왔을 관객에게 <틴 스피릿>은 새로울 것도 없는 흔한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해설할 자리가 주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에 대해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충분히 많겠다고 느꼈다. 요컨대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틴 스피릿>은 어떤 길 하나를 보여준다.


감독 데뷔작이라고 하면 흔히 기대를 낮추고 보거나 '데뷔작'이니까 처음부터 잘 만들 수는 없다고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보기 마련인데, <틴 스피릿>도 걸작의 반열에 오를 만큼 아주 대단한 영화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틴 스피릿>의 감독인 맥스 밍겔라는 배우 출신으로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장편 연출과 각본을 담당했다. 배우 활동을 하면서 그는 이미 2009년에 영화의 초고를 썼다. 막연히 팝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기획은 맥스 밍겔라 감독의 절친이자 배우인 제이미 벨, <라라랜드>(2016)의 제작자 중 한 명인 프레드 버거와 음악 담당 스태프로 참여한 마리우스 드 브라이스 등이 합류하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주인공 '바이올렛'을 연기한 엘르 패닝은 미국인이지만 맥스 밍겔라 감독 본인이 영국 태생이며 그의 부모는 '바이올렛'의 가족처럼 여러 혈통이 섞여 있다. 맥스 밍겔라의 아버지가 바로 영화의 배경이 된 와이트 섬 출신이기도 하다. 영화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틴 스피릿>에 쓰인 음악들은 케이티 페리(Katy Perry), 로빈(Robyn), 엘리 굴딩(Ellie Goulding), 시그리드(Sigrid) 등 여러 팝 아티스트들의 곡을 원곡으로 삼는데 영화의 선곡은 전적으로 맥스 밍겔라 감독 본인의 플레이리스트를 기초로 한다. 영화를 위해 창작한 음악들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본인의 취향이 반영됐다는 뜻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바이올렛'이 오디션에서 탈락하거나 비극적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 짐작한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그만큼 이 영화가 예상을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인데, 그럼에도 내 기준에서 '좋은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세부사항들에 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바이올렛'은 한 명만 결선에 올라가는 지역 예선에서 2위를 하는데, 이 순위는 얼마 후 번복된다. 본래 1위를 했던 참가자가 가명을 썼고 다른 대회에 출전했던 경력을 숨겼기 때문이다. 이 참가자는 실격 처리되고 대신 '바이올렛'이 결선행 티켓을 얻게 된다. '바이올렛'은 바이올렛 카민스키라는 본명을 쓴다. 이민자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무언의 선언. 이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당당한 이름으로 본인의 이야기와 재능을 펼치는 예술인들을 향한 응원처럼 다가온다.


<틴 스피릿>은 대단한 작가적 야심이 담긴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안정적이고 무난한 선택을 하면서도, 이야기 곳곳에는 상업 영화의 흔한 문법 속에 창작자 본인의 팝 음악 취향과 애정이 묻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배우 브래들리 쿠퍼의 감독 데뷔작 <스타 이즈 본>(2018)을 떠올리면서 영화 <틴 스피릿>의 해설 자리에서도 '좋은 이야기'에 관한 생각들을 영화와 접목해서 다뤘다. 당연히, 내 생각과 해석이 정답일 리 없다. 그게 맥스 밍겔라 감독 본인이 뜻한 바와 맞닿아 있는 해석이라고 해도, 관객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므로, 이건 전적으로 '내 생각'일뿐이다. 누군가는 <틴 스피릿>을 보고 여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해석은 모두가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이 아니다. 그런 해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이어야 좋은 해석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수긍할 수 있어야 좋은 해석인 것도 아니다. 수십 개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극찬이 쏟아지는 영화라고 해도 누군가는 그 영화에 대해 비판적 시각에서 이야기할 수 있고 그것 역시 좋은 해석이 될 수 있다. 좋은 해석은 본인의 주관이 잘 담긴 해석이다. 곳곳에 담긴 창작자의 의도를 헤아리고자 노력하면서, 자신이 느낀 바에 대해 생각하기. 영화가 끝난 후 생겨난 질문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답하기. '좋은 해석'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라고 그래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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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 영화 글쓰기 클래스 <써서 보는 영화> 11월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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