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 October 2022, 여행 15 (4/4)
(커버 이미지 : 몬트리올 섬 동쪽 St. Lawrence 강변에 있는 Old Port(=Vieux Port) 거리. 근처의 섬들이나 강 건너 마을로 연결해 주는 페리선을 탈 수 있다. 이곳은 선착장일 뿐만 아니라 각종 놀이기구, 박물관, 공연장 등이 있는 문화지역이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우리는 여름과 가을 각각 한 번씩 다녀왔는데, 그 두 번의 이야기를 모아서 지금 글을 남깁니다.
퀘벡시티를 떠나 남쪽을 향해 돌아가기 전, 중간에 있는 몬트리올에 1박 2일 머물다 가려고 한다.
나 같은 아저씨들은 중학교 체육 시험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키워드로 외웠던 그곳이다. 캐나다에서 몬트리올은 토론토 다음의 대도시이고 수도인 오타와보다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우리가 사는 알바니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다.
퀘벡시티에서 운 좋게도 '캐나다의 생일(Canada day, July 1st)' 잔치에 함께 할 수 있었는데 몬트리올에서도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시내 호텔에 도착했다.
상상도 못 했던 행운, 'Montreal International Jazz Festival'
퀘벡시티에서 전력을 다해 놀고 온 우리는 몬트리올에 와서는 굉장히 느슨해졌다. 이미 3시간 넘게 운전을 하고 왔으니 호텔방에 퍼져 있다가 저녁을 간단히 먹고 산책이나 하다가 하루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호텔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나왔더니 분위기가 이상하다. 거리의 사람들 모습이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 오늘 여기 무슨 일이 있구나. 캐나다의 날 이벤트가 아직도 있나?'
어디로 가야 하나 지도를 열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대형 쇼핑몰 데쟈르댕(Complexe Desjardins)이 있기에 일단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사람들 많은 곳에 가보면 뭔지 알겠지.
큰길을 따라 걷다 골목 두어 곳 지나자마자 차를 막은 도로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있는 것이 아닌가. 어리둥절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교통경찰 머리 위에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깃발 하나를 볼 수 있었다.
FESTIVAL INTERNATIONAL de JAZZ de Montreal (몬트리올 국제 재즈 페스티벌)
입구에서 나눠준 팸플릿을 받아 보니 세계 최대 규모의 재즈 축제, 40년 넘는 역사의 '몬트리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라고 한다. 공원을 끼고 있는 도로까지 통째로 막아서 만든 여러 야외무대와 주변 실내 공연장들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10일간 벌어지는 이 축제는 입장, 야외 공연 및 여러 가지를 다 무료로 즐길 수 있다. 실내공연 몇몇은 유료공연이었는데 유명한 팀의 공연인지 들어가 볼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줄이 엄청 길다. 아... 이걸 챙겨서 오는 사람들은 티켓을 굉장히 어렵게 구해서 오는 곳이겠네.
기업 홍보용 체험 행사 부스에도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는데, 세은이가 게임을 해서 선물도 받아내기도 했다. 세은이는 특히 한국식 코인 노래방 기계가 여기에 있다며 깜짝 놀라기도 했다. (한국 노래는 없었지만)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주변을 돌아보니 여기저기 공연과 이벤트가 정말 많이 진행 중이고,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따로 마련돼 있었다.
음식 노점에 줄이 너무 길어서 뭘 먹을 생각이 안 들었던 것 말고는 정말 잘 준비된 행사라는 인상이었다.
쇼핑몰과 호텔로 둘러싸인 중앙 마당에 설치된 메인 무대 격인 'Scene Rio Tinto(=후원사 이름)'에서는 프랑스 출신 싱어송라이터 'Adi Oasis'가 공연 중이었다.
몽환적인 사운드로 노래하는 그녀는 직접 베이스를 연주하는 솔로 싱어송라이터인데 굉장히 희귀한 아티스트 같다. ‘정통 재즈’는 아니어도 다채롭고 감각적인 무대다. 인기도 많은지 관객도 엄청 많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나중에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름을 적어두었다. 그래도 젊은 시절 한때 '쌈싸페' 같은 공연을 쫓아다니던 한국 40대 아저씨는 이 느낌이 너무 오랜만이고 모든 것이 다시 새롭다.
