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22
(커버 이미지 : 시민권 수업 수료식이 열린 도서관 야외 로비. 축하 말씀과 진행을 위한 단상, 수료자들을 위한 선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 도서관 수업에 대해 : 모두에게 열려있는 미국 도서관 수업
***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 친해지기 어려웠던 한국 사람들 & 다가와서 친구가 되어 준 미국 사람들
결국 끝나는 10주간의 행복했던 시간 : 도서관 시민권 수업
나는 회사 주재원들끼리 어울리는 곳에 가기보다는 도서관에서 하는 수업을 정말 열심히 했다. 현지인들과 만나는 시간은, 적어도 나에겐 골프 치러 다니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2년짜리 여행자로 한국에서 살던 방식대로 살아남기 vs. 이웃으로 미국인들 속에 적응하여 살아가기
회사가 내게 부여한 미국에서의 2년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도서관은 나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고 그 모든 혜택이 심지어 무료다.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 10주 동안 함께 했던 시민권 수업은 정말 유익했다.
- 미국의 역사, 사회 정치 제도뿐 아니라 뉴스 내용, 생활 상식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자기 나라에서 정규교육을 마치고 미국으로 온 성인 이민자는 '미국인이 상식으로 갖고 있는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 이 수업에서는 그런 미국의 상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일상 영어를 배우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업무 관련 영어만 쓰게 되니까 사용하는 표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도서관에선 일상적, 사회적 대화를 주로 나누기 때문에 여러 표현을 배울 수 있었다.
-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너그러워서 잘못된 영어를 쓰더라도 굳이 지적하는 사람은 전혀 없다. 그들의 관대함에는 감사하지만 이래서는 나의 영어는 늘지 않는다. 그런데 도서관은 배우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적극적으로 영어를 가르쳐주려고 했다.
- 20년도 넘는 이민자 선배 Damaris(스페인)와 Marko(페루)와 친구가 된 것은 상당히 마음 편한 일이었다. 나는 그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은 이민자의 희로애락을 듣는 것이 좋았다.
- 부모님 나이뻘 선생님인 Judy와 Owen은 나에게 어느덧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제든 무엇이든 물어봐도 되는 사람들이었고 만약 내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가장 먼저 연락하게 될, 진짜 '나의 선생님'이었다.
그들과 함께 했던 10주의 시간은, 낯선 땅에 난데없이 떨어진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들, 그러면서도 나 혼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의 출신을 따지거나 배척하지도 않았고 나의 이야기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도서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만큼 동네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국인 사회에서 2년짜리 여행자라는 마음으로 살아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이다.
그렇게 소중한 시민권 수업이 어느덧 10주간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치려고 하고 있었다.
수료식을 해준다고? 신문사 기자까지 온다고?
수업이 끝남을 아쉬워할 때, 수업 코디네이터 Alison이 수료식에 대해 메일을 보내왔다.
Hello!
I am writing to please get your *RSVP for the Citizenship Class Celebration on Wednesday, May 18th from 7-8PM.
Judy and Owen would like to celebrate you - the class finishers - with a ceremony, presentation of gifts, and some refreshments.
Your families are welcomed and encouraged to attend!
We want to have enough drinks and cake for everyone.
Can you please let us know by Wednesday, May 4th if you will be attending, and how many people will attend along with you?
Thank you so much for your help! =)
Ali (and Judy and Owen)
*RVSP means to respond "yes" or "no" to a party or event.
(RVSP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답장바람'이라는 뜻이다. Alison은 메일을 보낼 때 학생들이 알았으면 하는 표현을 일부러 넣어서 보내곤 했다.)
수료식? 공짜로 수업도 해주는 것도 모자라서 수료식까지 해준다고? 가족들까지 데려와서?
선물과 다과를 준비했으니 편한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와 달란다. 오전반 오후반 다 합해도 학생은 10명이 안될 텐데 수료식까지 해준다니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미안할 정도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당연히 같이 가야 한단다. 세은이에게 아빠가 미국 사람들과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단다. 하지만 세은이는 아빠 일인데 왜 자기까지 가야 하냐며 자꾸 숨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엔 엄마의 의지가 더 강한 것 같다. "너도 학교에서 아빠처럼 이렇게 할 수 있다고." 가엾은 우리 어린이는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가겠다고 한다.
Alison에게 참석 메일을 보냈더니, 회신으로 수료식에 신문사가 취재를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진 찍히는 걸 원치 않으면 알려달라며. '엥? 동네 도서관 수업 하나 끝나는 게 이게 이 정도로 큰일이 되나?'
