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022
(커버 이미지 : 우리 동네 공립 도서관 CPH Library. 'Clifton Park'과 'Halfmoon' 두 마을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운영하는 도서관이어서 근방의 다른 도서관들에 비해 규모도 크고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ELL 초급반과 고급반
나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주었던 시민권 수업이 끝남을 아쉬워하며 지내던 차에, Alison에게서 9월부터는 ELL(English Language Learner, 외국인 대상 영어 수업을 의미) 영어회화 고급반이 열린다는 메일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 평일 저녁 수업이라 회사 끝나고 오면 되니 시간 부담은 없다. 무조건 해야지.
도서관에서 하는 모든 수업이 무료인 데다 시민권 수업을 통해 이미 알고 지내는 Owen과 Judy 말고도 새로운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평일 오전 초급반을 듣고 있는 아내에게 혹시나 해서 고급반에 나와 같이 가겠느냐 물었더니 아줌마들과 지내는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지 말란다.
아내가 다니는 초급반 수업, '평일 오전'이라는 시간 자체는 남편 따라 이민 온 아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숨은 의미가 있다.
나는 꼭 '아내'라고 지칭하여 남녀를 차별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한 도서관에서도 수업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ELL 초급반 학생 전원이 각 나라에서 온 중년의 엄마들이다.
직장 또는 학교를 다니지 않으며 미국 내 사회생활이 전혀 없는 계층은 이민자 가족의 아이 엄마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니 평일 오전에 시간이 자유로운 사람은 아이 엄마들 뿐이다.
그래서 이 수업은 단지 영어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엄마들에겐 나름의 사회생활을 하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하나뿐인 해방구가 된다.
이민 가정에서 '엄마' 또는 '아내'가 이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건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 구조적 원인이 큰 것 같다. (한국으로 온 이민자들도 마찬가지 처지 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우리 도서관은 이 수업을 운영하는 것을 통해 단지 영어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이민자 엄마들을 집 밖으로 불러내어 정착을 돕고 있다. 그러니 나처럼 직장 다니는 아저씨는 이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고급반 수업은 평일 저녁이라서 직장 또는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주로 오는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제일 영어를 못하면 어떡하나, 남들 수업하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으려나 하는 걱정도 한다. 미국에 온 지 1년이 훨씬 지났지만 미리 준비 없이 길게 말하는 건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가보기로 했다. 도서관에서는 영어 못한다고 쫓아내지는 않으니까.
수업 설명엔 가벼운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라고 되어 있으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미국 도서관은 외국인들에게 오픈되어 있는 곳이니 편하게 생각하자.
그렇게 나는 매주 두 시간씩 열서너 명 남짓의 각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 그리고 자원봉사 선생님들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수업이라기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의 Conversation Club
매주 월요일 저녁에 도서관 1층 대회의실로 가면 수업 코디네이터 Alison과 자원봉사 ELL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명찰을 달고 마주 볼 수 있게 둥글게 둘러앉아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도서관 수업은 말 그대로 'Free Class'다 보니 학생들 출석이 들쑥날쑥하다 보니 몇 명을 빼고는 들고 나는 사람이 매주 있기 때문에 자기소개도 매주 해야 한다. 자기소개도 매주 하니까 매주 조금씩 좋아진다.
학생들 사이사이에는 네다섯 명 남짓의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자리하고 있다. 선생님들도 매주 자기소개를 하는데 경찰, 학교, SSA 사무소(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우리로 치면 동사무소)등 에서 일하고 은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기소개가 끝나면 선생님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맡는 그 주의 수업 호스트가 액티비티를 진행한다. 스무고개나 '시장에 가면' 같이 말로 하는 게임을 할 때도 있고 ELL 학생을 위한 뉴스(https://www.newsforyouonline.com/)를 함께 읽어 보기도 한다. 학교 선생님 출신들은 글짓기 수업을 준비해 올 때도 있다. 대체로 딱딱하지 않으며 준비된 아이템을 하다가도 상황에 따라 부담 없이 자유로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강제성이 없고 일관된 내용이 아니어서 학습의 관점이라면 부족함이 있지만, 애초에 이 수업의 목적이 이민자들이 현지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니 충분히 만족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ELL수업. 비슷하지만 제각각 다른 이민자들의 모습.
새로운 이민자들의 소개를 듣는 건 늘 흥미롭다. 사람들이 왜, 어떻게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지, 여기에 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왜 도서관에 나오게 되었는지 등 저마다 다른 사연이 있다.
이 자리엔 나 같이 잠시 다녀가는 뜨내기 주재원도 있지만 표정에서부터 절박함이 느껴지는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난민들도 적지 않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ELL 수업에 오고 갔는데 매주 꾸준히 출석하며 보니 수업에 오는 사람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몇 가지 부류로 나뉘는 것 같았다.
