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너무 바쁘다. 20년 가까이 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일을 하고 있고, 동시에 아이 셋(나포함 넷?)을 키우고 있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부지런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팀 스포츠를 보면 보통 너무 어리지 않은 에이스가 주장을 맡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집의 주장은 (채치수가 아니라) 단연코 아내다. 강아지도 집안의 서열쯤은 아는데, 애들은 오죽하겠는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마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혼 전 나는 왜 몰랐을까?)
육아와 관련해서 자연스럽게 나는 Good Cop, 아내는 Bad Cop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리 집의 의사소통 구조를 보면 상황은 좀 더 명확해진다. 우리 애들은 보통 목적이 분명할 때 친한 척을 한다. 내 생각에 애들 머릿속에 있는 아빠 사용법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내 전결(?) 범위에 있는 물건(과자, 지하철 샌드위치 등)을 잘 구슬려 얻어내거나, 엄마에게 결재권이 있는 물건(사과폰, 뼈발리송 등)을 조심스럽게 요구할 때 지원군으로 쓰거나. 나도 직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라 딱히 애들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대놓고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 때는 좀 씁쓸하다.
말단부터 올라온 서류를 결재할 때, 우리 집 주장은 절대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저 나에게 ‘제대로 검토한 거 맞아?’라는 눈빛을 한 번 쏘아 보내고, 단호히 반려한다. (feat. 포청천 개작두) 그럴 때마다 나는 애들 방으로 끌려가 푸념을 들어주는 윌슨으로 변신한다. 배를 좀 내밀고(?)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독재자에 대한 울분을 들어주기만 해도 애들의 불만은 많이 가라앉는다. (T형 아빠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니니?) 생각해 보면 누가 악역을 좋아하겠는가? 아내는 적성(?)에 맞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고, 그 덕분에 아이들이 바르게 크고 있어서 다행이다.
일, 육아, 새벽 반주 봉사까지 척척 해내는 아내에게 뭔가를 더 바란다는 건 굉장히 염치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내가 스스로 바꿔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딱 하나 있다. 바로 ‘채소 소비 패턴’이다. 맞벌이인 데다가 멀리까지 통근하다 보니, 주중의 아내는 애들이 원할 때 뭔가를 바로바로 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냉장고에는 볶음밥부터 망고 빙수까지 각종 편의식이 가득하다. 평소 애들은 편의식을 좋아하고 큰 불만이 없어 보이지만, 아내는 주말만큼은 손수 만든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내가 손수 만드는 음식에는 반드시 채소가 들어간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기 위해 삼겹살집을 가도 아내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우리는 고기에 최소한의 양념만 발라서 쉴 새 없이 입에 집어넣지만, 아내는 각종 채소와 함께 느긋하게 쌈을 즐긴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와 같은 상황 절대 아님) 성장기 어린이에게 균형 잡힌 식사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에게 채소를 먹이려는 아내의 생각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야 할 아내가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요즘 아내의 채소 소비 패턴은 다음과 같다. '금요일 저녁쯤 채소를 구매한다 → 토요일 아침에 도착한 채소를 냉장고 또는 어딘가에 놓는다 → 그다음 주가 지나간다 → 그 다음다음 주가 지나간다 → 채소를 확인한다 → 나한테 버리라고 한다' 채소마다 편차는 있지만, 구입부터 처분까지의 사이클은 약 2-3 주 정도가 소요되는 것 같다. 보통 채소는 시들면 여러 가지 부작용(?)을 동반하기 때문에 버리는 쪽에서 보면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냉장고를 열 때마다 포장재가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르는 '문문 채소 믹스 500g'은 공포 그 자체다. 혹자는 겨우 채소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납작했던 채소 믹스가 발효되어 신선칸을 꽉 채울 만큼 부푼 장면을 상상해 보라. 과장 조금 보태서 며칠만 더 지나면 냉장고가 공중부양하는 기적(Zion?)을 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채소 믹스가 살짝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일 때 아내에게 보고하면, 아내는 되려 곧 먹을 거라며 발끈한다. (집안의 주장은 자기라는 듯이)
하지만 아내는 알고 있을까? '우리가 문문 채소 믹스를 단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괴담을. 그리고 수차례 구입한 문문 채소 믹스는 결국 시들어서 본인이 먹거나, 상해서 내가 버렸다는 사실을. (막판에 왜 자꾸 나한테 먹으라고 하는데!?)
아내가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바빠서 못 보더라도 누군가 아내에게 꼭 좀 전해 주면 좋겠다. (실사 첨부) 우리는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편의식을 개발한 대기업을 믿는다고. 그리고 우리는 가뜩이나 바쁜 주장이 요리 등으로 고생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누군가 괴롭히지 말고) 편하게 앉아 쉬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베란다 구석에 놓인 ‘한때 대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파리 사육키트는 직접 처분하길 바란다. (주장! 오늘 마침 금요일이네. 채소를 꼭 사야 한다면 조금만 사면 안 될까? 혹시 놓치더라도 당신 미사일 배송 멤버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