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ber 2022
(커버 이미지 : 옆집 Mark와 Sarah는 우리를 저녁에 자주 초대했다. 뼛속까지 야구팬인 4살짜리 꼬맹이 Gavin은 나를 콕 집어서 뒷마당에서 Wiffle Ball 게임을 같이 하자고 하곤 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해있는 곳에 따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쓰임에 차이가 나고 평가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 선의의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지금 나의 글 역시, 쓰고 있는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읽어주는 사람들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듯이)
미국 2년 차 그것도 가짜 이민자로서 내가 가족과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대는 것들이 주변 미국 이웃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내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또는 안쓰럽게 보였을 수도 있다.
내 입장은 이방인이라서 해코지당하는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이민자 처지다. 게다가 주재원은 한인 사회에서 이민자로 쳐주지도 않으니 기댈 곳이 없을 때도 많다.
요즘 세상에 누가 자기 가족 또는 친구가 아닌 사람과 관계를 갖고 대화하려 하겠는가. 나 역시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었으니, 미국에서 내 절박함이 외면당한다 해도 할 말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 보통의 현실은 그러하지만, 지금의 나를 둘러싼 미국 인간관계는 굉장히 예상밖이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너무 아름다운 얘기 같다.
다행히도 내 주변엔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와 또는 나를 초대하여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역시 한국처럼 주변 사람들과 교류는 거의 없는 사회지만, 다행히도 나에겐 남들에게 없는 행운과 예전 미국 사회의 따뜻한 가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해 기회가 쉬이 사라지지 않도록 소중하게 키워나갔다.
지금 시점에서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 이웃들과의 관계는 내가 이제껏 살았던 서울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거다. 그리고 내가 듣기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흔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선 '나대는 짓'이라서 하지 말았어야 했던, 그래서 아이와 아내마저 탐탁지 않아 했던 이사 인사 편지 썼던 것이나 여행기 만드는 일도 그들을 통해서는 예상치도 못한 가치가 더해져, 어느덧 나는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독특한 캐릭터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 가치를 만들어준 그들과의 시간을 계속 기억하고 싶어서 기록을 남기려 한다.
Mark & Sarah, 야구 꼬맹이 Gavin 그리고 아장아장 Grant
내가 미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에 이사 왔을 때, 우리 집에 먼저 찾아와 환영해 주고 선물까지 주었던 바로 옆집 가족.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마주칠 때마다 밝게 손들어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Mark네가 Farm에 다녀왔다며 우리에게 과일을 나눠주어서, 우리 역시 H-mart(집에서 3시간 떨어진 대형 한인마트)라도 가면 Gavin이 좋아할 만한 한국 간식을 챙겨주곤 했다.
막내 Grant의 첫 돌 즈음에 뉴저지 한인타운 베이커리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가져와 선물했는데, 엄마 Sarah는 그게 맘에 들었던지 한국식 케이크를 놓고 찍은 첫 돌 기념사진을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이건 내가 되려 고마웠다.
이런 식으로 옆집과 사소한 선물을 주고받는 걸 한국에서는 해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행동이니까. 물론 미국에서도 보통은 한국과 마찬가지다. 운 좋게도 옆집 사는 Mark와 Sarah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뿐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아가야 했던 이 미국 땅에서 우리의 호의를 기쁘게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와 목적 없이 일상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더구나 나는 영어가 서툰 외국인 아닌가.
이삿짐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 우리가 옆집을 딱 한번 식사초대 했던 이후로 지금껏 Mark는 우리를 저녁 식사에 여러 번 초대했다.
한번 초대를 받으면 초대한 사람을 다시 우리 집에 초대를 하는 것이 응당 예의일 테지만, 고작 2년 머무르다 돌아가는 이 가짜 이민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손님을 초대하기엔 민망하고 불편한 구석이 많다. 주재원들끼리야 서로 같은 처지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왕래하지만, 옆집엔 어쩐지 미안해서 주저했는데, Mark는 그런 것마저도 이해하는지 초대는 누가 하든 아무 상관없다고 했다.
주말에 그냥 뒷마당에서 아이들이랑 같이 야구나 하고 맥주나 한잔 하면 좋다고. 아내는 Mark가 좋아하는 잡채와 감자전 같은 것을 해서 싸가지고 가곤 했다.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하며 Mark와 Sarah에게 듣게 되는 것들은 솔직하고 소박한 미국 사람들의 흔한 얘기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이민자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진짜 미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Mark는 항상 자기에겐 뒷마당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결혼하기 전부터도 뒷마당에서 야이들과 야구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집은 좀 작아도 뒷마당이 넓고 평평한 지금의 집을 샀다고 한다.
