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이해한다는 것
[원문장] <질서 너머>, 조던B.피터슨 저
나는 배신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신뢰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손을 내민다. 그런 신뢰를 통해 당신과 나의 가장 좋은 면이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은 그릇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고, 마음은 사람에 따라 깊이와 빛깔이 다르다.
우리는 때때로 이 단순한 진실을 잊은 채, 내 생각의 틀에 타인의 마음을 억지로 맞추려 든다.
그러나 모든 마음이 나와 같을 수는 없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또 다른 세계의 풍경일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풍경을 감상하는 일이지, 그것을 내 지도로 바꾸어 그리려 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일과도 같다.
삶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 경험의 결로 짜인 하나의 직물이다.
그러니 이해는 쉽지 않을지언정, 존중은 가능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갈등이 싹트고, 그 갈등은 오해의 그림자를 남긴다.
때로는 그 그림자에 마음이 젖고, 오래도록 씻기지 않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 내 생각을 입힐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정답 같을지라도, 모두에게 동일한 옷이 어울릴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그저 이해하는 것이다.
마치 바람이 나무를 향해 설명하지 않듯, 그냥 지나가며 그가 흔들리는 이유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인들과 오래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득 과거가 현재와는 다른 색을 띠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이 주는 묘한 감정. 그것은 회한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는 어떤 겸허함이다.
과거의 판단은 그 시절의 온도와 바람 속에서 태어난 것이고, 지금의 관점은 또 다른 계절을 살아가는 이들의 것이기에, 둘을 나란히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때론 무의미하다.
기억은 방향이 없고, 평가는 늘 현재의 눈으로만 이루어진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다채롭고 아름다운지 자주 깨닫는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궁금해하는 부분이 다르고, 같은 문장을 읽고도 해석이 제각각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살아온 풍경이 다르고, 걸어온 길이 다르고, 마음에 품은 꿈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바람을 사랑하고, 어떤 이는 빛을 따라 걷는다.
누군가는 고요한 것을, 또 누군가는 격렬한 것을 사랑한다. 그러니 그 해석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다름 속에서 살아간다.
어쩌면 다름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내 세계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그의 세계를 가만히 들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대화의 시작이다.
우리는 종종 옳고 그름을 나누고,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인생은 시험지가 아니다.
나의 질문에 단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삶은 시와 같아서, 읽는 이마다 다르게 울리고, 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니 그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생각의 결을 만져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포용이 아니라, 내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내 시야가 닿지 않았던 곳을 타인의 눈으로 보게 되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타인의 생각으로 듣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나누며, 더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간다.
결국, 모든 사람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걷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음악을 연주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음악을 조용히 들어주는 일이다.
때로는 박자가 다르고, 리듬이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연결되고, 함께 살아간다.
이해란, 서로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이다.
바람이 구름을 설명하지 않듯, 나도 타인을 굳이 나의 말로 번역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바라보고, 들으며, 천천히 익혀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