7월인데도 해가 지자 은근히 쌀쌀하다. 하지만 축제는 밤이 되어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한다. 점점 사람들은 몰려들고, 음악은 더욱 강렬해진다.
축제장의 가장 큰 무대인 Scene TD로 옮겼는데, LA에서 온 색소폰 연주자 'Kamasi Washington'의 밴드가 그야말로 무대를 불태우고 있었다.
세션 연주자들 모두가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듯, 미친 듯이 연주를 즐기고 있음이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재즈지.' 밤이 늦도록 이 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모든 공연은 거의 자정이 다 되어 끝났는데, 뉴욕시티와는 다르게, 몬트리올은 돌아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거리의 모든 사람 모두가 좋은 꿈이라도 꾼 듯, 음악의 여운 속에서 흥겹게 돌아가는 분위기다.
계획에 없던, 몬트리올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축제. 이 밤은 오랫동안 선물처럼 기억될 것 같다.
캐나다 최고의 대학 "McGill 대학교" &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 "E. Rutherford"
재즈 페스티벌의 감동이 아직 가시지 않은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일정은 대학교 구경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와서 이미 여러 대학들을 여행 삼아 돌아보곤 했다. 꼭 세은이의 유학을 염두에 두어서는 아니고(그걸 원하지도 않아 보이고), 대학 캠퍼스가 대개는 큰 준비하지 않고도 무난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
학교는 보통 치안 걱정 안 해도 되고, 카페도 있고, 공원처럼 열린 분위기, 젊은 학생들의 활기까지 더해지니 산책하듯 다니기에 딱 좋은 곳이다.
몬트리올에는 ‘캐나다의 하버드’라 불리는 명문, 맥길 대학교(McGill University)가 있는데 다운타운 캠퍼스(Downtown Campus)가 시내 한복판,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도심 산책 삼아 들르기로 했다.
시내 대로변을 걷다 보면, 마치 그리스 신전 입구처럼 생긴 석조문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생각보다 아담한 크기의 이 정문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시계가 하나 걸려 있고, ‘McGill’이라는 학교 이름과 함께 기증자인 Thomas Roddick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Roddick Gate)
문을 지나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잔디밭이 펼쳐지며 마치 공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잔디밭 한쪽에는 16세기 캐나다를 발견한 최초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의 초기 정착지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캐나다의 시작을 기억하는 작은 상징적인 장소다.
잔디밭이 끝나는 곳 정면엔 멀리서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양식의 건물이 있는데, 맥길 대학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대학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 앞에는 꽃으로 만들어 둔 맥길대학 휘장이 있어서 바로 뒤 예술 대학 조화가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니 최근에 이 건물에서 큰 시위가 있었는지, 기둥에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듯한 페인트 낙서 흔적이 보인다. 여기는 학교니까 학생들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역사적 건물의 상처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여느 오래된 학교들이 다 그렇듯, 도심에 자리한 캠퍼스는 공간이 작고, 외곽에 별도의 캠퍼스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맥길 대학의 다운타운 캠퍼스도 그렇게 넓지 않아서 금세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덕분에 학교 투어가 지루한 세은이는 좋아하고 엄마는 좀 아쉬워한다.
일요일이라 박물관과 서점(=기념품점)도 문을 닫아서 이대로 나가려던 찰나, 낯익은 이름 하나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The Ernest Rutherford Physics Building’
러더퍼드? 그 물리학 교과서에 나오는 원자 모형의 러더퍼드?
러더퍼드는 아마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는 방사능에 대한 연구로 1908년에 노벨상을 받았고 원자의 실체를 규명한 물리학자다. 그의 모델은 100년도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후학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자주 언급된다. 그런데 이 이름이 왜 여기 몬트리올에?
