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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한량 Sep 03. 2022

너 때문이야 (2)

당신 생각으로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당신으로 써내려 가기로 했다.

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모니터를 수십 분째 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안의 모든 감정들을 뱉어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릿해져서일까, 난 쉽게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취기가 돌아 모든 게 부서지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나면 또 어느새인가 가득히 써 내려간 나의 울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난 취해 잠들었고 다음날이면 다시 아침 일찍 서둘러 일을 하러 갔다.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난 끊임없이 퇴근하기를 갈망했다. 막상 집에 가면 다시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술을 찾을 거면서도 난 간절히 집에 가기를 원했다.


술기운이 돌 때 난 유튜브로 해운대 바닷가를 걸어 다니는 영상을 틀었다. 실시간으로 지금의 부산을 나 대신 걸어 다녀주는 그 채널을 며칠째 틀어놓고 있었다. 음악을 틀어놓기에는 조금 시끄러웠고 적당히 소음이 존재하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상을 원했다. 처음엔 알고리즘의 추천 영상으로 이태원의 거리를 보여줬는데 딱히 할 게 없던 나의 취한 밤에 어울리는 영상이었다. 지루할 틈 없이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 속 현란한 사람들 적당한 소음, 가득 채워진 사람들이 주는 안락함. 나의 모든 것을 속이기에 충분했다. 다음날부터 나의 주정(酒酊)은 이곳저곳을 걷는 것으로 바뀌었다. 온갖 서울의 명소들을 취한 채 비틀거렸다. 그러다 결국 해운대의 거리로 고정되었는데 특별히 해운대를 삼았던 것은 내가 가장 잘 아는 지리이기도 했고, 모니터 너머에서도 바다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취해서 모든 것이 흔들리고 찬란하게 부서지는데 그까짓 냄새쯤이야. 난 혹여나 아는 사람이 지나갈까 보이면 모른 채 그냥 지나가겠단 마음으로 카메라를 조심히 따라다녔다.


이 카메라맨은 혼자서 자주 떠들었다. 시청자들과 소통을 원하는 것 같았는데 난 당신에게 원하는 게 없으니 제발 조용히 해주었으면 했다. 난 그저 지금 당신이 송출하는 이 영상만이 보고플 뿐이라고 귀에다 몇 번을 속삭였지만 그는 들은 채도 안 하고 그저 해운대 주변을 어슬렁 거릴 뿐이었다. 무더운 여름, 방에 있기 위해서는 에어컨을 틀어놓았어야 했지만 이곳 해운대의 밤은 선선했다. 딱 기분 좋은 바람이 불던 오월의 어느 날이 생각나는 온도였다. 아직은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리지 않은 7월 중순의 해운대 밤바다를 그렇게 마셔댔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소금 향만이 가끔 나의 정신을 잡아주었지만 이내 얼마 못가 그 백사장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가빠지는 호흡들 사이 옷 안 곳곳이 꺼끌 해졌다. 팔소매와 목덜미 사이로 가득 들어온 모래들에 표정이 찡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한참을 누워있다 모래들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어릴 적 물 양동이를 옆에 두고 뭔지 모르지만 계속 만져댔던 그 모래들로 쌓은 것들과도 같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것들을 난 또 취한 채 쌓아댔다. 한참을 만들던 도중 이것들이 또다시 다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 이내 털썩, 눈 뜨면 아침이 되어버린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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