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의 어원은 '시도'
“글 쓸 게 없어요.”
최근 글친구들 모임에서 근황을 주고받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나의 고민이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한동안은 같은 이야기-아이와의 생활,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 등-안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글에 새로운 길을 내보고 싶지만 주제가 바뀌어도 글을 풀어가는 방식이나 소재는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도 무탈한 일상에 만족하는 식의 결론이랄까. 나와 아이, 기껏해야 남편, 동네 친한 엄마들 정도가 등장하는 글이 손바닥 보듯 뻔하게 느껴졌다.
같은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매일 2~3장씩 쓰던 일기마저 띄엄띄엄 쓰고 있으니. 다른 소재와 주제를 찾겠다고 핑계를 대는 사이 매일 글을 쓰던 근육이 느슨해졌다. 그렇게 한 두 달을 보내고 나자 쉽게 썼던 일상의 기록조차 시작이 어색하다.
에세이란 무얼까.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사건을 통해 사유를 풀어내는 글, 저자 개인의 특성이 묻어나는 일상이 세밀하게 담긴 글. 누구와도 같지 않은 그만의 생각을 표현하려 시도할 때 매력이 생기는 글 아닐까. 그러므로 마땅히 ‘일상’이 담길 수밖에 없는 글. 매일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풀어내어 보려는 시도가 ‘에세이’의 시작이다.
에세이의 손쉬운 소재는 ‘개인의 일상’이다. 엇비슷한 매일을 살더라도 어제와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고 어떤 지점을 지속적으로 응시하면 뜻밖의 생각이 다가오기도 한다. 한 지점을 오래 응시하는 법, 낯선 생각에 다가가기 위해 골몰하는 수단이 내겐 글쓰기다. 우선 쓰기를 시작해야 어딘가로 한 발을 디뎌볼 수 있다.
지난 글쓰기 모임의 주제는 ‘좋아하는 색’이었다. 한때 ‘파란색’에 열광했던 나는 파란색 덕후로서의 마음을 찬란하게 펼쳐보고 싶었다. 밤하늘의 별부터 파란색의 새와 돌고래, 그리고 수영장, 좋아했던 청색의 이미지가 가득한 영화, 파란색을 주조로 사용했던 화가와 그림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언젠가 한 번쯤 썼던 소재들이었다. 수영을 좋아해 일찌감치 수영과 수영장에 대해 썼고, 최근엔 하늘과 밤하늘에 대해서도 썼지. 청색이 가득한 영화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리뷰를 남겨 두었고, 파란색을 주조로 사용했던 화가와 그림 또한 블로그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니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써 보고 싶었다. 내게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파란색을 왜 좋아했지? 지금도 그때만큼 좋아하나? 파란색만 좋아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쫓다 보니 파란색은 등장하지만 계획과 전혀 다른 글이 탄생했다. 글을 쓰는 동안 예전만큼 파란색에 열광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파란색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흰색과 베이지색을 좋아했다는 것, 최근엔 연두색과 올리브색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진실도 발견하면서.
파란색에서 시작했지만 무지개색으로 끝난 글이 조금 낯설었다. 나의 취향을 A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는 걸 고백하는 글은 결말도 불분명해 보였다. 파란색을 좋아하지만 그것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는 애매한 상태. 나란 사람이 이렇게 불명확한가 싶어 스스로도 물음표를 안고 맺은 글. 찜찜한 기분이 들면서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런 것도 나지, 하면서 자신의 변화를 담담히 인정할 수 있다는 게 반가웠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타고난 성향과 기질, 오랜 습관, 거기에 기인한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일상의 자잘한 선택은 미세하게 바뀐다. 라테를 즐겨 마시던 사람이 언젠가부터 아메리카노만 마신다던지, 맥주를 좋아하던 사람이 와인이나 위스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던지. 긴 머리를 고수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어깨 이상 머리를 기르지 않게 되었다던지.
사소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변해서 알아채지 못했을 뿐 자잘한 선택의 변화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 매일의 일상을 지겹도록 쓰더라도 시간이라는 양념이 더해지면 모르는 사이 달라지는 것이 담기고 무언가가 발생하겠지. 쓰는 사이 변화의 타이밍을 알아채고 변모한 형태를 선명하게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 안다고 생각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무심한 영역이야 말로 개개인의 차이와 개성을 찾아낼 수 있는 최적의 발굴지가 아닐까.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끝없이 글쓰기의 소재가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쓸 게 없다고 생각하면 전혀 쓸 게 없지만 쓰다 보면 한없이 무언가가 건져지는 곳, 일상만한 보물섬은 없다.
“기사나 논문이나 강의에서 에세이에 대해 설명할 때는 항상 이 단어의 어원을 알려준다. 에세이는 ‘시도’라고. 그래서 완벽함을 자처하지도 않고 철저한 논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고.
(…)
에세이는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시험하는 글이 아니라 대상을 측정하는 글이다. 글 자체의 힘, 글을 쓰는 저자의 힘을 재는 글이 아니라 자기밖에 있는 어떤 것을 재는 글이다. 에세이쓰기는(essaying) 가늠하기(assaying)이다.”
브라이언 딜런, <에세이즘>, 카라칼
글 쓸 게 없다고 느꼈던 이유는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세이의 어원이 ‘시도’인 것처럼 쓰지 않으면 제대로 바라볼 수 없고 무엇도 찾을 수 없다. 에세이란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나 같은 초보 작가에게는) 글을 쓰려 시도하는 것에 에세이의 방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시도하면서 불명확한 것을 가늠해 보려는 노력, 그것이 에세이의 전부 인지도 모르겠다고.
쓰지 않는 사이 쓸 게 없다고 느꼈는데 글감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글 쓸 시간을 내지 못한 게 문제였다. 에세이라는 말에는 글쓰기를 시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 머리로만 고민하지 말고 몸을 움직이자. 연필을 쥐고 노트를 펼치던지, 모니터를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던지. 다시 생활을 정비하고 시간을 떼어 두면서 새로운 싹을 틔울 씨앗을 성실히 심어야지.
바람결에 가을 내음이 묻어난다. 가만히 앉아 글 쓰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