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5 (6/8) November 2022
(커버 이미지 : Las Vegas Strip의 호텔들. 정면에 보이는 Mirage 호텔에서는 비틀스의 음악을 콘셉트로 한 태양의 서커스 공연인 'LOVE'를 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호텔의 주인은 바뀌고 공연도 모두 종료되었다. 사진 왼쪽은 Hotel Harrahs, 오른쪽 첨탑은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콘셉트로 한 Hotel Venitian이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미국에서 동부에 사는 사람이 서부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이미 엄청 무리한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비행기나 호텔에 돈도 많이 쓰게 되니 짧은 일정에 최대한 많은 것을 담아야 하는 제약이 있다.
우리가 들르기로 한 장소 모두 며칠씩 머물며 천천히 보아야 할 곳이지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니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지나치는 일정이 나올 수 밖에는 없었다.
가진 것 내에서 최대한 열심히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려고 했던 8박 9일의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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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밸리에서의 짧은 여정은 너무나도 아쉬웠다. 아쉬운 만큼 출발이 늦어지고 나에겐 칠흑 같은 밤에 황무지를 운전해야 하는 숙제가 떨어졌다. 다들 피곤한지 차 안엔 노랫소리뿐 아무 말도 없다.
다음 숙소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길이고 심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덮여있다. 길만 보며 한참을 운전하니 답답함도 느껴지고 나이아가라 여행에서 만났던 사슴의 추억도 떠오른다.
'지금 여기서 그때처럼 사슴을 만나면 우리 가족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없어질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여기는 쥐도 없고 새도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차를 세워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그렇게 아쉬움과 걱정 속에 달리다 보니 황무지 한가운데 저 멀리부터 우리를 반겨주는 환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 인간의 욕망으로 세웠다는 바로 그곳, 우리는 그렇게 늦은 밤이 되어서야 다음 목적지인 '라스베가스(Las Vegas)'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욕망과 업보의 도시, Las Vegas & 나의 삶과는 이질적인 부유함
라스베가스는 스페인어로 '초원'이라는 뜻이다. 아마 정말 푸른 초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막 속 오아시스정도인 곳이었을 거다.
19세기에 철도역으로 시작한 이 도시는 1930년대 후버댐 공사의 전진기지가 되어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는데 완공 이후 후버댐에서 공급받는 물과 전기를 바탕으로 기하급수적 성장을 하게 된다.
1940년대가 되어 마피아들은 도시 외곽에 카지노 사업을 벌이기 시작하여 라스베가스는 도박과 유흥의 도시로 유명해지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기업 자본이 마피아들을 밀어내고 라스베가스를 장악하면서 법의 테두리에 들어오게 되고 도박 외에도 대형 리조트와 다양한 공연들이 추가되면서 현재의 모습에 가깝게 변모하였다.
라스베가스는 여전히 도박과 유흥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로 가족과 올 수는 있는 고급 관광지라는 이미지가 있다.
화려함의 극한, 절제하지 않는 소비, 탐욕의 집약... 등이 이 도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닐까. 그렇기에 모두가 경계하는 곳이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또 어쩔 수가 없으니 짧게나마 직접 경험해 보기로 한다.
(이곳에 왔으니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Leaving Las Vegas (1995)'를 떠올리는 건 너무 자연스럽지만 가족 여행을 왔으니 너무 어두운 모습은 일부러 찾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모든 것이 워낙 비싼 곳이기 때문에 아내는 이곳 숙소를 정하는데 아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우리 호텔은 라스베가스 관광의 모든 것인 스트립(Strip, 라스베가스 대로를 따라 형성된 상업지구)에 있는 호텔들 중의 하나로 비싸기도 비싸지만 예약 자체도 쉽지 않은 곳이다. 아내는 하룻밤 숙박비 1300달러를 내야 하는 이곳을 한 번은 경험해 보고 싶었다며 예약했다고 한다. 어차피 이 지역을 아예 멀리 벗어나지 않고서는 별 다른 저렴한 호텔을 찾을 수도 없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아마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비싼 숙소일 것이다.
호텔 주차비(비싼 호텔일수록 무료 주차가 없고 주차비를 혹독하게 받는다.)가 꽤나 비싸기도 하고 우버가 다니는 라스베가스에서는 차가 필요 없기 때문에,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 가서 렌터카를 반납했다.
