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발견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자랑했다. 오카리나를 잘 분다고 담임 선생님께 도장을 네 개나 받았단다. 어제도 아이는 친구와 놀이처럼 오카리나를 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며 칭찬을 받는 아이의 모습에 눈물이 솟을 만큼 기뻤는데. 그건 아이가 뛰어나다는 것에 대한 기쁨일까, 이토록 작고 우습고 귀여운 아이가 내 품 밖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자란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한 감격일까. 어떤 경이와 신비가 내 안에서 일렁이다 눈물을 낳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이는 어디선가 자라 돌아온다는 경이, 그저 자신으로 환하게 빛난다는 신비였다.
아이는 음악을 좋아한다. 수시로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와 오카리나를 연주한다. 좋아하는 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 하는 일. (그렇게 치면 놀이터에서 노는 걸 최고로 좋아하고.)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면 피아노를 치거나 오카리나를 꺼내 연주한다. 집중하고 정성을 쏟아 긴 시간 연습하는 건 아니지만.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챙긴다. 작은 반복이 아이 몸에 쌓이고 있을 것이다. 꾸준함은, 반복은 의외로 힘이 세니까.
긴 시간 정자세로 연습하기 위해 큰 마음을 힘들여 먹는 일보다, ‘어디 한 번 해볼까’하는 느슨한 마음을 자연스레 떠올리는 게 더 좋다. 그저 즐거움을 좇아 가볍게 나를 움직이는 것, 그게 모여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는 게 나다워지는 방법일 것이다. ‘~할 결심’, ‘~할 다짐’을 어렵게 내는 일보다 작고 사소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고 모으는 게 인생에선 더 믿을 만하다.
아이가 자잘하게 오카리나를 불고,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학교에서 배워온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를 때면, 내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그 소리에 묻어나는 즐거움이 내게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아이 곁에서 나도 자주 소리 높여 노래한다. 음악이란 우리 안에 살고 있고 언제든 노래로 흘러나올 수 있다고, 노래하는 마음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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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에도 아이는 내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 앞 이팝 꽃이 만발한 길에서 걸음을 멈추었을 때. 산들바람에 부드럽게 몸을 흔드는 나무를 바라보다 동영상을 찍는 순간에도 아이는 노래했다. 사방에 꽃향기 가득하고 먼 하늘은 연한 분홍빛으로 수줍게 물들어 갔다. 고개를 들어 이팝나무를 보고 먼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4월이 무얼 했는지 잠잠이 헤아렸다.
올봄에는 유난히 이팝이 눈에 들어온다. 5월에나 피어야 할 꽃이 이르게 피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 편에 걱정이 자리하지만 그런데도 당장 하얗게 부풀어 오른 나무에 사로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 푸른 잎이 돋기 전에 꽃으로만 뒤덮이는 벚나무와 목련과 달리, 이팝은 연둣빛 잎사귀와 흰 꽃이 뒤섞여 무엇이 꽃인지 잎사귀인지 구분을 흐리며 싱그러움을 발산한다. 꽃이 잎이 되고 잎이 꽃이 되는 뒤섞임, 그것이 풍요다. 뒤엉켜서도 알알이 꽃이고 알알이 잎인 제 모습엔 변함이 없다. 예정대로라면 입하에 피어야 하는 이 꽃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임에 분명하다.
