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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에는 논리로 맞선다.
변호사 포장지

by 따뜻한 수첩

항상 시작은 좌뇌였다. 좌뇌에게 있어서 나를 설득하고 또, 나에게 논리를 주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나는 좌뇌의 입김 한 번이면 간단히 전복되는 배와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순순히 반응해버리지 않기로 했다.



#1 좌뇌에게 질 순 없지.


어느 겨울, 폭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부탁으로 지방까지 2시간 이상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 항상 나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자유롭게 시간을 뺄 수 있는 나는 늘 심부름 당번이었다. 딱히 급한 스케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극단적인 생각이 나도 모르게 몰아쳤다. '나는 결국 가족들에게 희생만 하다가 폭설 속에서 교통사고로,,, 아! 그 길 위에서 나는 가련하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겠지.' 이 생각은 나를 미친 듯이 동요하게 만들었다. 불안, 공포, 짜증의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절정으로 치닫았고 종국에 나는 아주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당했다!' 나는 내가 도가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완전히 당해버린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좌뇌의 수작에 걸려들고 말았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좌뇌의 인과 논리를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좌뇌의 논리는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폭설이 내리는 날은 교통사고의 위험이 상당히 높아. 그건 다 가족이 너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기 때문이지. 너의 희생과 노력은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맺을 거야."

녀석은 단 몇 초만에 나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고 나는 이 기분 나쁜 느낌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건 너무 한 것 아닌가.'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이런 이야기꾼 좌뇌를 '해석기(interpreter)'라고 불렀다.


우리의 좌뇌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실을 조금씩 날조한다.
좌뇌는 상황에 맞는 사후 대답을 만들어 냈다. 알고 있는 사실에서 단서를 찾아 납득이 되도록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는 좌뇌의 이 같은 과정을 '해석기(interpreter)'라 불렀다.
책 『Who's in Charge? 』


좌뇌의 이 해석은 종종 현실보다 더 확신에 차 있으며, 때때로 우리를 잘못된 감정으로 이끌기도 한다.



#2 방패 변호사를 내 안에 들이다.


좌뇌가 해석자라면 나는 변호사다. 변호사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이지만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논리적으로 방어를 펼친다. 그래서 나는 변호사가 되어 이 사건을 재구성하기로 했다. 나는 감정의 법정에서 진실을 지키기 위해 변론을 시작했다.


'지방까지 내려가는 길에, 나는 눈 내리는 절경을 보게 될 거야. 내가 좋아하는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말이야. 요즘 정신없이 보내기만 했는데, 온전한 나만의 2시간이 주어진 거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뻐. 눈이 온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운전을 할 테니 말이야. 늘 그렇듯 안전하게 잘 다녀올 거야. 내가 원칙대로 운전한다면 사고 날 확률은 매우 희박해.'

이 변론만으로 내 감정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180도 바뀐 것은 아니지만 거의 정상의 가까운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실'보다 '인과'에 집착하는 좌뇌에게 이런 설명은 꽤 효과가 있다.


내가 수십 년간 짜증의 경험을 통해 발견해 낸 법칙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엄지발가락 법칙'이다. 엄마에게 혼나고 짜증을 내면서 방에 들어갈 때면 방 문 끝에 꼭 엄지발가락을 찧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기분 나쁜 통증,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또, 짜증을 내면서 책상이나 테이블 근처로 가면 여지없이 모서리에 엄지발가락을 찧는다. 엄지발가락 정도는 내어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짜증이 불러오는 불상사가 엄지발가락 정도에 그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날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았다면 정말 교통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


사건이 일어나면 좌뇌가 자동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다음은 그 스토리에 맞는 감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다음 사건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나는 감정과 다음 사건 사이에 변호사를 두기로 했다. 든든한 방패 하나를 세운 것이다.

사건 → 좌뇌 → 감정 → 변호사(재구성) → 다음 사건

나의 엄지발가락 호위무사는 오늘도 열심히 변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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