취재를 온다는 'Times Union'은 뉴욕주 전체 10개 지역 중 알바니를 중심으로 하는 Capital Region을 대표하는 유명한 신문사다. (1856년 설립, 우리나라 독립신문보다 40년 앞섰다.) 이 정도 신문이라면 사진은커녕 이름이나 나올지 모르겠다. 취재하고도 기사로 안 나가는 것도 많을 테니 큰 기대는 말아야지.
거창하게 '수료식'이라고는 했지만 동네 도서관에서 10명 남짓 듣는 무료 수업이 끝난 것뿐이니 아마도 평소에 수업하던 2층 대회의실에서 조촐하게 하지 않으려나. 그렇게 소박하게 진행되더라도 마지막으로 다 함께 얘기 나눌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성대한 수료식, "잘 왔어. 미국에 온 것을 환영해."
회사를 다녀와서 아내와 입이 댓 발 나와 있는 세은이를 테우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내 예상과는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뭔가 으리으리하게 차려져 있다. Alison은 도서관 건물 입구에 리셉션을 차려놓고 수료생과 가족들이 앉을 수 있도록 좌석을 가져다 놓았다. 그 앞으로 연단을 가져와서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이 모든 준비가 도서관 건물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리셉션엔 방명록, 식순이 적혀있는 팸플릿, 다 같이 나눠 먹을 축하 케이크가 제대로 갖춰져 있고 수료생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표시한 세계지도도 있었다. 정말 제대로 된 기념식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준비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행사 시작 전에, 나는 Alison, Judy와 Owen에게 아내와 세은이를 소개했다. Marko의 아내, Damaris의 남편, 아이들과도 서로 인사했다. 세은이는 뭐가 부끄러운지 자꾸 도망가려고 한다. Owen의 아내인 Jean이 나를 보러 찾아왔다. "네가 걔 구나. 우리 남편이 수업 끝나고 집에 오면 너 얘기를 엄청 많이 해. 그래서 너무 궁금했어." 하얀 머리 단발머리를 한 굉장히 여성스러운 분위기의 할머니 Jean 역시도 도서관 영어수업 자원봉사 선생님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만나고 다들 반겨주니 어리둥절하지만 기분이 매우 좋다. 미국에 온 지난 1년간 누가 이렇게 우리 가족을 이런 식으로 반겨준 적이 있었던가.
자리에 앉아서 팸플릿을 펼쳐보았다. 식순엔 도서관장 Alex 그리고 선생님 Judy와 Owen의 축하사가 있었고 수료생들이 수료증과 선물을 받는 순서로 되어있다.
이윽고 Alison의 인사와 사회로 수료식이 시작되었다. 7년 전부터 시작된 이 수업은 코비드로 인해 2년간 중단되었다가 바로 이번에 재개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성대한 기념식을 하게 된 것이다.
도서관장은 현시점에서 이 수업이 가진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 본인도 캐나다 출신으로 10년 전 시민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민자로 미국에 정착하여 사는 것이나 시민권을 받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도서관은 지역 이민자의 정착에 큰 관심이 있고 우리 지역 이민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한다.
뒤에 이어진 Judy와 Owen의 축사에선 힘겨운 이민 생활을 헤치고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격려를 해주었고, 용기를 내서 도서관 수업에 참여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한다. 선생님들 본인도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배우는 점이 많기 때문에 자원봉사로 하는 이 일이 굉장히 보람된다는 얘기도 했다.
축사가 끝나고 수료생들은 한 명씩 호명되어 수료증과 선물을 받았다. Alison이 내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나가, Owen이 건네주는 기념품과 Judy의 서명이 들어간 수료증을 받아서 돌아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수료식 내내 웃음 띤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30분 남짓 진행되었던 수료식이 끝나고 다 같이 케이크를 나눠 먹으며 사람들과 한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세은이가 빨리 가자고 보채지만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쉽게 돌아설 수 없었다. 이제 수업이 끝났으니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매주 만나던 이 사람들이 없어지면 나는 다시 혼자 지내야 한다. 도서관의 다른 수업 일정은 없을까? 어떻게든 이곳에 남아있고 싶다. Owen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만간 학생들을 집에 초대하겠다고 한다. 아직 코비드를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다들 망설이고 있었는데 정말 고마웠다. 어떤 식으로든 이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특히 Owen과 Jean에게 식사 초대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수료증과 선물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미국에 와서 오롯이 내 힘으로 이룬 것들이다. Alison의 환한 웃음과 Judy의 격려, Owen의 식사초대, 이런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 온 지 거의 1년이 되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환영받은 느낌이다. 오늘 수료식에선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모두가 반기고 지난 시간을 무사히 보낸 것을 축하해 주었다. 내가 미국 뉴욕에서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그저 스쳐가는 여행자도 아니라, 내가 사는 이곳 Clifton Park, 우리 동네의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이 된다. 그것을 도서관 사람들이 만들어 주었다.