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 속명 치오난투스는 '흰 눈'이라는 뜻의 '치온(Chion)'과 '꽃'이라는 뜻의 '안토스(Anthos)'의 합성어로, 이 나무의 이름은 '하얀 눈꽃'이다. 여름에 내리는 눈이라 그랬다. 대낮에도 그렇지만 어둠 안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비로운 분위기에 홀려버릴 듯했으니. 어떤 간절한 마음은 여름에도 눈이 내리게 하지. 어떤 투명한 마음은 여름에도 눈을 볼 수 있지. 봄이라는 계절에 앞서 당도한 여름을 알리는 나무 앞에서 내 마음은 겨울까지 달려간다. 나무 위에 하얗게 쌓인 눈을 찰나에 본다. 하나의 나무에서 사계절을 보느라 나무의 형상처럼 우리의 마음도 부풀어 오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늦은 봄 이팝나무 꽃송이가 온 나무를 덮을 정도로 피었을 때 멀리서 이를 바라보면 꽃송이가 밥그릇에 소복이 얹힌 흰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밥이 이팝으로 변해 이팝이 되었다고. 이밥이라니, 밥이라는 말에 담긴 따스하고 푸근한 인상이 금세 나무에게로 옮겨간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담뿍 담긴 밥 한 공기가 떠올라 입안에 단침이 고인다. 나무 하나가 분주히 지어낸 꽃밥처럼 따뜻한 밥 한 공기씩 챙겨 먹으며 부지런히 한 해를 살면 삶이라는 밥그릇에 무엇이 담길까. 이밥나무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과 자기 향상이다.
이팝나무의 이름에 얽힌 유래에는 또 다른 설이 있다. 이 꽃이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入夏)에 피기 때문에 입하목(入夏木)이라 불리다가 입하가 연음 되어 '이파', '이팝'으로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일부 지방에서는 이팝나무를 '입하목' 또는 '이암나무'라고 부른다고 하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팝나무가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 알려져, 흰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꽃이 많이 피지 않는 해는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단다. 올해는 아무래도 풍년인가 보다. 여기저기에 이팝나무가 보름달처럼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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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이면 만발했을 나무인데도 처음인 듯 나를 멈춰 세운다.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의미.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테다. 나무들이 작년에 일제히 심어진 것도 아닐 테니까. 올해 나의 여건과 상황, 태도와 시선이 이팝의 무엇과 은근히 연결된 게 아닐까. 해마다 유독 마음이 기우는 꽃들이 바뀌었으니 꽃을 만나는 것도 시기와 때가 있나 보다. 어떤 사람을 새로이 만나거나 알고 있던 이더라도 어느 시기에 상대가 달리 보이면서 관계의 양상이 변하는 것처럼. 올 4월에는 이팝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 덕에 나는 3월부터 4월까지 촘촘하게 꽃구경을 즐길 수 있었다. 곳곳에서 말없이 피고 지며 세상을 꾸미는 존재들이 있다는 걸 벅차게 발견하면서. 비단 꽃뿐일까. 사람이 가장 예쁜 꽃이라는 엄마 말처럼, 곳곳에서 자기 몫을 하며 주변을 물들이는 사람들이 있겠지. 가까운 곁에 그런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멀게는 내가 애정하는 작가들, 어디선가 꾸준히 향기로운 글을 피어 올려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솟아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으로 활짝 열려 다채로운 감정과 생각으로 주변을 물들이는 당신이 바로 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꽃이다.
그러니 이팝나무에게 눈 맞추며 잘한다, 예쁘다, 고맙다, 기쁘다 말하는 당신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가 필요할 것이다. 내게 눈을 맞추며 고요히 미소 지어 주는 이, 내가 하는 일이라면 그저 옳다며 믿고 지지해 주는 이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사이 내게 이팝나무 같은 사람이 머릿속에서 활짝 피어났다. 그랬구나, 그이가 있어서 나도 나라는 꽃을 조심스레 열어 보고 있으려나, 생각하다 연락이 하고 싶고, 이런 말을 전하고 싶어 진다. 당신이 있으니 잘 피어보겠습니다, 당신 덕분에 이렇게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이팝나무 같은 꽃이 있으려나요.
당신이라는 꽃에게 피어나라고 응원해 주는 이 곁에 있을까요.
제가 그럴게요. 어디선가 우연히 당신을 본다면, 저는 한눈에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군요, 꾸준히 당신으로 피어나려 애쓰는, 바로 당신이군요.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자잘한 이팝 꽃송이처럼 당신을 뒤덮어 풍성할 테니까요. 잘하고 있어요, 애썼어요, 예뻐요, 하며 웃어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