아내와 아이를 호텔 로비에 내려주고 나 혼자 공항에 다녀오는 30여분 동안, 추수감사절 휴가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아내는 여전히 기다란 체크인 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잔뜩 화가 난 채로. (돈 많이 냈는데 이 정도는 좀 잘해줘라!)
체크인이 늦은 건 불편한 일이지만 그야말로 초호화 호텔 로비는 매우 넓은 곳이라 분수도 있고 이탈리아 풍의 벽화도 그려져 있어서 세은이는 그리 지루해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탈리아 베니스를 콘셉트로 한 이 호텔은 확장에 증축을 여러 번 해서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내부는 오래된 유럽 저택/궁궐 분위기로 되어 있어서 확실히 비싼 티가 났다. 엄청나게 긴 복도를 지나 찾은 객실 역시 여태껏 우리가 다녀 본 호텔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라스베가스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호화로운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내와 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세은이에게 객실 냉장고 음료를 꺼내먹지 못하도록 당부를 한 일이었다.
"아빠가 나가서 CVS(약국 겸 편의점) 가서 먹고 싶은 거 다 사 올게. 여기 있는 건 먹지 마. 엄청 비싼 거야"
여기까지 오자마자 물 값 아까워서 아내와 내가 이런 소리를 하고 있노라니 뭔지 모르게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해야 하냐는 세은이의 말에 우리 셋은 어처구니없게 웃었다. 우리의 삶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이 부유함이 실소를 자아낸다.
짐을 풀고 나서 편의점에 가기 위해 혼자 나와 본 라스베가스 밤거리는 대낮같이 밝아서 서울 번화가의 거리 같다. 그렇게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곳곳에 보이는 노숙자들과 어디선가 풍겨오는 카나비스(Cannabis, 대마초) 냄새는 이 길이 아이를 데리고 맘 놓고 다닐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운전도 길게 했으니, 맥주 한잔하고 일찍 자서 내일 이 욕망의 도시를 제대로 파헤쳐 보리라.
Las Vegas Strip의 볼거리들 - '거짓 위에 지어진 뻔뻔한 욕망의 섬'
이번 여행의 설계자는 아내다. 아내는 단순히 여행 경로와 비행기/호텔 예약정도만을 담당한 게 아니라 세은이의 기호에 맞는 각종 이벤트까지 기획해서 지금까지 세은이의 여행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런 아내가 라스베가스에서 준비한 이벤트는 오늘 하루 4월 LA 여행 때 함께 다녔던 헤이니네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헤이니 엄마 미리 조율해서 지난번처럼 각자의 여행 중에 겹치는 날을 하루 만들어 냈다고 한다.
나야 미리 말고 있었지만, 세은이에게 서프라이즈 느낌으로 알려주었더니 엄청 좋아한다. 신나는 기분으로 길을 나선다. (일부러 아이를 놀래주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돌발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100% 확실할 때 말해줘야 한다. 만에 하나 계획이 어긋나면 그 실망감을 감당할 수가 없다.)
헤이니네는 평소 자주 보는 사이지만 여행까지 와서 어려운(?) 순간에 만나니 더 반갑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랑 계속 있기보다는 아이들끼리 노는 게 좋겠지. 미국 생활 1년 반 만에 제일 가까운 친구가 된 세은이와 헤이니에게 오늘이 좋은 추억이 되면 좋겠다. 내일은 다시 각자 헤어져서 여행을 다녀야 하니까.
'여기 와 있는 것 자체가 비싼 여행을 왔다는 뜻이란다. 엄마 아빠의 노력을 좀 알아주렴. 우리 어린이들아!'
우리는 헤이니네와 오늘 하루 같이 다니며 라스베가스의 볼거리가 몰려있는 스트립을 구경하고 저녁엔 공연을 보기로 했다. 약간 늦은 아침에 호텔 앞에서 만났다. 헤이니네는 어젯밤에 비행기로 도착했다고 한다.
'라스베가스 스트립', 짧게 그냥 '스트립'이라고 부르는 이 지역은 라스베가스 대로(Las Vegas Boulevard)를 따라 길게 형성된 상업지구를 말한다. 유흥의 라스베가스가 시작된 곳으로 남쪽에 있는 라스베가스 공항에서부터 북쪽방향으로 무려 7km까지 이어진 길고 넓은 곳이다. (사실 라스베가스는 스트립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 모든 곳이 카지노로 가득하다. 스트립이 가장 무난하고 가족적이고 매운맛, 어른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스트립 주변에 잔뜩 있다.)