바로 구글에서 찾아보니, 러더퍼드는 영국에서 연구를 하다 캐나다로 건너와 맥길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연구했던 업적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던 것.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 물리학과 건물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 건물에 러더퍼드가 있던 것은 아니고 후대의 지은 물리학과 건물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건물 입구의 현판에는 그가 받은 기사 작위, 영국 왕립학회 펠로우, 노벨상 수상 경력, 그리고 맥길 재직 당시의 직위까지 새겨져 있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인물의 발자취를 직접 밟게 되다니, 뜻밖의 만남이 꽤 인상 깊었다. 역사 조각 하나를 직접 밟고 온 기분이 든다.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Roddick Gate를 나선다.
- 러더퍼드는 뉴질랜드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영국에서 유학했으며 캐나다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연구소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낸다. 그 당시는 그 모든 식민지가 전부 영국일 테니 영국인 러더퍼드에겐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는 사후에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등이 있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과학자 묘지에 묻혔다.
- 원자 모델은 톰슨(J. Thompson)->러더퍼드-> 아들 보어(Niels Bohr)의 순으로 진화하였는데, 놀랍게도 톰슨은 러더퍼드를, 러더퍼드는 보어를 직접 연구 지도한 3대에 걸친 사제지간이다. 이 엄청난 연구그룹인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 UK)는 연구소장에 톰슨, 러더퍼드 등이 역임하였고 그들의 지도를 받은 디랙(Dirac)과 아들 브래그(William Bragg)와 같은 걸출한 제자들이 배출되어 노벨상도 다수 수상한다. 그야말로 현대 물리학의 태동을 이끌었던 곳이다.
- 러더퍼드의 외동딸 에일린은 랄프 포울러(Ralph Fowler)라는 물리학자와 결혼했는데 플래시 메모리에 응용하는 물리현상을 설명하는 FN(Fowler-Nordheim) Tunneling 모델의 그 포울러가 러더퍼드의 사위인 것이다. 훗날 랄프 포울러 역시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이 되고 먼 훗날 그들의 손녀인 Christine Mary Rutherford Fowler는 캠브리지 대학 다윈 컬리지 학장에 오른다.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엄청난 인물 관계도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다.
Mont Royal과 몬트리올 시내
몬트리올은 광주광역시 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서울 남산 정도 높이의 산인 몽 루얄(Mont Royal, 233m)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온 탐험가 자크 까르띠에가 '왕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 산의 이름을 붙였고 정착민들은 그 주변으로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을 이름의 발음과 표기가 변형되어 현재는 그 도시를 몬트리올(Montreal)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렇다. 캐나다 제2의 대도시 몬트리올은 몽 루얄 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 루얄 산 정상 전망대에 가면 몬트리올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고 산 정상 대형 십자가를 보러 가기도 한다. 1차 대전 종전을 기념하여 세운 이 십자가는 100년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지만 밤에 붉게 빛나는 모습이 마치 서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교회의 모습과 흡사하여 조금 당황스럽다.
몽 루얄은 단지 몬트리올 뿐 아니라 캐나다 전체 역사에 중요한 곳이기에 때문에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몬트리올에서는 건축법상 몽 루얄보다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높이가 서울 63 빌딩과 비슷하니 몬트리올에는 6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은 거의 없는 셈이다.
이렇게 개발 제한된 일반 시내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서울 옛날 동네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익숙함이 반갑기도 하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만나는 한국 느낌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곳 건축문화의 또 한 가지 모습으로,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선형 외벽 계단의 2층 벽돌집(Duplex)은 몬트리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인데 서울의 '빌라'나 '맨션'같은 느낌을 준다.
뭔가 살짝 미국, 유럽 느낌에 한국 감성까지 섞인 것 같은 모습을 한 몬트리올 시내.
시내 박물관 앞길에 벚꽃 전시물을 설치한 곳이 있었는데, 세은이가 무척 좋아했다. 재즈부터 미술까지 곳곳에 예술적 감각까지 느낄 수 있는 참으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올드 몬트리올 - Old Port와 과학관
쌩로렝(St. Lawrence) 강변의 올드 몬트리올 지역은 프랑스 정착민들이 처음 도시를 세운 곳으로, 지금은 몬트리올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어있다. 서울의 종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몬트리올 일상 시내와는 달리 이곳은 오래된 유럽 분위기의 건물 및 거리 풍경이 인상적이다.
