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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가짜 이민자' 미국 주재원의 변명

August 2022

by Clifton Parker

(커버 이미지 : 피겨스케이팅을 배우고 있는 세은이와 한국 아이들. 아이스링크는 동네의 아이들이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장소였다. 엄마들이 한국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Marginal Man (주변인, 경계인) : 복수의 이질적인 문화적 상황에 놓이게 되어 어느 한쪽으로 완전하게 동화되지 못하는 사람


그렇게 된 데에는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다.


주재원이라는 형태의 임시 파견 근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모습일 것이다. 나 역시 경험하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재원의 특징이라면 한국을 떠나서 낯선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미국에선 임시 파견직이더라도 한국 원래 소속으로 복귀가 '보장'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해고의 위험을 제거한 안정된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 현지 일반 직장인과 큰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주재원들 본인 및 가족이 자신을 둘러싼 미국 사회를 살아가는 방향에 크게 영향을 주고 때로는 사람들과 오해를 빚게 되는 원인이 된다. 나중에 돌아보면 아쉬운 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었다. 어쨌든 사람들과 오해를 줄이고 좋은 이웃/동료로 남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현지 직원과 미국 회사 동료들, 그리고 주재원. 각자의 입장

미국 회사 생활이 1년쯤 되어가니 사람들 또는 부서 각각이 갖고 있는 입장 차이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국 본사와 파트너 회사는 뉴욕 Malta에서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십수 년째 진행하고 있다. 규모는 작아도 이 업계에서 역사가 깊은 미국 파트너는 현지 시설 및 장비 사용과 노하우를 제공하고 한국 본사는 운영 비용을 대고 연구 방향을 결정하며 주재원들을 선발해서 파견하고 있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칼자루는 한국 본사가 갖고 있다. 왜? 회사끼리의 관계도 돈을 내는 쪽이 형님이라서 그렇다.

주재원들은 평소에 파트너들과 일을 하고, 매주 현지 관리자인 Jason에게 검토를 받아서, 한국 본사 담당자에게 보고하는 흐름으로 업무를 하게 돼있는데, 이 과정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각자만의 사정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1) 주재원들은 과제의 전체기간 보다 자신이 미국으로 파견된 기간이 짧아서 과제의 완성이나 미래를 바라보고 일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주재원들의 진짜 커리어는 한국에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평판보다는 미국 주재원으로 선발되었다는 사실 자체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미 목표는 달성된 것이라서 추가로 성과를 내서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없고, 한국으로 복귀하고 나면 아무도 미국에서의 일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게다가 주재원들은 회사 일뿐 아니라 가족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이 매우 많기 때문에 한국에서 처럼 업무에 전념하기는 어렵다.
--> '내 코가 석자예요. 전 어차피 여기 2년만 있다가 한국 가는 거잖아요.'


(2) 한국 본사의 담당자들은 미국 현지 사정은 아랑곳없이 본사 기준으로만 생각하려는 태도가 강했다. 고작 50명도 안 되는 미국 연구팀의 '시제품' 결과는 본사의 '양산 수준'에서 볼 때 매우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 실무자들과의 미팅 시간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타박만 하는 자리가 되기 일쑤였다. 한국에선 주재원이 놀러 가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놀겠다는 주재원도 있었다. 아쉽게도 내가 본 사람 중에 주재원 업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본사 실무 담당자는 거의 없었다.

--> '돈 써서 미국 보냈더니 고작 이 딴 거나 하면서 처 놀고 있네.'


(3) 주재원의 원래 소속팀에서는, 주재원들이 복귀하고 나면 더 이상 미국에서 하던 일에 연관되지 않기를 바란다. 원소속 팀의 업무는 미국 연구소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복귀하고 나면 주재원때 하던 일과 전혀 상관없는 업무로 배정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본사 미팅에, 미국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최근 복귀자가 참석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개발 업무가 연속성 있게 진행되기는 어려웠다. 본사 임원들이 그런 걸 모를리는 없다.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대여 보내야 했던 우리 에이스가 더 이상 그딴 무의미한 일에 연관되지 않기를'


(4) 미국 파트너들도 직/간접적으로 이런 상황을 읽고 있기 때문에 주재원들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기도 했다. 자기들 수준만큼 영어도 안돼, 장비 셋업도 몰라, 기껏 노력해서 같이 일 할 만 정도가 되면 한국으로 가버려... 그리고 또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면 모든 것이 리셋되어 버리니, 이 회사에서 전력을 다 해 일해야 하는 파트너들이 주재원들에게 흥미를 잃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이 과제의 '돈 줄'인 한국 본사의 요청을 매우 중요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손발이 잘 맞지 않는 주재원들을 배제하고 홀로 하드캐리 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 '말도 안 통하고 어차피 잠깐 있다 가는 사람인데, 혼자 해도 될 일을 힘들게 알려주면서까지 해야 하나?'