스트립엔 휘황찬란한 건물들, 특별한 상점들이 즐비하다. 거리를 걷다 보니 난데없이 이탈리아 베니스를 콘셉트로 한 호텔, 파리 에펠탑, 뉴욕시티 자유의 여신상도 볼 수 있다. 평소 유럽여행을 가고 싶어 했던 세은이에게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세은아 여기 이탈리아랑 프랑스가 다 있어. 우리 유럽 여행 안 가도 되겠다."
"아! 이거 다 가짜잖아. 여기는 라스베가스라구. 저게 어떻게 에펠탑이냐고!"
그렇다. 세은이 말대로 스트립에 있는 많은 것들이 다 가짜다. 이 건물들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세워졌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여기선 그저 멋지고 예쁘기만 하면 존재할 자격이 있고,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굉장히 잘 만들었기 때문에 진짜나 다름없다.
원본의 철학과는 전혀 상관도 없이 복제된 허구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굉장히 당당하다. 그 뻔뻔함이 확실히 재미는 있다.
우리는 점심으로 해산물 뷔페(Bacchanal Buffet)에 갔다. 꽤나 비싼 편(시간에 따라 입장료가 다름)이었고 사람도 엄청 많다.
3면이 바다인 한국에서 온 우리가, 게다가 대서양이 멀지 않은 뉴욕 알바니에 살고 있는데, 바다에서 완전히 먼 사막 한가운데에 와서 해산물(아마도 대부분 냉동) 음식을 먹는 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런 짓도 해 보는 것에 의미를 둔다.
음식은 가격 생각하면 만족스럽진 않지만 꽤 맛있긴 하다. 애들은 게 다리찜을 좋아했는데 다들 만족하고 서비스도 좋다. 다시 하긴 어려운(?) 식사경험이다.
값비싼 차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 걸으면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로 유별난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TV에서만 보던 비키니, 선정적인 옷차림으로 돈을 받고 사진 찍어주는 여자들도 곳곳에 있다.
가족끼리 온 우리는 살짝 민망한 상황에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호기심에 옆을 지날 때 힐끗 보니 여기도 11월은 추워서인지 피부색과 비슷한 내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역시 이것도 가짜인가. 이것이 직업이라면 안쓰럽기도 하네'하는 생각도 든다. 오로지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뻔뻔한 욕망, 대놓고 하는 거짓말, 손에 잡힐 듯한 눈앞의 환상이 이 도시의 매력이 아닐까.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코카콜라나 M&M's, 허쉬 같은 초콜릿 회사의 기념품 스토어도 있다. 라스베가스에 본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왜 여기에 이런 상점이 있는지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냥 여기 있으니 그냥 좀 보고 가면 된다.
코카콜라 한국어 티셔츠가 있어서 하나 샀고, 허쉬 스토어에 가서 세계 최대의 초콜릿 자유의 여신상을 보았다. 이 더운 곳에서 녹지 않게 유지하는 게 신기했는데 그 때문인지 매장 안은 초콜릿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아이들은 엄마를 졸라서 초콜릿 한 봉지씩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라스베가스에서도 아이들의 웃음만큼은 진짜인 게 다행이다.
물의 호텔 Bellagio. 그곳에서 본 '태양의 서커스'그리고 모른 척해주고 싶었던 그녀
라스베가스 스트립엔 특색 있는 호텔이 굉장히 많은데 그중에 벨라지오(Bellagio) 호텔은 조금 특별한 곳이다. 왜냐면 정말 큰 호텔 인공 연못에서 하는 30분마다 한 번씩 있는 5분짜리 음악 분수쇼가 정말 유명하기 때문이다.
지나는 사람 모두가 볼 수 있는 무료 공연이지만 꽤나 짜임새가 있어서 라스베가스 주요 볼거리 중 하나다. 아내는 이 분수쇼를 꼭 봐야 한다고 목록에 적어두고 왔는데 막상 와보니 30분에 한번 하는, 굉장히 자주 볼 수 있는 거여서 시간 맞춰 챙길 필요까지는 없었다.
도로에 접해있는 분수대 앞에는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는 난간이 설치되어서 쇼를 하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화려함을 즐기고 사진을 남기고 있다.
