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022
(커버 이미지 : 우리 동네 공립 도서관 CPH Library. 'Clifton Park'과 'Halfmoon'. 두 마을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운영하는 도서관이기 때문에 근방의 다른 도서관들에 비해 규모도 크고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이민자를 위한 미국 도서관의 영어회화 수업에서 이어짐
영어를 배워서 미국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 (O)
미국으로 이민/유학을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동시에 여러 미국 친구를 사귀면서 진정한 현지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도 있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현지인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상식이지만 막상 해외에 살아보면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옆집 Mark의 말대로 요새는 미국사람들끼리도 옆집과 교류가 없기도 하고, 사실 애초에 영어 못하는 이민자를 누가 일부러 찾아와서 만나줄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도서관에 나와서 ELL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수업시간에 '이 수업에서 하고 싶은 일은?'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미국 친구를 만들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이민자에게 그것 이상의 목적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도서관 영어 수업은 '수업'이라기보다는 그냥 대화를 나누는 'Conversation Club'에 가까우니 친구를 만들려는 목적에 딱 맞는 선택이다. 나는 도서관에 가는 날마다 작은 얘기 거리를 항상 준비했다. 그냥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미리 문장 몇 개를 써보고 소리 내서 몇 번 읽어 보고 수업에 들어간다.
지난 주말엔 무얼 했는지, 관심 있는 TV 뉴스는 어떤 것이었는지, 동네 쇼핑몰에서 있었던 일 등 사람들이 재밌어하고 관심 있어할 만한 얘기를 해야 한다.
"뉴스에서 봤는데 Kathy Hochul(뉴욕주 주지사)이 다음주 부터 유류세를 낮춰준대요. 기름값이 한국보다는 싼 편이지만 작년보다 30%나 올랐어요."
"Clifton Park Center Mall에 Trader Joe's가 오픈했어요. 한국 냉동 음식들도 팔아요. 김밥 엄청 인기 있어요."
풋볼 이야기나 로데오 이야기는 몇몇 선생님들이 '그런 것까지 해 봤냐'면서 굉장히 신이 나서 내게 대답해 줬던 것들이다.
나 혼자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수업에 방해될까 하는 걱정도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들 눈치도 좀 봐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안하진 말자.
학교에 보내던 여행 PPT를 아주 가끔 가져와 보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런 주제는 선생님들과 대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정보가 부족한 다른 이민자들을 위해서기도 하다. 여행 내용 말고도 그냥 동네 이야기, 한국 이야기 같은 것을 PPT로 만들어 메일로 보내기도 했다.
내가 준비해 가는 대화의 내용이 상당히 '미국의 것'이다 보니 미국 현지인인 자원봉사 선생님들의 생각과 추억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몰랐던 걸 알게 되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몰랐던 것을 내가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영어로 말하는 것이 조금씩 편해지는 것도 느껴진다. 이렇게 선생님들, 다른 이민자들과 친구가 되고 영어도 능숙해지는 듯하다. 내가 이곳에서 얻어가는 것만큼, 나를 위해 무료로 봉사해 주는 선생님들도 이 시간을 재밌어하고 보람을 느끼면 좋겠다.
나는 현지인처럼 완벽한 영어를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특히 모국어의 억양, 한국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어 발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중고를 미국에서 다닌 게 아니라면 또는 직업상 영어 말하기에 엄청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보통 사람들은 미국인과 대화하면서 내가 외지인임을 감출 방법은 없다. 억양, 내용, 단어 등에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 방송에 많이 나오는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이라고 해도 웬만큼 잘하는 게 아니면 다 티가 나는 것처럼 나 역시 미국인들에게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니 불가능한 목표, 쓸데없는 희망을 갖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억양, 문법, 단어 등에서 부족함이 있어도 대화를 지속하고자 하려는 노력이 훨씬 중요하다.
사람들과 대화가 끊어지게 되면 발음이나 표현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다. 미국에서 소통을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인데 대화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모든 게 필요 없어지는 것 아닌가.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는 건 점수 매기는 영어 시험을 보는 게 아니니 사소하게 틀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선 발음이 어떻네 단어가 틀렸네 하기도 하는데 정작 미국 현지인들은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없다.
상당수 미국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영어 못하는 이민자를 생각보다 자주 보기 때문에 웬만큼 적당히 말하면 적당히 알아듣는 것에 익숙하다. 그리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면 영어 못하는 사람을 이해 주려고 하지 망신 주려고 하지 않는다. 나도 그들이 배려해 주는 그냥 그런 이민자 중 하나다.
미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나에게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이다. 대화를 할 수 없게 되면, 대화할 상대방이 사라지면 모든 기회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말할 기회가 없는데 영어 잘하는 게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사람을 챙기는 게 먼저다.
주변 사람들과 공감대를 만들고 대화 속에서 그들이 나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해야 한다. 나의 영어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위한 도구이고, 나의 말에는 흥미와 재미가 있어서 또 만나고 싶은 관계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친구하고 싶은 상대의 관심사와 취향을 기억했다가 똑같이 찾아서 해보고 나의 경험을 공유하곤 했다. (Damaris가 알려준 Boothbay Harbor를 다녀온 이야기)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은 한국에서도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다. 그것을 여기서도 똑같이 하면 된다. 단지 말을 영어로 하는 것뿐이다.
