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먼저 다녀온 길

타블라를 연주하며 알게 된 것들 10

by 손안의 우주

스포츠나 음악처럼 몸을 쓰는 모든 분야에서는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개념이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어떤 상태에 단지 상상만으로도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신비한 단어다.

타블라를 연주하며 나는 수없이 불가능해 보이는 기법들과 마주했다. 물론 다른 타악기를 연주할 때에도 쉽게 정복되지 않는 기술들은 많았지만 타블라의 손 움직임은 차원이 달랐다. 입문자 시절엔 단순히 악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 언젠가 정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 때우기식 반복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즈음부터 나는 타블라 연습이 단순히 손의 근육을 단련하는 훈련이 아니라 철학자나 수학자처럼 사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걸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깨달음이 꼭 책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듯이, 오히려 많은 경우 길을 걷거나 멍하니 있을 때, 즉 무의식이 감각을 다시 배열할 틈이 생길 때 찾아왔다.

무의식에 접속하기

악기를 손에 쥐는 순간에는 감각의 네트워크가 특정한 방향으로 ‘결정’된다. 이미 내가 익숙한 감각지로 반사적으로 빨려들어가기 때문에 새로운 감각의 노드가 생성되기 어렵다. 좋은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르다가도 그것을 종이에 적거나 악기로 옮기려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흔히들 집중력과 창의성은 몸이 무언가를 매개할 때 더 발휘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다. 오히려 산만하고 상투적인 감각의 장벽들이 가로막고 있다.

하지만 매개 없는 순수 머리속 세계는 다르다. 여기에서 감각의 지도는 유동적인 상태에 있으며 그 지도의 방위는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손의 방향, 힘의 흐름, 자극을 여러 각도에서 재배열하며 몸이 아직 따라가지 못한 가능성을 미리 여행해볼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손끝으로 짚은 감각이든 마음속에서 그려본 감각이든 뇌는 같은 신호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울린 진동과 상상속 진동은 구분없이 각인된다. 결국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손이나 근육의 힘이 아니라 마음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 마음속 경계를 먼저 허무는 과정이다. 손이 열지 못한 문을 마음이 먼저 열고 들어가 새로운 길을 내는 일이다.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나는 그 신비한 순간을 생생하게 경험했다. 나는 “다 띠르끼뜨 따까 띠르끼뜨” 주법에서 매번 검지의 걸림을 느꼈다. 처음 ‘다 띠르끼뜨’의 세 번째 타격인 '르'에서 검지에 힘이 들어가며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반복됐다. 어느 날 운전을 하면서 그 구간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돌려보던 중 문득 지렛대 이미지가 떠올랐다. 인식망에 엄지와 약지를 지렛대로 고정해두고 검지는 마치 손가락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힘이 아니라 무게로만 남도록 상상했다. 타격의 주체를 검지가 아니라 약지와 엄지로 만들어서 검지는 반동으로 따라오게 만드는 사고 실험이었다.

그 순간 방위가 바뀌었고 감각의 지도 위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다음 날, 악기를 다시 짚었을 때 그 기술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손 안에 있었다.


이미지트레이닝 이후의 다 띠르끼뜨따까 띠르끼뜨.

그것이 나의 첫 이미지 트레이닝 경험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처음으로 연습이 꼭 손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손을 움직이지 않아도 감각의 지도는 계속 확장되고 있었고 그 지도 위의 방위는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고 있었다. 생각 속 연습이 실제 연습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이 체험은 이후 내 연습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생각으로 연습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으로 동작을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다. 없는 것을 꾸며내는 환상도 아니다. 감각과 이미지, 방향성과 흐름을 정교하게 매만지는 일이며 아직 연결되지 않은 감각들 사이를 연결해보는 시뮬레이션 작업이다. 마치 수학자들이 수식 없이도 머릿속에서 수학적 공간을 탐색하고 새로운 차원을 조합해보며 가능성을 실험하듯이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가능성을 앞질러 가서 맞이하는 일이다.


악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빈 지도를 들고 여행을 시작하는 이와 같다. 감각의 표식이 드물어 마음속에서 길을 그려보려 해도 어디서부터 선을 이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나 숙련자는 이미 수많은 감각들을 지층처럼 쌓아두었기에 그 위에 새로운 경로를 상상으로 덧그릴 수 있다. 그래서 초보자 시기를 잘 인내하고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실력이 갑자기 가속도를 붙는 듯 상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숙련자는 아직 닿지 못한 미지의 공간도 마음속에서는 먼저 거닐 수 있고 그 여행은 곧 새로운 감각의 지도가 된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 무한의 공간으로 향하는 걸음이며 아직 도달하지 않은 세계를 마음속에서 먼저 살아내는 행위다. 그것은 예술이자 철학이며 동시에 깊은 명상이다.


나는 막힘이 느껴질 때마다 손을 멈추고 걷는다. 악기를 떠나 산책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내면의 감각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천천히 방위를 다시 그려나간다. 손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감각의 공간을 향해 관찰자로서 나아간다.

글/정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