애들이 더 크면 덤불을 밀어내고 마당을 더 넓게 쓰고 싶다고 했다. 모닥불을 피울 Fire Pit도 설치할 거라면서 우리 보고 꼭 놀러 오란다. 그러면서 Sarah는 Mark의 50세 생일에 큰 파티를 열어 줄 거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까지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는 뒷마당에 앉아서 Mark가 구해온 맥주를 마시며, 나이차 많이 나는 Mark와 Sarah의 결혼 이야기,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야생 동물과 Mark의 사슴 사냥이야기(집 거실에 걸린 사슴박제는 Mark가 직접 잡은 것이라 했다.), 건넛집 Mia네 큰 아들이 USMA(미국 육군 사관학교, 미국 대학 중 입학 조건을 채우기 가장 어렵다.)에 갔다는 소식, 우리 집을 그동안 스쳐간 사람들 이야기,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집주인이 설치한 인테리어 이야기 등...
어찌 보면 별것 아니지만 내 눈엔 특별한 보통 사람들의 얘기를 나누었다. Mark와 이런 얘기 나누고 있을 땐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동네에 속해 있는 것 같다. '같은 게' 아니다. 나도 이 동네 사람인 거다. Mark, Sarah와 이웃하고 있는.
고등학교 선생님인 Mark는 내가 여행기를 만들어 주는 것을 참 맘에 들어했다. 요즘 어린것들은 수학여행으로 런던 같은 곳을 데려가도 쇼핑몰에 처박혀 있는다며... 그걸 보고 있는 게 무척이나 아쉽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인도 아닌 한국에서 이민 온 옆집 사람이 미국의 온갖 곳을 여행 다니며 기록으로 까지 남기고 있으니 역사 선생님 입장에서는 내가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은이를 위해 여행기를 학교에 보내는 것도 잘 생각했다며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응원해 주었다. 잘 보고 있으니 계속 보내달라는 당부와 함께.
Yankees의 팬인 아빠처럼 5살짜리 꼬맹이 Gavin도 야구라면 사족을 못쓰는 야구 광이다. Sarah와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과 야구놀이(Wiffle ball이라고 하는 구멍 뚫린 어린이용 플라스틱 공을 쓴다.)를 하는 건 아저씨들 몫이다.
아무리 귀여운 아이지만 매번 하는 뒷마당 야구에 Mark는 이미 질려있을 테니 내가 좀 더 나서서 Gavin이랑 놀아준다. Sarah는 Gavin이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아이라며 걱정이 있다고 말하곤 했는데, 이렇게 옆집아저씨랑 잘 놀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저녁을 다 먹고 아이들이 인사하고 자러 갈 시간이 되었을 땐, 쭈뼛대며 와서는 "다음에 또 같이 야구하면 안 돼요?"라고 묻는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싶다.
"그럼 얼마든지. 아저씨도 너랑 같이 야구하는 게 정말 재밌단다."
My US mom and dad - Jean and Owen
도서관 시민권 수업에서 선생님으로 만난 할아버지 Owen과 그의 아내 Jean은 외국인들의 미국 역사/영어 학습을 돕는 도서관 자원봉사 선생님이다.
지난 5월에 시민권 수업이 끝났을 때는, 아쉬워하던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Owen과 Jean은 나를 비롯한 여럿을 기꺼이 초대해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Mark네 집에 갈 때는 마실 가는 느낌이라 긴장감이 없었는데, Owen의 저녁 초대는 뭔가를 준비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미국 사람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갈 땐 뭐를 해야 한다 어떤 게 예의다라는 말들이 가득한데, Owen은 그저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몸만 오라고 한다.
예의는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생각에 옷을 잘 차려입거나 가져갈 선물 같은 것 대신에 식사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서 가기로 맘먹었다.
나의 부모님 뻘인 Owen과 Jean이 살고 있는 집은 가족의 역사가 엿보이는 곳이다.
집 여기저기엔 이미 출가한 내 또래의 딸과 아들의 어릴 때 사진과 각종 기념이 될만한 것들이 놓여있었다. 40년간 뉴욕 경찰로 일을 했던 Owen의 방엔 그가 일하면서 다닌 미국 전역의 기념품들과 각종 상패가 벽에 걸려있고, 아들과의 추억이라는 미국 대학농구 결승전(March Madness) 관람 기념모자가 연도별로 진열되어 있다.
아들이 차로 네 시간도 넘게 걸리는 코네티컷에 산다는데, 그렇게 매년 아버지를 모시고 미국 여기저기 농구를 보러 다니는 거라면 Owen이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심지어 대학농구 결승전이 보통 경기도 아니다. 엄청 구하기 힘든 티켓이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드는 일이다.)