- 우등생 : 영어를 잘하는 편이고 미국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있어서 소통에 무리가 없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미국에서 살았던 기간 자체와는 무관하며 교육 수준이 높고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해본 사람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일단 시도하면 결과가 좋으니 매사에 긍정적이다. 수업이 재밌으니 출석률도 높고 습득과 이해가 빠른 편이다. 벨라루스에서 온 Maria, 폴란드 출신의 Mary 그리고 나는 매주 출석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선생님들과도 좋은 관계로 지냈다.
- 이민 1세대 : 스스로 준비해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이기는 해도, 영어를 배우지 못하고 오랜 시간 자국민 커뮤니티 속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다. 미국에 살지만 영어는 거의 쓰지 않고 모국어로 살아남아 왔기 때문에 언어뿐만 아니라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편이다. 영어 때문에 서러움을 겪은 경험이 많아서 방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도서관에 나와서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엄청 깨어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중국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수업을 진행하는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꼭 받아야 했지만 꾸준히 출석했기 때문에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 난민들 : 전쟁으로 인해 준비 없이 미국으로 오게 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아프가니스탄과 우크라이나 사람들 중에는 영어를 아예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나마 더듬더듬 소통이 되는 사람이 도움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Nick은 난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 자신도 영어를 잘하지 않아 배울 것이 많은 상태인데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았다. 만약 혼자 수업을 나왔다면 나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한두 달 지나고 나서는 더 이상 도서관에 오지 않았다. 난민들에게는 이런 수업마저도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에 보통 출석률이 좋지 않고 그래서 영어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도서관에서는 그들을 위해 1:1 진짜 기초 영어과외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들 중의 일부는 영어로 자신의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 그 외 스쳐간 사람들 : 수업이 무료이고 강제성이 없다 보니 한 두 번 구경만 하고 다시 오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주 대상인 직장 다니는 어른들은 시간도 부족하고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수업에 흥미를 잃고 금세 떠나는 사람들은 영어 실력과는 무관했다. 영어를 못하는 경우엔,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말을 시켜도 대답을 잘하지도 않고 조용히 있다가 다음 시간부터 안 나오곤 했다. 반면 영어를 잘하는 경우엔, 도서관 수업이 직접적인 학습이 아니고 액티비티 위주라서 시시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말은 유창하지만 선생님들이 의도하는 방향 묘하게 벗어나려고 하고 협조적이지 않은 느낌이 든다. 어느 경우든 도서관의 무료 수업에서 개인이 원하는 100%를 채워주기 어렵다는 걸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Alison이 참 고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부와 더불어 자원봉사는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상부상조 문화를 대표한다. 수업 내내 학생들을 도와주는 자원봉사 선생님들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이 없다면 도서관의 교육 프로그램 대부분은 운영이 불가능할 것이다.
도서관 자원봉사는 수당이나 기타 경제적인 이득을 받을 수 없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지원한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게다가 교육 자원봉사를 지원하는 사람은 신청한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니라 도서관 직원에게 면접도 봐야 하고 일정 시간 교육까지 받아야 투입될 수 있다고 한다.
이민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하고 급여를 받지 않으면서도 남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하니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이뤄놓은 은퇴자들이 주로 하게 되는 것 같다. (봉사 시간 확보를 위해 고등학생들이 자원봉사로 오는 경우도 가끔 있긴 했다.)
선생님들은 자기 인생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 욕심이나 조급함이 없고 영어를 못해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함을 보여주는 분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젊은 이민자들을 미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 봐주는 그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잘못이 없어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이민자에겐 어찌 보면 영어 실력보다는 그런 포근함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이런 모임에 속해있다는 것이 행운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는 시민권 수업 못지않게 ELL 수업에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전 보상을 받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은 보람과 명예가 중요한 법이다. 그들의 의도한 대로 따라주고 선생님들의 노력이 이민자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 몸소 느끼도록 행동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가르치는 사람도 신이 나서 도서관으로 올 것 아니겠는가.
난 그것이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하고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다.
"영어를 알려줄 미국 친구 구해요."에서 계속
(잘 찾아보면 도서관 외에도 이민자를 위한 여러 형태의 영어 학습 프로그램이 있다. YMCA 같은 곳에서는 이민자의 취업을 돕기 위한 목적의 무료 영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철저한 주입식 반복 교육을 통해 이민자들이 마트 같은 곳에서 바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분위기가 딱딱하고 학원 같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도서관처럼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는 아니라고 한다. 알바니에는 오래된 한인 식당 Sunhee's Kitchen에서도 주 1회의 무료 영어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는데, 필요와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아가면 되겠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