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5 (1/8) November 2022
(커버 이미지 : Death Valley 국립공원 서쪽 입구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Lone Pine, CA' 풍경.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하얀 산, Mt. Whitney는 4,421m 높이로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다. 학교나 직장에서나 대개는 '목, 금요일' 이틀을 모두 쉬기 때문에 다들 멀리 휴가를 떠난다. 작년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집에서 미국기준으로 멀지 않은, 그래서 운전은 7시간이나 해야 했던 워싱턴 DC를 다녀왔는데, 이번엔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아주 먼 곳 서부로 간다.
동부 사람들에게 서부는 사실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다. 뉴욕에서 LA는 비행기로 6시간, 서울에서 방콕 정도의 거리이고 기후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니 뉴욕 사는 사람이 서부에 여행 가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주요 자연 볼거리인 국립공원들, 그중에 유명한 곳들은 주로 서부에 몰려있기 때문에 내년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는 무리를 해서라도 서부로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서부의 도시들도 물론 궁금하기도 했고.
멀리 가는 만큼 긴 여행을 위해 주말만이 아니고 추수감사절이 있는 한 주를 통째로 휴가 내고 9일간의 여정을 준비했다.
이번 여행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다.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금문교를 볼 생각이고 다음날엔 스탠퍼드 대학과 구글 본사가 있는 산호세를 거쳐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으로 이동한다.
그다음엔 세은이가 미국에서 꼭 가고 싶어 했던 곳인 사막을 볼 수 있는 데쓰밸리 국립공원을 들렀다가 라스베이거스로 간다. 여기까지 운전은 대략 760 mile(=1,200 km). 상당히 먼 운전을 해야 한다.
아내는 여기까지 왔으니 그랜드 캐년도 보고 가고 싶다며,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하는 한인 가이드 투어 관광을 해보자고 한다. 1박 2일 일정으로 애리조나와 유타에 있는 캐년을 보는데, 항상 우리 힘으로만 모든 것을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가이드 투어를 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이것도 예약을 마쳤다.
그렇게 캐년 투어까지 끝 마치면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와 비행기를 타고 뉴저지 뉴왁 공항으로 도착하면 이번 여행의 모든 여정은 마무리된다.
서부로 가는 길이 호락호락할 줄 알았니?
회사일을 마치고 금요일 저녁에 뉴저지에 있는 뉴왁 공항(Newark Airport, NYC 주변 주요 3개 공항중 하나)으로 출발해서 밤 비행기를 탄다. LA 여행 갔을 때 이미 한번 경험해 봤던 거라 뉴왁 공항까지 가는 길, 장기 주차 맡기는 법, 티켓팅 등등이 그렇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특히 사설 주차장에서 카운터 보고 있는 문신 많은 젊은 친구와는 이제는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친숙해졌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 까지 비행시간은 6시간 40분 정도, 저녁 8시 30분에 출발해서 자정 조금 넘어서 도착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만 찾아서 곧바로 호텔 가서 자는 게 계획이다. 도착해서 피곤하면 안 되니까 비행기에서 억지로 눈을 좀 붙여야겠다. 돈을 아끼려면 몸이 고생하는 수 밖에는 없다.
이코노미석 6시간이 넘는 불편함을 잘 이겨내니 어느새 샌프란시스코의 야경을 보게 되고 이윽고 공항에 내렸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다. 짐을 얼른 찾아서 트램을 타고 렌터카를 찾으러 이동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순조롭다. 지금 샌프란시스코는 자정이지만 뉴욕은 새벽 3시인데 시차적응이 안 된 내 몸은, 아침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깨어있는 셈이라 너무나도 피곤하다. 호텔까지 무사히 운전해야 하는데... 피곤한데 밤운전까지 해야 하니 내심 걱정이 된다. 그래도 아내와 세은이에겐 그런 내색하면 안 되지.
트램에서 내려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분위기가 뭔가 좀 이상하다. 사무실은 열려있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응?! 분명히 예약했는데?
여기 사무실은 마지막 비행기 손님들이 차를 다 찾아가기 전에 퇴근해 버린 것 같다. 옐로우스톤에 갔을 때처럼 사람 없어도 'Pick and Go'로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봤더니 시동은 걸리고 운전도 되는데 주차장 출구는 잠겨있다. 결국 직원이 없으면 차를 꺼낼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마자 저절로 입에서 한탄이 튀어나온다. "아 망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 지금 이 시간에 차가 없다. 마지막 비행기를 기다리지 않는 렌트 회사라니.
'전화해서 직원 와달라고 해? 안 오면 어떡하지? 언제까지 기다려? 그럼 취소해? 환불은 어떻게 받아? 공항으로 다시 돌아가? 호텔 체크인 지금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 세은이는 칭얼대고 마누라는 나만 쳐다보고 있다. 지금은 상의할 수 있는 곳도 고민할 시간도 없다. 내가 바로 지금 결정해야 한다.
이런 순간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건 다름 아닌 '돈'이다.
"우버를 불러서 일단 호텔로 가자. 여기서 더 이상 체력을 낭비하지 말아. 누가 와서 문을 열어준다 한들 그게 언제일지도 모르고 안 올 수도 있고... 돈은 나중에 생각하고 당장 여기서 벗어나자.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짜로 위험해져."
우리는 그렇게 공항 렌터카 사무실에서 거의 1시간을 허비하고 나서야, 우버를 타고 간신히 호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와 세수만 했는데도 세은이는 이미 자고 있다. 예상밖의 고생을 해서 나 역시 말 그대로 심신이 녹아내릴 것 같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이 편해지니 그제야 렌터카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머릿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장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억지로 눈을 감은 채로 한참을 누워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여행에 화창한 햇살이
다음날 일어나 보니 기분 좋은 문자가 와 있었다. 내가 시간 내에 도착하지 않아 렌터카 예약이 자동으로 취소되었고 카드 결제도 당연히 취소된다는 내용이었다. '오호. 안 그래도 전화할 생각에 골이 아팠는데 먼저 취소해 주니 그저 감사할 따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오늘의 일정을 확인한다. 여행 경로를 보니 렌터카 픽업 장소가 여행지 주변에도 있어서 공항으로 갈 필요 없이 그쪽으로 예약을 새로 했다. 큰 짐은 호텔에서 체크아웃 후에도 맡아준다 하여 우버 타고 여행하다가, 렌터카를 찾아서 호텔로 와서 짐을 찾아가면 된다. 따져보면 어제 그 난리를 친 것에 비해 돈 손해 본 게 별로 없다.
고난이 좀 있었지만, 우버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들어가는 우리의 앞길에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주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가볍고 화창하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Wild Wild West 여행을 시작하자.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