그중에 몬트리올 섬의 동쪽에 있는 올드 포트(Old Port)는 쌩로렝강에 자리 잡은 항구로 몇 개의 부두가 설치된 제법 규모를 갖춘 곳으로 다른 섬들을 연결하는 페리 항구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에게 올드 포트는 단순한 항구 그 이상이다. 유원지 같은 활기찬 분위기로 작은 놀이공원과 번지 점프장도 있고, 퀘벡이 고향인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공연장, 여러 박물관, 그리고 오래된 시장들이 이 근처에 모여 있다. 올드 포트에 서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면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를 위해 지은 독특한 모습의 아파트, 'Habitat 67'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올드 포트 수많은 볼거리 중에 세은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몬트리올 사이언스 센터(Montreal Science Centre)를 찾았다. 부두 위 건물 중 유달리 눈의 띄는 이 과학관은 입구엔 거대한 분자 모형 조형물까지 두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주차 공간도 넉넉해서 이곳에 차를 세우고 나서 올드 몬트리올 거리로 구경 다니기에 매우 편리한 곳이다.
사이언스 센터에서는 세은이와 내가 직접 배, 자동차 모형을 만들어 경주도 해 보고, 전기와 관련된 게임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도 과학 박물관은 많이 다녀봤지만, 이곳의 전시 구성이 알차고 관리도 잘 되어 있어 세은이가 비교적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아침에 대학교 가서 아빠에게 들었던 '무슨 노벨상 할아버지' 얘기는 조금 지루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재밌는 과학실험하면서 잊었던 여행의 활기를 되찾은 것 같다.
올드 몬트리올 - 자크 까르띠에 광장과 넬슨 기념비 : 역사의 아이러니
올드 포트 맞은편에 있는 언덕 위쪽으로 다다르면,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Basilica)과 몬트리올 시청(Hotel de Ville) 같이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올드 몬트리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발길 닿는 대로 예쁘고 아기자기한 골목길들을 다니다 보면 퀘벡시티의 골목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곳만의 고즈넉한 매력도 느낄 수 있다.
예쁜 가게들이 많은 생 폴 거리(Rue St. Paul)도 좋고 관광객들을 반겨주는 꽃으로 꾸며진 아치도 예쁘다. 붉은 벽돌 건물과 울퉁불퉁한 자갈길은 마치 오래된 유럽의 작은 도시가 이곳에 옮겨져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올드 몬트리올의 중심이라면 시청 맞은편에 있는 자크 카르티에 광장(Place Jacques-Cartier)이라고 할 수 있겠다. 캐나다를 세운 옛 선조의 이름을 딴 이 광장은 뒤편으로 뾰족하게 솟은 지붕의 시청과 잘 어울려서 몬트리올 역사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 같다.
언덕 비탈에 만들어진 광장 주변엔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이어져있고 작은 식당,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있기에 우리는 이곳에서 한참을 머무르면서,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 먹고, 기념품도 사고, 스쳐가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광장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북적임마저도 어쩐지 여유롭다.
이 광장에는 한 가지 오묘하게 불편한 것이 있었는데, 광장 한복판에 세워진 커다란 기념탑, 넬슨 기념비(Nelson Monument)다.
이 기념비의 주인공,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은 19세기 초 스페인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상대로 영국 해군의 승리를 이끈 해군 제독이다. 중요한 승리를 이끈 전투에서 정작 본인은 총을 맞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영국의 이순신'이라고도 알고 있기도 하다.
이 기념비에는 그의 업적이 벽면에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건 좀 이상하다. 넬슨의 업적이 그러하다면, 이 기념비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퀘벡의 중심인 몬트리올 시청 앞 광장 한복판에, '영국의 승리 = 프랑스의 대패'를 기념물을 세운다? 그것도 영국이 퀘벡을 식민지로 한지 50년도 채 지나지 않은, 한 세대가 지나지 바뀌지 않은 시점에?
