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지그린 Oct 03. 2024

비밀 임신 프로젝트

임밍 아웃 금지령

임신이었다.

이제 다시 임신의 여정이 시작되는구나.

출산이라는 높은 산 앞에 서서 정상을 한번 올려다봤다.

이번에는 기필코 완주하리라.


임신을 확인하고 기쁨의 호들갑 같은 건 없었다. 임신 테스트기의 설레는 핑크빛을 확인하고도 조용히 임테기를 상자에 넣고 차분하게 일상을 보냈다. 넘어야 하는 고개와 올라야 하는 산이 너무 많아 힘을 아껴야 했다. 1년도 아니고 딱 40주만 견디면 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최소 38주, 226일만 견디면 아기를 품에 안을 수 있다. 높은 산을 오르기 전 등산화를 여미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듯 임신의 앞에서 출산이라는 정상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단단히 여몄다.


남편과 나는 조금 특별한 임신의 여정을 준비했다. 일명 비밀 임신 프로젝트. 우선 보통의 임산부가 하는 모든 것을 하지 않기로 했다. 태아보험부터 태교여행, 초음파 앨범, 출산 용품 등등 그 어떤 것도 준비하거나 계획하지 않고 임신 전과 똑같이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임밍아웃을 절대로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건강한 배아를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내 가족, 지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첫 임신을 했을 땐 나도 보통의 임산부처럼 떠들썩하게 부모님 임밍아웃 이벤트를 했었다. 그리고 계류 유산 후 요란했던 소식을 다시 걷어와야 했다. 두 번째 임신은 20주까지 도달했었다. 20주에 유산이 된다는 말을 주위에서 들어 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지인들이 내 임신 소식을 알고 있었다. 준비했던 출산용품을 처분해야 했고 만들어두었던 아기 인스타그램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었고 너무나 슬픈 중기 유산 소식을 전하며 수많은 사람에게서 내 소식을 걷어와야 했다. 이런 일을 겪고도 세 번째 임신에서는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임테기 두줄을 확인하자마자 친정과 시댁에 소식을 알렸었다. 나도 보통의 임산부처럼 그렇게 지낼 거야! 겁먹지 않을 거야! 중기 유산도 겪었는데 설마 나에게 또 벌을 내리실까? 하는 당당함도 있었다. 이제는 행복만 있어야 했다. 이런 내가 하늘은 우스웠겠지. 어디서 감히 그런 말을 하냐며 하늘은 보란 듯 더 큰 아픔을 주었다. 슬픈 미래를 그리지 않았던 내게 11주 선택유산은 말문을 막히게 했다. 유산 소식조차 전할 힘이 없었다.


이번에는 겸손하게 40주를 보내겠습니다.

임신했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지낼게요.

부디 저의 아이를 빼앗아가지 마세요.


다시 한번 더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될까 봐, 임신 소식을 다시 걷어오는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할까 봐.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에게 걱정을 안길 수 없었다. 나의 임신 소식은 기쁨과 동시에 너무나 큰 불안과 걱정이었다. 불안한 40주의 시간은 남편과 나 둘만의 몫이어야 했다.


1년 12달이 한눈에 보이는 커다란 달력을 냉장고에 붙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면 카운팅을 했다. 하루 중 밤 11시 59분이 제일 설레고 행복했다. 오늘도 하루를 견뎠고 1분이 지나면 드디어 내일이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 쌓아가다 보면 40주의 널 만날 수 있겠지.


외출을 전혀 하지 않고 약속을 거절하는 나를 보며 눈치가 빠른 지인들은 아마도 내가 임신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슬픔을 아는 지인들은 감사하게도 궁금한 질문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삼켜주었다. 가족 모임은 배가 나오기 전 딱 한번 참여했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 시댁도 친정도 시험관을 한다는 핑계를 대며 절대 방문하지 않았다. 가족 카톡방에 사진을 보낼 때도 얼굴만 나오거나 통이 큰 옷을 입은 사진만 보냈다. 집 근처에 사는 언니가 반찬을 주러 온다고 하면 서둘러 남편이 먼저 가서 받아왔다.


몇 달 뒤에 정말 큰 선물을 드릴 거예요.

정말 정말 깜짝 놀라실 거예요.

불안한 임신 소식이 아니라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말이에요!


주수가 쌓여 가면서 조금씩 용기도 생겨났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임신 8주가 아니라 임신 25주예요! 임신 28주예요!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절을 다 다니시며 날 위해 소원 등을 달아주시는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내가 결혼초처럼 해맑게 다시 웃기를 바라는 시아버님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기뻐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남편, 우리 25주가 넘으면 말씀드릴까?"하고 물으면 남편은 조금 더 뒤에 말하자고 했다. 25주가 넘어 다시 남편에게 말하니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출산하기 하루 전에 말하고 했다. "안돼! 엄마가 나 산후조리 도와주셔야 하는데 스케줄 때문이라도 출산 일주일 전에 말씀드리자!" 남편은 다시 말했다. "우리 그냥 아기 낳고 말씀드리자". 나는 처음에 이 말을 농담으로 들었지만 나중에야 진심이 담긴 말임을 알았다.


그래 진짜 우리 아기 낳고 말씀드리자.

불안한 시간 하루도 보내지 마시고

기쁨의 시간만 선물드리자.


그렇게 임밍아웃 없는 출산을 목표로 하며

남편과 나는 신도 모르게 뱃속의 아기를 꽁꽁 숨겼다.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게

어디 있는지 조차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임신 확인 후 남편이 지었던 뽀물이라는 태명이 뭔가 너무 빛나는 것 같았다. 듣기만 해도 너무 소중해 신이 질투를 할 것 같았다. 서둘러 태명에 '똥'자를 넣어 똥깡이로 태명을 바꾸었다. 똥강아지가 내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꾼 것도 이유였지만 실은 그 이유보다 전혀 귀한 것이 아니라고 신이 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제발 그냥 지나쳐주세요.

이것 보세요. 전혀 소중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신에게조차 임밍아웃을 하고 싶지 않았던

간절했던 임신이었다.


이전 03화 임신을 위한 티켓을 획득하셨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