친구가 되고자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먼저고, 영어를 잘하고자 하는 것은 그다음이어야 한다.
내 영어를 고쳐줄 미국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X)
똑같은 수업에, 똑같은 사람들과 있어도 모두가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민자들 중에는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는 해도 미국 문화에는 큰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신의 현재를 꾸리기에도 벅차서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수 있음이 이해되지만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냥 관심이 없는 정도를 넘어서 미국 문화나 음식 같은 것이 자기와는 맞지 않아서 싫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더러 보았다. 타국의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는 되지만 나에겐 상당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 얘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평생을 미국에서 살아온 자원봉사 할아버지인데 과연 무슨 말을 싶어서 저렇게 얘기할까? 본인 기준에서 이해가 안 된다는 것들은 미국 사람들에겐 일상이고, 그토록 싫다고 하는 미국 음식은 할머니 선생님이 좋아하는 메뉴일 수도 있는데...
물론 선생님들이 그런 것들을 다 이해해 주니 누군가의 감정이 상하거나 문제 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람들과 공감대를 찾거나 호감을 주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이 자리에서 불평을 늘어놓기보다는 상대에게 즐거움을 주도록 하지 않을까.
자신의 경험과 맞닥뜨린 억울함을 말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남들과 친구 되는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2년짜리 시한부 이민자인 한국 주재원들도 다른 보통의 이민자들처럼 영어에 신경 쓰기는 마찬가지다. 누군들 영어가 유창해져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생각보다 회사일이 많고 집에서도 여러 일을 처리하고 나면 내 공부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게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각자 사정에 맞춰 뭔가를 하기도 하고 쉽게 포기하기도 하는데 복귀가 정해진 주재원들이다 보니 다른 이민자들처럼 간절함은 부족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간혹 안타까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 1 : 주재원들 몇 명이 도서관 수업에 나오긴 했는데 나를 포함 한둘 정도를 제외하면 꾸준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도서관 수업 선배로써 수업에 새로 오는 주재원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해도 결국 스쳐가게 될 그들의 운명이 예견되기도 했고 심지어 아예 안 왔으면 하는 사람도 있었다.
7살짜리 딸을 데려온 부부가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오로지 아이의 무료 영어 회화 때문에 온 것 같았다. 나이에 비해 영어가 유창하고 적극적인 태도인 아이와는 달리 부부의 수업태도는 매우 불량해서 질문에 잘 답하지도 않고 자리 비우기도 일쑤였다. 아내분은 영어가 유창한 편이었지만 그런 태도를 보이니 꼴 사나울 뿐이었다. 차라리 아이만 수업에 집어넣고 그들은 1층 열람실에서 기다렸다면 낫지 않았을까?
나는 우리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도서관 사람들에게 소개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창피해서 가급적 아무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결국 한 달도 못되어 아이와 그들은 사라졌고 나에게 그 부부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목적이 뻔히 눈에 보이고 행동이 얄팍해서 친구는 커녕 가까이에 조차 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야기 2 : 한국에서는 '원어민 발음'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그 외의 억양을 '틀린 영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말하는 '원어민'이라는 것은 흔히 '미국 백인 중년 남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기준이 상당히 편협하다.
오랜 시간 한국 사람들끼리만 지내게 되면 다양한 영어 원주민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고, 영어라고 하면 그런 '원주민'의 억양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그에 부합하지 않은 영어는 '틀린 발음(사실은 억양 Accent)'이라 하기도 한다.
게다가 대놓고 틀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지적까지 하기도 하는데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선 그러면 안 된다. 미국에서 이런 행동은 무례함과 인종차별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재원들 중 일부가 '회의시간에 인도애들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라거나 '중국애들 발음이 너무 웃기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에 넌더리가 나곤 했다. 본인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Korean Accent, 그것을 미국 파트너들이 이해해 주고 배려해주고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다.
여기는 다인종 다언어 국가 미국이니까 그렇게 생각, 행동하는 건 절대 안 된다. 생각은 들어도 혼잣말로 하는 것도 안된다. 공개적으로 남의 엑센트 또는 발음을 지적하는 건 인종차별에 매우 가까운 행동이라는 걸 꼭 기억해야 한다.
이야기 3 : 미국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에 동네 이웃들을 여러 번 집에 초대했지만 그 이후 자기 가족을 초대해 주는 사람은 없다는 고민을 말해오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이웃을 못 만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꾸준히 시도해 보면 좋겠다고 답은 해주었지만 혹시 너무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의 영어를 알려줄 친구, 우리 가족의 미국 생활을 도와줄 이웃을 너무 대놓고 찾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친구가 되어야 영어도 배울 수 있는 것이지 나에게 영어를 알려주는 친구가 어딘가에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노력을 하다 보면 스스로 깨닫는 것도 있을 테니 실망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면 좋을 것 같았다.
타지에서 친구 만들기가 절실하지만 언어 및 문화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한국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동은 미국에서도 똑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미국 친구를 만드는 것으로 업적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그 또한 행동에서 다 드러나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를 위한 친구를 만들려 생각하지 말고
한국에서 인간관계를 내가 어떻게 만들었고 어떤 식으로 유지했는지 되짚어 본다면
미국에서도 친구 만드는 건 사실 어렵지 않다. 다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