(5) 현지 매니저 Jason은 주재원들 고과평가를 하는 사람이지만 '미국에선 2년짜리 여행자로 살다가 한국 가서 잘하면 되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조언할 것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주재원은 한국 노동법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여기서 일을 못한다고 미국 스타일로 쉽게 해고할 수는 없다. 만약 본사가 연구 계약을 종료하면 주재원은 한국으로 복귀하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관리자 역할이 아예 필요 없어지는 것이라서 누구보다도 업무 성과가 중요한 사람은 Jason 본인이다. 본사 실무자들이 무례하게 굴어도 '갑'이니 참아야 하고, 부하직원인 주재원들도 시간이 지나면 '갑'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니 이래저래 싫은 소리 하기 어려운 자리다. Jason은 미팅 시간 중에 주재원들이 본사 실무자의 무례함을 참지 못하고 언성 높이고 들이받으려는 상황을 제일 우려하는 것 같았다.

--> '애들이 일도 잘해야 하고, 사고 치면 안 되고... 최대한 아무도 화나지 않아야 해.'


그러고 보면 정말 놀랍게도 주재원들이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은 Jason 혼자 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회사 입장에서는 과제의 성공보다는 파트너 사와 제휴관계를 맺고 있다는 그 외교적 사실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모든 것이 우리에게 비협조적 일 수가 있나.


주재원들은 본사 각 팀의 에이스들만 선발한 인력이라 각자의 역량과 성실함은 검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는 것은 1차적으로 이런 외부 요인이 원인일 수밖에 없다. 잘하려고 미국까지 왔지만 자신이 원인이 아닌 것 때문에 좌절을 맛보면 잘하려던 그 마음을 포기하게도 된다. 앞서 말한 대로 '복귀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포기에 따른 손해가 크지 않으니 더 쉽게 포기한다.

그렇다고 그들의 선택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주재원이 이민 와서 가정을 유지하려면 한국보다 갑절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니까. 회사에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집에 가면 모두가 나만 바라보는 상황.

그러면 결국 위험이 적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사람 마음이다. 너무 힘이 드니까 편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얘기하지 않게 되는데 그러면 친해지지 않고 친하지 않으니 얘기하지 않고 얘기하지 않으니 친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기 쉬운데 미국인들과의 관계에서 고립됨을 깨달을 때는 이미 늦었다.

늦었으니 포기하고 포기하니 더 늦어지고... 또다시 악순환. 이길 벗어나지 못하면 회사 내에서 주재원들 바깥의 인간관계는 불가능하다.

주재원들이 흔히 입에 담는 자조적 표현 '외노자'. 우리의 생각은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각 개인의 사정은 이해가 된다. 나 역시 상황이 다를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보장된 안정'에 기대어 최소한의 것만 하고 있으면 미국에서 내가 얻는 건 없으니까. 한번 더 참고, 한번 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파트너들 수십 명을 모아놓고 했던 나의 자기소개 발표도 이런 안락함을 벗어나고 싶은 노력이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주재원과 이민자의 차이

회사에서만이 아니라, 주재원들은 일상에서도 주변에 섞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 쉽다. 미국인들과 교류가 어려운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한인 이민자 사회에서도 이질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 같이 이민 온 처지에 이게 무슨 소리인지 싶겠지만, 스스로 이민을 선택한 일반 이민자와 달리 주재원은 회사의 필요로 선택되어 보내졌기 때문에 시작부터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회사가 제공하는 월세, 보험료 및 약간의 (주로 세금 관련) 행정 지원을 받게 되는 주재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굉장히 소비적인 태도로 살게 된다. 한국에선 꼼꼼하게 따져보던 일도, 미국에선 정보도 없고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 그냥 돈을 써서 해결하는 게 가장 쉽다. 게다가 여행, 골프, 쇼핑 등 한국에 돌아가면 하기 어려운,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 있을 때 꼭 해야 하는 일도 많다. 떠나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체력이나 금전적인 무리를 감수하고 하는 일이다. 한국 가면 다시 못 올 것 같으니까.

