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를 굽고 글을 씁니다
베이킹 스튜디오를 오픈하고 수업을 하다 보면 종종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었냐고.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사장님 덕분이에요, 눈칫밥 준 사장님 덕분이지요.”
그랬다. 십 년 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한 건 내 자리를 못마땅해하는 사장님 때문이었다. 그때는 회사 가기가 너무 싫고 사장님과 마주칠까 무서웠는데, 그랬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원망했던 사장님에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 아니었다면 지금도 회사를 다니며 작은 가게에 대한 미련을 품고 있었을 테니까. 더 이상 사장님 때문에 전전긍긍할 일은 없다. 스스로 책임지고 선택하는 매일매일이 있을 뿐. 속상해 울던 날을 웃으며 말할 수 있다.
+
누군가에게 미움받기 싫어 두리뭉실하게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여럿이 있을 때는 다수의 의견을 따르면서. 외국계 제약회사의 지원 부서라는 업무 특성상 그런 태도가 더 필요했다. 내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영업부나 마케팅부의 의견을 듣고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는 게 중요했으니. 경청과 배려가 나의 장점이라고 여겼다.
당시 업계에는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회사들은 돈 되는 제품만 추려 몸집을 줄였고 많은 업무가 인터넷 채널로 이동하면서 인력을 감축했다. 그 물결을 타고 다니던 회사도 두 개로 분리가 되었다. 신제품과 관련 파이프 라인을 들고 떨어져 나간 회사는 새 이름을 달고 오래된 제품만 떠안은 회사는 원래 이름으로 남았다. 나는 원래의 회사에 남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사장이 바뀌었다.
한 번은 회의실에서 영업사원 교육을 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이라 음악을 틀어 두었는데 지나가던 사장님이 발길을 멈춰 노래 제목을 물었다. 노래가 좋다며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이 공식 부임하기 전 회사를 찾은 첫날이었다. 전 직원 미팅을 위해 강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장님과 두 번째로 마주쳤다. 앞에 계시던 사장님이 “신발이 예쁘다”며 먼저 말을 건넸다. 예전 사장님에 비해 나이도 젊은 편이었고 자유롭고 개방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시장 상황은 빠르게 변했고 회사 재정은 위축되었다. 투자와 판매를 늘려 수익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판매 수익을 유지하면서 지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경영은 바뀌었다. 그 사이 나의 업무가 변경되었고 성과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었다. 시장과 제품의 상황, 회사의 운영 방침이 내 포지션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렀다.
+
회사 생활은 성실한 노력만으로 성과를 내기 어려워졌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사내 정치에 무심할 수 없었다. 밤을 새워 보고서를 만들어도 상사의 속내를 놓치고 있다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주어진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 하는 것보다 윗사람 눈치를 살피고 입맛을 맞추는 게 더 중요할 때가 많았다. 그런 일이 내겐 어려웠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맞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이 늘어갔다. 하기 싫은 마음과 해야 하는 의무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베이킹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머리로 답이 안 나오는 고민을 하는 대신 눈앞에 있는 재료로 손과 몸을 움직이면 되는 일. 과정의 노력이 결과로 고스란히 나타났다. 정성을 들인 만큼 성과가 보였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움직이면 그만큼의 즐거움이 생겼다. 그렇게 만든 디저트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모두가 반겼다. 작은 과자로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도 베이킹의 즐거움이었다. 베이킹의 매력에 이끌려 회사 일에 피곤한 밤에도 오븐을 돌렸다. 빵이 익어가는 사이 오븐에서 새어 나오는 달콤한 냄새가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밤이 쌓일수록 빵과 케이크에 담기는 다정한 온기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랐다.
+
퇴근과 동시에 베이킹과 작은 가게에 대한 꿈을 키웠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 채 몇 년이 흘렀다. 그러기엔 월급의 유혹이 달콤했고 긴 시간 공들여 쌓은 관계와 업무 능력이 아까웠다. 잘 다져둔 길을 벗어나 미지의 길로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랬는데 평탄할 줄 알았던 길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나타나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것도 쉽지 않다면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자고 용기가 솟았다. 생각을 바꾸자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이 해볼 만하게 느껴졌다. 지금이 꿈을 실현할 절호의 찬스라고.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때로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우연히 찾아온다.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이 가능해지는 기적 같은 순간이. 시작이 거창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소소한 이유와 우연한 선택이어도 괜찮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한다는 건 그 자체로 두려운 일이기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시작했다는 자체로 충분히 멋지다.
퇴직금을 쏟아부어 서울에 분교가 있는 프랑스 제과 학교를 등록했다. 학교 생활은 사라진 열정에 불을 지폈고 배움의 즐거움을 다시 체험하게 해 주었다. 매일이 설레었다. 인생의 스승을 만났고 오래 함께할 친구들을 얻었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렸지만,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베이킹 클래스를 시작했다.
인생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무지개가 떠 있다. 인생의 궂은 날씨도 지나가기 마련. 지금 서 있는 곳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더라도, 피할 길 없이 장대비를 맞고 있더라도, 다 끝났다고 절망하지 말기를. 먹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추면 거짓말처럼 무지개도 뜰 것이다. 결국에는 다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