아등바등 1년 잘 견뎌냈다. 우리의 노력은 결국 이렇게 보상받았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다.
신문 기사 1면에 나온 도서관 수료식 그리고
미국 문화에서 상당히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도서관이 책을 대여해 주는 것 외에도 지역주민 대상으로 각종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는 점이다. 미국에선 도서관이 지역 문화,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우리 도서관 'CPH' Library는 그 이름대로 Clifton Park과 Halfmoon, 두 개의 인접한 town이 공동으로 세운 곳이어서 다른 지역 도서관에 비해 건물도 크고 재원도 많다. 그러기에 시민권 수업 같이 다른 도서관에서는 잘하지 못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시민권 수업 수료식은 나에게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도서관 입장에서도, 이 차별성 있는 수업이 무사히 마쳐진 것은, 코비드로부터 일상을 재개하는 'Back to Normal' 관점에서 도서관 운영의 정상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역 메인 신문사에서까지 취재를 온 게 아니었을까?
수료식이 끝나고 며칠 뒤, 문득 기자가 다녀갔던 생각이 나서 인터넷에서 도서관 이름을 검색해 보니 신문사 홈페이지에 정말로 기사가 나와 있었다. "이민자를 환영합니다 : 도서관에서 배우는 영어"
전반적인 수료식의 분위기와 오전 반 사람들의 인터뷰가 상세히 실려있었다. 대만에서 온 지 7년 된 Yulin이 겪은 미국 사회 적응기는 사실 그녀만의 얘기는 아니다. 이민자들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 기사의 마지막 줄에 실린 Alison의 한마디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전적으로 그녀의 말에 공감한다.
“I see literacy as access. It’s a fundamental, human rights issue."
(영어 문맹은 장애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이것은 이민자들의 기본 인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수료식 때 선물로 받은 미국 국기를 세은이가 한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삽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반갑고 놀라서 사진을 날름 저장하고 주변에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다. 도서관에도 알리고 DyAnn에게도 연락을 했다. Mark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우리가 신문에 나왔다고.
DyAnn은 미국에 와서 유명해진 걸 축하한다면서, "종이 신문에도 기사가 실릴 수도 있으니 신문을 사야 해. 신문은 월마트에서 팔아."라고 알려주었다.
그렇지. 신문을 사야 했다. 온라인 전용 기사일 수도 있지만 혹시 아는가? 생각해 보니 대개 신문은 배달받아서 보는 게 일반적인 것 같고 가판대에서 사서 보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월마트에 가보니 계산대 옆에서 신문($3)을 팔고 있다. 신문을 펴보니 도서관 소식이 실린 정도가 아니라 세은이 사진이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기사 대표 사진정도가 아니고 이날 신문 1면 대표 사진이 세은이 사진이다. 정말 입이 떡 벌어지게 놀랐다 'Oh my god!!!' 나는 그날 신문을 10부 정도 샀다.
집에 와서 세은이한테 보여주니 신문에 나왔다며 엄청 흥분한다. 한국에도 연락하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월요일이 되어 아내가 영어회화 수업을 갔더니 할머니 선생님들이 난리가 났단다. 사진 아주 예쁘게 잘 나왔다며, 선생님 한분은 우리에게 직접 주고 싶어서 일부러 신문 한부를 선물로 줬다고 한다. Alison도 이 신문을 자기 책상에 붙여두었단다. 우리는 신문 한부는 냉장고에 붙이고 나머지는 고이 접어서 챙겨 두었다. 한국에 가면 부모님께 선물로 드려야겠다.
한바탕 행복한 일들로만 가득했던 수료식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신문에 크게 기록까지 되었으니 그 순간은 영원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는 이 도서관을 통해서 진정한 이웃, 친구로 인정받았고 모든 사람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사람들이 되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은 느낌.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마음속에 생겨났다.
나는 그 감사함을 담아 모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