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롱에 담은 순간
딸아이의 생일이라 케이크를 만들었던 어느 해, 아이는 생일이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다며 아쉬워했다. 아이 말에 매달 하루를 생일로 정해 베이킹을 하기로 약속했다. 케이크든 타르트든, 쿠키든, 무언가를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네가 세상에 존재함을 축하하자고. 그 뒤로 우리는 매달 한 번씩 베이킹을 했고 그날은 아이의 생일이 되었다.
생일 하루만 특별한 게 아니라 평범한 날도 소중하다는 걸 아이가 알게 되길 바랐다. 이벤트가 있고 축하받는 날만 중요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아닌 날을 기쁘게 살기를, 특별한 날을 기다리느라 평범한 날을 지루해하지 말고 지금을 잘 살아 오늘을 특별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지금이 한 번 뿐이라는 걸 기억하면 모든 순간이 특별해진다. 한 번뿐인 순간들이 모여 무언가가 된다.
흘러가 버릴 시간을 모아 아이와 베이킹을 하는 사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특별해졌다. 과자라는 결과물이 아니더라도 함께 하느라 호흡을 맞추고 그러다 웃음이 터지거나 무언가를 발견해 냈으니. 나는 전보다 아이의 실수에 너그러워졌고 아이는 매번 지난번보다 용감해졌다. 내가 하는 일이 줄면서 아이의 역할이 늘었다. 관계의 기울기도 변했다. 내게 전적으로 의존하던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내고 스스로 시도한다. 아이가 주도하고 내가 보조하는 쪽으로 기운다.
계속하는 사이 베이킹은 나와 아이만의 의식이 되었다. 때가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뭐 좀 만들어 볼까?” 서로 눈을 맞춘다. 앞으로도 이런 리듬이 반복될 것을 예감한다. 그러다 보면 사춘기가 찾아와 아이가 방문을 닫아걸더라도 “베이킹할래?” 한 마디에는 부엌으로 나올 것 같다.
무언가를 만들며 손발을 맞추다 보면 뚜렷한 대화 없이도 날 선 아이의 감정을 쓰다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관계가 어긋나더라도 영영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가 성인이 된 어느 날에도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 번, 부엌에 나란히 서서 베이킹을 할까.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상상하는 미래에 닿고 싶다.
이래 저래 분주했던 주말, 마카롱이 만들고 싶다는 아이 말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주방 수납장을 열었다. 밀가루, 설탕, 슈거파우더, 아몬드파우더, 그리고 달걀을 꺼냈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미루지 않는 게 순간을 사는 법이니까. 내 안에서 마음이 동할 때 그 리듬을 따라 몸을 움직여 보는 게 삶을 즐기고 사랑을 행하는 방법이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으니 아이는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꼬끄를 만들겠다고 했다. 내가 달걀흰자를 휘핑하는 사이 아이는 아몬드파우더와 슈거파우더를 체로 쳐 곱게 만들었다. 휘핑한 흰자(머랭)에 가루 재료와 색소를 넣어 섞고 색이 난 반죽을 짤 주머니에 담아 팬에 짜는 일도 아이 몫이었다.
꼬끄는 속이 꽉 찬 상태로 예쁘게 구워졌다. 아이의 바람대로 초콜릿 가나슈로 꼬끄 사이를 채웠다. 완성된 마카롱은 냉동실에 넣어 두고 하루에 하나씩 꺼내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오늘의 베이킹 덕분에 기다림이 설렘으로 바뀌었다. 변화가 귀찮고 안정을 추구하고 싶은 내 삶을 아이라는 바퀴가 꾸준히 덜거덕 거리게 한다. 때로는 세게 엉덩방아를 찧고 얼얼하기도 하지만 재미와 설렘으로 활기를 얻는 날이 많다. 변화라는 두려움을 두근거림으로 바꾸어 간다.
아무것도 아닌 두 시간을 마카롱에 담았다. 나와 너라는 두 개의 꼬끄 사이에 순간이라는 가나슈를 채웠다. 지금은 고작 마카롱이지만, 작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언젠가엔 모든 것이 되겠지.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되겠지. 아이와 조금이라도 다정한 시간을 보내려 나를 기울였던 흔적이 지금을 어떤 미래로 연결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쓸모없는 것들 그런 것들에 더 마음이 갔고
종이 위에 올리며, 그 쓸모없는 것들이 조금씩 특별해 보이길 바랐습니다”
김민지 작가(꼬메아미꼬 갤러리의 기획전시 <무엇을 그릴 것인가>)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쓸모없는 것들,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들을 그렸다. 짧아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몽당연필, 뚜껑을 잃어버린 찻주전자, 길에서 주운 마른 열매나 나뭇가지를 손바닥 만한 작은 종이와 무명천에 그려 '아무것도 아닌 드로잉'이라 이름 붙였다. 종이 위로 옮기자 의미 없던 대상이 ‘모든 것’이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림(들)은 김민지라는 한 사람을 둘러싼 세계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엿보게 해 준다. 더불어 그가 성실하게 살아낸 매일을 은유한다. 눈앞의 작은 대상에 시선을 건네 그림으로 베껴 낸 시간의 궤적이 그림에 담겼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란 그가 살아낸 삶의 궤적일 것이다. 우리를 말할 수 있는 건 우리에게 찍힌 일상의 흔적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그림 위로 그의 일상이 겹쳤다. 그것들 모여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그려냈다.
내겐 글쓰기가 그런 일을 한다. 일상의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모아 종이로 옮겨 적는 일. 그것들을 모아 '이게 내 삶이야'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의 어떤 순간을 붙잡아 그걸 기념하듯 기록한다. 때로는 그 일이 무용하게 느껴져 기운이 빠지는데 김민지 작가의 그림이 내게 위로와 격려를 건넸다.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 잔잔히 빛난다고. 반복에 형식을 부여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된다고. 그러니 당신도,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매달려 의기소침해 있다면, 꾸준한 반복이 언젠가 힘을 갖게 된다는 걸 믿어보면 좋겠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전시에는 친한 친구와 동행했다. 전시를 둘러보고 근처 카페에서 향신료향이 감도는 밀크티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들 뒷바라지로 자신의 삶에 온전히 몰두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토로하다가도 이야기는 이어져 덕분에 마주치는 뜻밖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닿았다. 아이들 곁이라 끊임없이 배우며 발견하는 삶의 고요한 민낯에 대해, 우연히 찾아오는 기쁜 장면에 대해, 아이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 안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돌아보며 여전히 성장통을 앓는 우리 자신에 대해.
나를 잃은 것 같고 멈춘 듯했던 시간에도 더디게나마 걸음을 계속했다는 걸 지금은 알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덧 우리를 둘러싼 풍경이 달라져 있다. 어린아이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절이 서서히 멀어진다. 어떤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까. 더 많은 삶, 알 수 없는 삶이 우리 앞에 있다.
멈춘 듯 보였던 시간이 얼마나 열심히 움직였는지 뒤늦게 헤아린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이어지고 펼쳐진다. 그러니 지금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나를 움직인다. 쓸모없지만 내겐 특별한,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순간을 모은다. 모든 것이 될 씨앗을 돌본다.
* <가게를 닫고 쓰는 인생 레시피>는 격주 연재됩니다.
다음 글은 12월 16일에 발행됩니다.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과 작가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