이곳이 사막 도시임을 생각할 때 이런 분수쇼는 굉장한 사치라는 것, 큰 쇼를 유료도 아니고 무료로 선심 쓰듯 쇼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역시 라스베가스야'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고도 따로 돈 버는 곳이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겠지? 바로 우리가 그랬다. 우리의 오늘 저녁일정은 벨리지오 호텔에서 하는 공연 관람이다. '태양의 서커스(Cirque do Soleil) : O show' (프랑스어로 물을 뜻하는 'Eau'의 발음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태양의 서커스로 말할 것 같으면 라스베가스에서만 서로 다른 5개의 독점 공연을 한다고 한다. 스트립에 있는 호텔 전용극장에서 하는 공연이라 오로지 라스베가스에서만 볼 수 있다.
몬트리올에 있는 태양의 서커스 본점(?)을 그냥 지나쳤던 라스베가스 '물의 호텔'인 벨라지오에서는 보고 가기로 한다. 우리 셋 $500. 당연히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비싼 편도 아니다.
공연 1시간 전에 들어가 본 벨라지오 호텔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넓은 복도에는 호화로운 벽화, 천장에는 각종 유리공예로 꾸며져 있고 명품 상점이 즐비하다. 통로 한편으로는 가족끼리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꽃으로 장식된 전시장도 있지만 또 반대편으로는 슬롯머신이 놓인 카지노 구역이다. 사진만 찍고 카지노는 얼른 지나가자.
공연장 앞에 와보니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하다. O show는 25년도 넘게 했고, 주 4일, 하루 2회 공연을 하고 있는데도 보러 오는 사람은 여전히 많은가 보다. 대기 장소에 공연 관련 조각상도 전시되어 있고 상당히 예술적이고 고급스럽다. 이곳은 도박장인가 예술무대인가 혹은 둘 다 인 것인가?
우리 셋 $500 정도
공연장 내부는 평범한 무대처럼 되어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습한 기운과 물 냄새가 느껴진다. 그 이유는 무대의 중앙은 자유자재로 물이 채워졌다 빠졌다 하는 가변형 수조이기 때문이었다.
공연 내용에 따라 다이빙이 가능할 만큼 물이 깊게 채워지기도 하고 그냥 서 있을 수도 있는 보통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방금까지 서서 연기를 하던 곳인데 높은 곳에서 배우가 갑자기 바닥으로 다이빙을 하는 장면은 정말 아찔하다.
대사가 많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고, 배우들의 연기와 묘기도 좋고, 아이들을 위한 피에로의 개그코드도 적절하다. 이 멋진 비싼 공연을 보는 중에 세은이는 잠들어버렸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이 되었길 바란다.
2시간 정도의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물밀듯이 쏟아진다. 우리보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헤이니네를 간신히 만나서 같이 나가고 있는 길에 헤이니 아빠가 나를 부른다. "어 저기 연예인 아니에요? 혼자 왔나 보네."
그 말대로 모델 출신의 방송인 H도 O show를 보고 나왔는지 나보다 한 발짝 앞에 일행도 없이 혼자 가고 있는 게 보인다. 키가 워낙 커서 사람들 이목을 끄는데 몇몇 한국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말하며 웅성거린다. 세은이도 그녀를 알아본 듯하다.
평소 코믹한 이미지로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그녀지만 개인 여행으로 온 것일 수도 있으니 애써 쳐다보지도 않고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What happens in Vegas, Stays in Vegas."라고 하지 않던가.
서커스 공연까지 잘 보고 헤이니네와 밤거리를 거닐며 라스베가스의 야경 속에 그렇게 하루를 마쳤다. 세은이는 헤이니와 헤어지는 걸 마치 영원히 못 만나는 것 마냥 아쉬워했지만...
호텔방에 도착해서 우리의 라스베가스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아내가 한마디 꺼내기 전까지는.
"여기서 크게 한탕하고 한국을 뜹시다."
아름답게 호텔로 돌아온 아내는 무언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돈도 안 따고 그냥 간다고? 이건 좀 안돼."
욕망의 도시에 와서 업보를 쌓지 않고 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시계를 보니 자기에는 좀 일러서 호텔 1층으로 내려가 보기로 한다.
카지노 게임장이 특정 건물에만 존재하는 한국 강원랜드와는 달리, 라스베가스에는 거의 모든 호텔에 카지노가 있고 아무나, 아무 호텔에, 아무 제한 없이 들어가서 돈 게임을 할 수 있다. '도박의 도시'라는 말이 허명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도 당연히 카지노가 있다. 게임장이 특별한 구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지나는 길에 있다. 세은이와 함께 갔지만 입장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우리 외에도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이 많다. (도박장에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맞느냐... 는 고민은 당연히 했는데, 미국에서는 초등학생 아이가 호텔방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더 큰 범죄로 다뤄지기 때문에 이 경우엔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맞다.)