현지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이런 주재원들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이질감이 들 수밖에 없다.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최대한 적응하며 살아야 하고 이주 과정에서 이미 많은 돈을 쓴 데다가 앞으로 어떤 미래가 있을지 모르니 소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여행도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해서 오래 살아도 자기가 살고 있는 주를 떠나 본 적이 많지 않다. 그렇게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여태 안 해본 것들이 수두룩한데 주재원들은 거침없이 하는 것만 같다. '가족 여행비도 회사가 지원해 주나요?'라는 말도 들어봤다. 비싼 여행을 그렇게 자주 자기 돈으로 다니는 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대답은 'No'다.)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가짜 이민자'. 하지만 '진짜'를 이해하고 싶어.

페이스북 한인커뮤니티의 글을 보면 한인 사회에서 주재원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인 것 같다. 뜨내기, 가짜 이민자, 도움만 받고 감사해하지 않는 사람, 항상 골프나 여행 얘기만 하고 씀씀이가 헤픈 사람, 친한 척하고선 연락 없는 사람... 이런 것이 현지 이민자들이 갖고 있는 주재원의 부정적 단면이다. 현지 사람들은 아랑곳 않고 자기가 원하는 말/행동만 하는 모습.

모든 주재원들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은 하지만 심지어 나 역시 주재원들에게 그런 일을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2년짜리 여행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런 글을 보면 억울한 마음도 있다. 나는 미국에 적응하기 위해 아등바등 대고 있는데 이게 이민이 아니라니. 그간의 모든 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도 든다.


나는 그들의 말대로 주재원은 뜨내기가 맞다고 생각한다. 이도 저도 아닌, Marginal Man, 가짜 이민자.

주재원은 완전한 정착을 할 수가 없으니 항상 어정쩡하다. 몸은 여기 있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항상 머릿속에 있다. 이삿짐을 다 풀지도 못하고 가구/가전도 부족한 채로 버티다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고 떠나게 된다. 그러니 온전한 적응이나 그 이후의 삶을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일부 주재원들이 저지르는 현지인 상식 밖의 행동은 사람이 유별나다기보다는 상황이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주재원들도 한국 돌아가면 한국 현지인이다.


비록 가짜 이민자로 시작했지만 가짜인 채로 끝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회사에서 미국 동료들에게 노력하여 친구가 된 것처럼 한국 이민자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되려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고 그 이해의 시작은 뜨내기인 주재원이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맞다. 주재원이 많은 동네에 사는 이민자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뜨내기'들을 봐 왔겠는가. 나야 이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우리 동네 한국 사람들에겐 '누군가 새로 오고, 같은 걸 물어보며 도와달라고 하고 시간 되어 떠나버리는 일'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을 거다. 이런 점을 잘 이해하고 너무 기대지 않도록 조심하자. 도움을 바라기만 하는 사람과 친구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회사에서도 동네에서도 다 마친가 지다.


각자의 선택. "나는 서 있지 않고 앞으로 가겠어. 할 수 있으니까."

따져보면 누구 하나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의 조합이 모두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주변 주재원들이 대처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비협조적인 파트너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고민 없이 쉽고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한다. 심지어 애들에게 미국 학교 공부는 필요 없다고 손 놓아버린 분도 있었다. 한국 공부 잘하면 된다고.

아내는 학교나 도서관, 아이스 링크에서 여러 한국 사람들과 인사하며 지냈는데, 소개해주어도 데면데면해하는 주재원 아내들도 많았다. 아내들도 주재원들끼리 어울리는 게 편하겠지.

각자 처한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니 내가 뭐라 할 건 없다. 누군가 갑자기 다 때려치우고 한국 가겠다고 해도 '그럴만한 일이 있겠거니'하는 게 이민 생활이다. 나는 내 갈길만 잘 정하면 된다.


나는 항상 생각했다. 어렵게 미국으로 왔는데 한국에서 살던 대로 살고, 한국에서 일하던 대로 하고, 한국 생각만 하다가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한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안전한 뒷배가 되어주었지만, 그 안락함이 지금 당장의 미국 생활을 좀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 한국에 돌아갈 때, 미국에서의 돌아봤을 때, 지금 이 시간이 가치 있게 만들고 싶다면 그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다행히도 우리를 아껴주는 이웃들이 있고 나를 관심 있게 봐주는 미국 동료들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내가 미국에서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낸 차별점이다. 남은 기간 내가 미국에서 가야 할 방향은 명확했다.


가짜로 시작했지만 진짜가 되어서 끝나야 한다.


Fondly,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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