기념비에 쓰인 것을 읽어보면 몬트리올 넬슨 기념탑은 1809년에 세웠다는데 넬슨 사망이 1805년, 불과 4년 후에 이 탑을 완공한 것이다. 사실상 넬슨이 사망하자마자 추진하여 건설한 셈이다. 심지어 이건 영국의 런던 트라팔가 광장보다 무려 30년이나 먼저였다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아무래도 당시 퀘벡 점령자 영국인들이 기존 주민인 프랑스계 사람들을 압박하고 '계몽'시키려 했음이 은연중에 읽히는 부분이다.
이 기념탑은 존재 자체로 퀘벡 사람들에게 폭력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넬슨 기념탑은 많은 갈등의 상징이 되었다 하고 프랑스계와 영국계 이주민 간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는 수차례 파괴 위협을 받기도 했다고도 한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이 기념비를 세운 자들의 의도가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런 짓은 조선 왕조에 굴욕을 주기 위해 광화문 안에 조선총독부를 세웠던 일이나,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떠올리게 해서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에서 자주국으로 된 후에, 넬슨 기념비 철거와 같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를 전혀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캐나다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풀어간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승리의 상징이자, 누군가에게는 굴욕의 상징인 넬슨 기념비가 세워진 지 약 130년이 지난 뒤, 광장에서 100m쯤 떨어진 시청 옆에는 프랑스 해군 장군의 동상이 하나 세워졌다. 쟝 보클랭(Jean Vauquelin)은 인디언-프렌치 전쟁에서 영국군에 맞서 싸운 프랑스 해군 영웅으로, 그의 동상은 언덕 아래에 있는 넬슨 기념탑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 있다. 퀘벡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려는 듯한 배치다. 캐나다는 이것으로 역사적 긴장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것 같다.
돌아오는 길 : 면세점과 검문소
몬트리올은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왔던 곳이지만 뜻밖의 즐거움을 만나게 되어 많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가보지 않은 여러 것들을 아쉬워하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언젠가 다시 오기를 아내와 다짐하고 몬트리올을 떠난다.
이제는 뉴욕 알바니,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남쪽으로 세 시간, 운전대를 잡는다.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 캐나다 쪽에 있는 면세점에 들러봤다. 큰 공항 면세점처럼 대단하지는 않아도 생각보다는 규모 있는 것 같다.
공항 면세점이 아니라 쇼핑을 하는데 비행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뭔가 어색하기도 한데 세은이는 오래 있기 싫다며 엄마에게 계속 눈치를 준다. 엄마는 냉장고 자석과 사슴 인형을 하나 사서 다시 차에 오른다.
캐나다를 육로로 여행했을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미국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온갖 서류를 준비해서 출발했던 것은 미국으로 재입국, 집으로 무사히 오는 것이 제일 걱정되어서였다.
검문소에 도착해서 캐나다에 입국할 때와 비슷하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창문을 열어 탑승자를 확인시켜 주고, 여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 관광객이 아니고 거주 비자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내가 먼저 설명한다. 아내는 대시보드에 있는 서류들을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준비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미국 심사관은 "What's your status?"라고 묻는다. 나의 비자, 체류 자격을 묻는 질문이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status'를 'state'로 잘 못 들어서 "New York State"라고 답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외국인이니 심사관은 내가 알아듣기 쉽게 다시 물어준다.
"Thank you officer, I'm holding L1 and for my wife and daughter, L2."
한국에서 왜 왔는지 미국에선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묻기도 했는데, 그런 건 도서관에서 매주 자기소개하던 것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자동으로 답변이 된다.
심사관은 별 이상이 없으니 나에게 여권을 넘겨주며 "Welcome back to the US." 란다. 통과다. 휴.
이제 정말 집으로 간다. 그렇게 되돌아온 미국 고속도로 I-87의 입구에서는 뉴욕주의 웰컴 사인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