진짜 업보를 쌓은 게임룸은 게임장 안쪽 깊숙이 있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곳에는 진입장벽이 낮은 간단한 게임기들이 배치되어 있다.
아내는 업보를 쌓고 싶어서 내려왔지만 그렇다고 도박을 해본 적도 없고 간도 작은 사람이어서 만만해 보이는 슬롯머신에서만 기웃거리고 있다.
우리는 시간이 없으니 한국 콘셉트 기계가 하나 보이기에 고민만 하는 아내를 일단 앉혔다.
"여기서 한탕 성공하면 뉴욕도 한국도 돌아가지 않아도 돼. 잭팟 맞고 여기서 살자."
미성년자는 게임기 앞에 서서 구경할 수 없기 때문에, 아내가 업보를 쌓는 동안 세은이와 나는 호텔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좀 하기로 했다.
(라스베가스 카지노는 미성년자의 출입을 제한하지는 않지만 게임석과 통행로는 바닥의 색으로 구분되는 것이 보통이다. 미성년자는 게임기에 손을 대거나 게임석 주변(바닥 색이 다름)에 서 있을 수 없는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엔 직원이 다가와서 적극 제지한다. 그리고 부모가 게임에 정신 팔려서 아이가 혼자 통행로에 서 있는 경우엔 경찰 신고 대상이 되니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이를 호텔방에 혼자 남겨두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나름 무법지대는 아닌 셈이다.)
시간을 한참 보내고 다시 돌아와 보니 아내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15땄어!!"
이 소박한 한국 아줌마는 2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땄다고 좋아하고 있다. 아내의 들뜬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날름 현금으로 바꾸고 그만 '익절'하기로 한다.
마치 승리자가 된 듯한 아내가, 어렵게 번 돈(?)으로 야식을 사겠다 해서 1층 구석 식당에서 피자 한 조각씩 사 먹었다. 도박으로 번 것보다 많이 썼으니 이익은 없는 셈이다. 그래도 업보만이 아니고 라스베가스 마지막 추억을 알차게 쌓았으니 충분히 이익이 되고도 남는 듯하다.
다행히도 웃는 얼굴로 방에 돌아와, 짐을 다시 싸고 내일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Leaving Las Vegas'
그리고 가지 않은 곳의 이야기
- Welcome to Fabulous Las Vegas
라스베가스 개발 당시 채택된 홍보 슬로건 'Welcome to Fabulous Las Vegas'는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도시 경계 환영 간판에 새겨져 있다.
나름 라스베가스의 역사적 징표이기에, 고속도로 안내판이지만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으러 많이 찾는다. 그래서 고속도로에는 기념사진을 위한 주차장까지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시 외곽이라 다녀오기에 조금 멀기도 하고 보통은 사진 찍는 줄 서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여기는 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작은 기념품을 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 Fremont Street와 Golden Nugget Casino
스트립은 비교적 가족단위 관광객이 즐길거리가 있는 곳인데, 약간 북쪽에 있는 프레몬트 스트리트는 라스베가스 유흥지의 원조격으로 상당히 어른의 놀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 길의 500m 정도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 되어 있는데 거대한 LED 지붕(Viva Vision)을 덮어서 영상과 음악 쇼를 항상 볼 수 있는 곳이다. 거리 무대에서 무료 공연도 많이 하고 집라인도 탈 수 있다.
하지만 약간 저렴한 분위기에 거리에서 술을 마시는(미국에선 대부분 불법) 사람도 많아서 아이랑 같이, 특히 밤에 가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곳엔 가 보지 않았다.
훗날 라스베가스를 다녀온 뒤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아저씨의 학창 시절에 매우 유명했던 "Strees Fighter2"라는 게임에는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한 스테이지가 있다.
최종 보스 4인 중에 제일 첫 번째인 'Balrog' 스테이지가 라스베가스로 되어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프레몬트 스트리트에 있는 'Golden Nugget' 카지노가 그 배경이다.
이것을 그때 알았다면 잠깐이라도 들러서 기념사진을 남겼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광활한 대자연 Grand Canyon으로 계속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