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일기 - 나는 알고 있었어
임신이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임신기간은 보통의 임산부와 다를 거라고, 아니 달라야 한다고. 몇 번의 임신과 유산을 경험한 나는 모든 걸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리 하나씩 준비를 했다.
자궁경부가 짧아 조산의 위험이 있으니 외출을 할 수 없으리라. 맥수술(자궁경부를 묶는 수술)을 하더라도 위험하니 일상의 대부분을 누워서 보내야 할 것이다. 친구를 만난다거나 좋아하는 전시를 간다거나 땀이 나는 운동을 한다거나 꼭 가보고 싶은 맛집을 간다 거나 하는 일상적인 외출은 포기해야 한다. 오감으로 느꼈던 계절의 변화는 창밖 풍경이나 뉴스로 접해야겠지. 격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집안 청소부터 앉아서 몇 시간을 그려야 하는 그림도 포기해야 한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여행과 편도 4시간이 걸리는 내 고향 통영은 절대 갈 수 없으리라. 바다도 산도 강도 하다못해 집 바로 앞 공원도 나갈 수 없을 거란걸 잘 알고 있었다.
건강한 마음으로 임신 기간을 보내기 위해 임신이 되면 할 수 없는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곧 시작할 시험관이 성공일지 실패일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몇 달 뒤 임신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매일을 바쁘게 보냈다.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때의 나를 참 열정 많고 정신이 없는 사람으로 기억하겠지.
나의 바쁨 뒤에 숨겨진 속사정을 상상이나 했을까?
시험관 이식 전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하나 둘 실행에 옮겼다. 우선 격하게 움직임을 요하는 운동을 매일 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에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자전거를 탔고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보곤 했다. 무거운 백패킹 장비를 메고 몇 번이고 캠핑을 갔고 내 고향 통영 바다에 몸을 던져 수영도 했다. 심장이 터질 듯 달리기도 하고 신나게 점프도 몇 번이나 했다. 배우고 싶었던 수업을 최대한 많이 찾아들었고 많은 에너지를 쏟아 그림도 여러 장 그렸다. 남편과 함께 일부러 멀리까지 찾아가야 하는 맛집을 다녔고 오랫동안 그리울 친구, 선배, 후배와 일부러 약속을 잡아 얼굴을 마주 했다.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대도 구입하고 잠옷도 이상하리 만치 많이 구입했다. 집에서 예쁘고 귀여운 잠옷을 입고 있으면 그래도 덜 우울하고 신나지 않을까? 비가 쏟아지는 날, 눈이 펑펑 내린 날,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날,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는 일부러 밖을 나가 오감으로 계절을 마주했다.
이렇게 하나, 둘, 임신을 위한 버킷리스트를 채워가며 준비를 마무리했다. 든든하게 채워둔 리스트 덕분에 임신 10개월을 건강하게 누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험관 이식을 앞두고,
나는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블로그에 적었다.
미래일기 -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응 나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미리 준비했어.
배우고 싶은 수업들 왕창 듣고
보고 싶은 친구들 미리 만나고
가고 싶은 곳 다 가보고
부지런히 시간을 쪼개가며 하고 싶은 거 다 했지.
그래서 정말 바빴어.
정말 임신될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니깐.
나는 임신하면 움직일 수가 없잖아.
그래서 미리 다해둔 거야.
봐봐 지금 이렇게 임신했잖아.
내 말이 맞지?
누워서 뭐 할지도 다 생각해 뒀었거든.
그대로 하고 있는 거야.
와 정말 알고 있었던 거네?
응! 근데 미리 알고 있었다기보다
그렇게 내가 믿었건 것 같아.
나중에 실망하면 어쩌려고 했어?
그 생각은 안 했어. 그때 가서 생각하려고 했지.
근데 나는 알아. 분명 앞으로 다시 나아갔을 거야.
정말 잘 됐어.
응! 정말 잘 됐어.
나도 믿고 앞으로 나아갈게.
응응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차고 넘쳤던 에너지를
내 안으로 조용히 가라앉히며
2023년 11월, 다시 시험관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