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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서 평온을 구해요

사과 파이 반죽을 밀다가

by 춤추는바람




적을수록 풍부하다. 잎을 떨군 나무는 가지만 남은 채로 하늘이라는 도화지 위로 그림을 그린다. 단색의 선밖에 없는데도 그림은 밋밋하거나 초라하지 않다. 잎을 지웠기에 가느다란 가지들이 모세혈관처럼 뻗어나가는 형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버릴수록 풍부해지는 원리를 발견한다. 겨울의 풍경은 빈 것들로 빽빽하다.


주말 사이 딸아이가 독감에 걸렸다. 아이의 컨디션에 따라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을 며칠의 일과에 대해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쓰고 지우다 그만두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여러 번 겪으면서 그런 계획이 별반 소용없음을 알게 되어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내게 밀려오는 파도를 맞을 수밖에 없다. 파도를 피하려 도망치거나 파도를 이기려 무리해 힘을 주는 것보다 힘을 빼고 물살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 그러다 보면 파도에 실려 가뿐하게 해변에 닿을 것이다.


내려놓을 수 있는 일은 내려놓고 아이의 건강을 챙기는 데 전념한다. 아이의 건강보다 중요한 일은 없고, 아이가 건강해야 다른 일에도 의미가 생긴다. 아이가 아프다는 걸 신호로 받아들인다. 무리하고 있었던 걸까,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아이가 아픈 건 아닐까. 삶의 속도를 돌아본다. 이참에 잠시 쉬면서 일상의 속도를 늦추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를 비우고 내려놓는다. 복잡하던 머리가 정돈되면 걱정스럽던 내일에도 조금쯤 의연해진다.


나만의 삶의 레시피, 마음이 어지러울 때엔 작은 일에 몰두하기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애쓰고 있을 아이가 안쓰러워 뭘 좀 해줄까 물었다. 아이는 사과파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얇게 썬 사과를 냄비에 가득 담고 버터와 설탕을 넣어 졸였다. 시나몬 가루를 듬뿍 넣었더니 금세 집안 곳곳으로 달큼한 향이 번져나갔다. 시나몬의 산뜻한 향이 집안의 분위기를 경쾌하게 바꾸었다. 곁으로 다가온 아이가 자기도 하고 싶다길래 사과를 뒤섞으라고 주걱을 건네주었다.


그사이 나는 밀가루에 설탕과 소금 약간, 물과 차가운 버터를 넣어 파이지를 반죽했다. 사과를 졸이는 동안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차게 굳혔다. 사과가 졸여지자 아이는 주걱을 내려놓고 방으로 사라졌다.


차가워진 밀가루 반죽을 꺼내 식탁 위에서 밀대로 밀어 폈다. 파삭하게 바스러지는 파이지를 만들기 위해 반죽을 밀어 편 후 세 겹으로 포개어 접었다. 그렇게 밀어 펴고 접기를 반복하면 파이지에 결이 생긴다. 균일하게 펼쳐지도록 상체와 두 팔에 힘을 실었다. 납작하게 밀어진 반죽을 가지런히 접었다. 바깥의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수록 뜻대로 다스릴 수 있는 작은 일을 손에 쥔다. 어수선한 시간에도 사소한 일에 마음을 기울여 평온을 찾는 게 생활의 기술이니까. 나만의 삶의 레시피엔 마음의 평온을 위한 목록도 마련되어 있다.


반죽을 밀다 불현듯 집안에 고요라는 손님이 찾아왔다고 느꼈다. 방문을 열어보니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든 아이가 보였다. 반죽을 반듯하게 정돈하는 사이 내게 찾아온 평온이 아이에게도 건너간 걸까. 단잠에서 깨면 갓 구워진 파이가 기다리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 팔에 힘을 주어 반죽을 크게 펼쳤다. 팬 위에 반죽을 올리고 사과 조림을 더한 뒤 그 위를 다시 반죽으로 덮었다. 칼등으로 윗면에 무늬를 그리고 달걀물을 바른 뒤 예열해 놓은 오븐에 넣었다.


타이머를 맞춘 뒤 나도 아이 곁에 누웠다. 이불 속은 따스했고 아이의 숨소리는 평온했다.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고 아이의 손을 잡았다. 생명의 온기를 품어 따듯하고 몰랑한 손. 그것이 건네는 한없는 위안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살아갈수록 이런 순간이 점점 더 귀해진다. 아이 곁에 누워 체온과 살결을 느끼며 삶의 무탈함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가 나란히 누워 숨을 나눠 쉬듯 삶을 공유한다는 게 소중하고 감사하다. 내 곁의 평범한 것들에 크게 안도할수록 내가 나약해진 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요즘은 나약함을 느끼고 인정하는 내가 좋다. 나약해서 연약한 것에 시선이 닿고 거기서 그만의 빛을 헤아리려는 내가 다행스럽다. 그럴수록 사소함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더 값나가는 걸 가지려 안달하거나 먼 곳만 바라보느라 발밑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적을수록 풍부하다는 걸 배워 간다.


고르고 고른 것들로 추려질 삶



사과파이가 먹고 싶다는 아이에게 “뭐 다른 건 없어?”라고 한 번 더 물었다. 사과파이는 지난가을에도 먹었으니 새롭고 특별한 걸 해주고픈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사과파이가 가장 먹고 싶다고 답했다. 나는 사과파이를 좋아하지만 친근해서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나약해졌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음식은 익숙해서 편안한 것, 특별하지 않아 친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새롭고 많은 레시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레시피가 아니라 언제든 즉효가 있는 몇 개의 레시피면 족하지 않을까. 다정이란 그런 데 깃드니까. 시간과 관계가 켜켜이 쌓인 대상, 반복되는 사이 그리움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삶에서도 만남이 반복되고 계속 이어진 일과 사람, 습관과 취미, 형식과 태도가 의미를 형성한다. 많은 것보다 적은 것, 특별한 것보다 내게 평범하고 익숙한 것일 테다. 그러니 삶에서도 나의 레시피(생활 방식)는 줄여가고 싶다. 고르고 고른 것들만 남기고 싶다. 적을수록 풍부해지는 삶을 향하고 싶다. 대신 내게 남은 것을 더 섬세하게 보고 듣고 배우며 날마다 새로워지고 싶다.


주말을 지난 월요일, 열이 내려 등교하는 아이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이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 오솔길에서 까치 한 마리를 보았다. 자기 키만 한 나뭇가지를 입에 무느라 공을 들이고 있었다. 작은 부리에 잘 고정되지 않는 가지를 더듬어 간신히 균형 잡아 물더니 계단 하나를 내려섰다. 뒤이어 날개를 퍼덕여 옆에 있는 담장 위까지 날아올랐다. 담장 위에 앉아 잠시 자세를 가다듬더니 다시 날갯짓해 허공을 가르는 전선 위에 닿았다. 까치는 거기서 또 한 차례 휴식한 뒤 높이 날아올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젖히자 하나의 나무 꼭대기로 나뭇가지를 모아 풍성하게 지은 둥지가 보였다. 까치도 온 몸을 움직여 새끼를 보살피고 있는 중일까.


숨을 고르며 단계별로 날아오르기는 나뭇가지를 옮기기 위한 까치만의 방식. 평생에 걸쳐 익힌 삶의 레시피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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