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른다는 것은 인간의 유흥 중에 오롯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연을 만끽한다는 의미에서 우아해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호흡'을 해야만 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산소를 호흡기관을 통해 받아들이고 몸속에 있는 탄소와 화학작용을 거쳐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 이 과정에서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가 발생하고 인간의 삶은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렇게 살아왔으며 살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인간은 문명의 진보를 호흡을 통해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등산을 하면 호흡 자체가 매우 즐겁게 느껴진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분명 땀이 나고 숨이 가빠지지만, 산에 있는 숲에서 내뿜는 싱싱한 산소를 마음껏 들이켤 수 있다.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보면 기쁨은 더욱 커진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담은 풍광에 저절로 눈이 커지고 마음이 벅차다.
자연은 항상 인간을 향해 위로와 공존의 손길을 내밀었다. 단지 인간의 욕망이 이를 외면할 뿐이다. 식물이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해 광합성을 하는 과정에서 인간과는 반대로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배출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런 현상을 신비롭게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지구 상에 먼저 서식했던 식물의 특성에 적합하게 진화한 개체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놀라울 것도 없다. 식물이 내뱉는 산소를 이용할 줄 아는 개체에 비해 그렇지 못한 개체는 당연히 생존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식물이 모여있는 숲과 인간의 인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울창한 숲을 걸을 때 느끼는 경외감의 근거는 인간과 식물의 긴 인연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시각적인 감각에 많이 의지하는 인간은 웅장한 자연 풍광에 많은 관심을 둔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높이까지 뻗어있는 나무, 온 산을 뒤덮은 화려한 색의 향연, 여유롭게 이어져 흐르는 능선의 우아함 등 산에서 인간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는 자연 풍광은 너무나 많이 있다. 하지만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은 숲을 걸었던 '발자국'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말한다. 별생각 없이 내디뎠던 발자국 아래에는 수많은 씨앗이 있었다.
그리고 씨앗은 곧 생명을 의미한다.
내가 무심코 내디뎠던 발자국 하나하나에 수많은 생명이 있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영원처럼 뻗어있는 나무들을 올려다보느라 정작 소중한 생명의 원천을 밟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다. 발자국과 땅과 그 안에 씨앗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소중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주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원대한 목표를 이룬다는 명분으로 누군가를 밟고 서 있는 모습, 왠지 낯설지 않다.
서울의 한 지역에서 특수학교가 들어오면 집값이 내려간다거나 지역 이미지가 하락한다며 반대하는 주민들의 행태를 뉴스에서 본 기억난다. 특수학교 설립 반대 이유로 내세운 근거는 결국 경제적 손실이었다. 하지만 그 지역의 경제성장 배경에는 사회적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대중교통, 도로, 상권, 공공시설 등의 제반 환경은 사회 구성원들의 세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투자가 없었다면 아마 그 지역 일대의 부동산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을 것이다. 공청회에서 무릎을 꿇고 특수학교 설립을 호소하는 장애인 부모들의 모습은 안타깝기도 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부의 축적이라는 개인적인 욕망은 소중한 공동체의 연대마저 짓밟았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이 타인의 생명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본다면 그렇게 우악스러운 반대는 못 했을 것이다.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법적 제재가 따르지 않는 것이라면 개인의 욕망은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울창한 숲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땅과 그 속에 수많은 씨앗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개인의 성공에는 공동체의 희생과 사회적 투자가 기반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발아래를 유심히 관찰하는 용기는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기도 한다. 높고 화려한 것만이 선한 것은 아니다. 어둡고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소중한 것을 항상 기억하자. 숲을 산책할 때 초록색 나뭇잎과 상쾌한 바람 그리고 끝 모를 울창함을 즐기는 것에 앞서, 내가 내디딘 발자국 아래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존재를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