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
방황의 시기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간섭이 싫어 돌아돌아 결국 선택한 종착지는 조직과는 거리가 먼 프리랜서의 생활이었다. '많이 놀아본 사람이 미련이 없다'는 말이 있듯 나에게 사람은 이제 더이상 피하고 싶은 존재가 아니다. 원하는 이상적인 직장을 찾아 결국 안착하게 된 독립적인 프리랜서의 생활을 지속하던 중 진정 꿈꾸게 되는 종착지가 결국 조직, 즉 사람들 안에서의 나의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사람 사이. 거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건. 옆사람. 동료와의. 팀안의 나의 사이. 오늘 하루 만나게 되는 지나가는 민원인과의 사이인 듯하다. 그 사이는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구구절절한 소설이나 짧은 시집이나 글의 형식이나 모양이 큰 의미가 아닐수있듯이 얼마나 진한 혹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직장에 출근하면 바로 집에 가고싶은 웃픈 현실 속에서도 우연히 마주친 조사관님과의 짧은 눈 인사. 그리고 진정성 있게 업무에 임하는 반장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느꼈다면 그 사람과의 사이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그 진심들의 조각들이 모여 결국 그 사람에 대한 상이 기억에 맺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진심의 순간들은 삶의 자양분이 되어 형성된 나의 어떤 모습도 다른 사람의 기억의 상에 남게 될 것이다.
흔히들 사람 사이를 지칭하는 말로 '인맥'이 있다. 인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사람 사이에서 '내가 어찌해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다. 나는 내향적인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사이는 '인맥'이라는 단어보다는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의미로 '인연'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사람이 사람을 날카롭게도 하고 어떤 인연은 잃어버린 소망을 되찾게 해 줄 수도 있는 것 같다.
한때 일에 있어서 적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적성이 맞지 않으면 다니던 직장도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생각을 행동에 많이 옮겼고 그 결과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더이상 내가 특별히 이루고 싶은. 하고싶은 일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왠지 40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 키우는 입장에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다는 말 자체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직장. 육아. 직장. 육아의 현실 속에서 요즘 지쳐가는 것 같아서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찾고싶다는 생각은 종종 하게 된다.
그건 무엇일까 인간(人間)에 그 답이 숨어있지 않을까싶다. 극히 개인적인 성향으로 나 밖에 모르던 내가 좋아하는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 멋있는 사람. 고마운 사람. 닮고싶은 사람이 생기는 걸 보면 내면의 나침반이 어렴풋이 앞으로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입사한지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벌써 네 번의 팀이 바뀌며 네 번의 인간을 배웠다. 나를 거쳐간 조직 안에서 숫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제법 사람들에게 세금과 세법에 대해 안내를 해주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와 행정학 선택 과목으로 입사한 내가 제일 먼저 봉착한 난관은. 일상에서 자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긴 숫자와의 만남이었다. 일단 아홉자리가 넘어가는 금액의 매출이 곱게 보이지 않은 것은. 억단위 금액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결재 받는 중에 금액을 일십백천만으로 손가락으로 집고 있는데 옆에서 웃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신 팀장님이 생각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아홉자리든 열 자리든 긴 숫자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나름 성장한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인연들로 인해 이 모든 과정이 가능해지고 있다. 집에서 아이만 키우고 있었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직장의 공간 안에서 주위의 사람들이 쌓아온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삶을 잠시 접해보는 시간들을 통해 지금도 나는 여러 면에서 다듬어지고 있다. 행운인지 이번 해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나와 다른 삶의 스토리를. 스타일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하루 잠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고민들에 함께 공감하며 웃을 수 있는 순간들이 주어짐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