뒷마당에서 아이들과 뛰어노는 것이 중요한 젊은 아빠 Mark와는, 달리 노부부인 Owen과 Jean에겐 집 뒤엔 넓은 마당 대신 Porch(지붕을 길게 내려서 deck을 덮어 실내처럼 확장한 공간. 뒷마당인 경우 창을 설치하기도 한다.)가 있어서 어른 손님들을 맞이하기에 좋다. Owen과 Jean에겐 아마도 딸과 아들 식구가 찾아오는 일이 잦을 테니 이런 공간이 필요할 것도 같다.
식사 초대받은 모두는 Porch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Owen이 Porch 밖에서 구워 온 패티, 소시지와 Jean이 준비한 식사를 맥주와 곁들이며 지난 수업 시간을 추억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이후 나는 Owen을 자주 만났다. 내가 도서관 사람들 모두에게 여행기를 보내면 Owen이 답장으로 먼저 연락하는 식이었다. 특히 내가 Football을 공부하면서 까지 보고 있다 하니 NY Giants의 낮 게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연락이 왔다.
"내일 Giants 낮 게임 하는 거 같은데 시간 되면 우리 집에 와서 보렴. 꼭 오라는 건 아니고 시간 되면."
아내는 Owen이 유달리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연락이 오면 나 혼자라도 꼭 가라고 허락해 주었다.
세은이도 데려가고 싶었지만, 주말엔 미국사람 안 만나고 쉬고 싶다는 어린이여서 그럴 수는 없었다. 세은이를 손녀처럼 예뻐해주기만 하는 Owen과 Jean를 생각하면 조금 민망한 일이지만,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국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 모든 것도 다 이해가 되시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집에 갈 때마다 나는 아무리 봐도 Owen과 Jean이 한국에 있는 나의 부모님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이들이 이미 다 커서 떠나고 노부부만 남은 집.
그들의 아들 딸이 어련히 잘하며 지낼 테지만 그래도 이 큰 집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느껴진다. 내가 한국 부모님 집에 갔을 때 느끼는 익숙한 감정.
내가 보낸 여행기를 무려 출력까지 해서 읽고 있다는 Jean은 컴퓨터가 맘대로 잘 안된다며 내가 갈 때마다 이것저것 자꾸 묻는다. Jean의 책상에는 딸이 적어 준 컴퓨터 사용 관련 메모가 이미 붙어있다.
"Jean, 이건 내가 한국에서 우리 엄마한테 하던 거예요." 안경을 쓴 Jean이 날 보고는 엄마처럼 웃었다.
두 분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직설적인 표현의 Jean과 약간 느린 듯 온화한 Owen의 모습이 정말 한국 고향 집을 떠올리게 한다.
Owen과 Jean은, 미국에서 고작 2년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내가, Football을 공부하고 미국의 수많은 곳을 여행 다니고 심지어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여러 가지로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들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많았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로 왜 가는지. 미국에선 어떤 일을 하고 한국에선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국 부모님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시간이 되어 꼭 돌아가야 한다면 여기로 다시 올 수는 없는지.
나는 Trader Joe's나 Hannaford에서 파는 냉동 한국 음식을 맛 보여 드리기도 했다. 맘에 드시면 내가 한국 돌아가도 마트 가서 사드실 수 있게 알려드리면서. Owen는 남자인 내가 부엌에서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미국은 집안일은 여자의 일, 마당일은 남자의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음식은 여자의 일이지만 BBQ는 남자의 일이다.)
Owen은 동네 고등학교 농구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같이 보러 다니자며 틈나는 대로 연락해 주었다.
고등학교 대항 스포츠 리그를 말하는 'Varsity 게임'은 프로팀 경기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경기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구경거리다. 정말 별거는 아니긴 하지만 이민자는 몰라서 생각도 못하는 미국인의 일상인데 Owen이 나를 데리고 다녀주었다.
입장료 $2 내면 학교 체육관에서 영화에서만 보던 고등학교 치어리딩도 보고 어린 선수들의 혈기에 가득 찬 치열함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치어팀의 묘기에 놀라는 모습을 짓자 Owen이 크게 웃던 순간도 기억이 난다.
나는 Owen 덕분에 초보 이민자가 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쉽게 해냈고 다른 주재원들에게 아는 척, 잘난 척도 많이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주로 Owen의 집에서 만났지만 가끔은 주변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밖에서 볼 때는 Owen의 친구와 함께 만나는 경우도 있었는데 내가 Owen에게는 '친구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자리도 싫지 않았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Owen이 나를 데리고 앞장서서 걷는 모습을 뒤에서 볼 때마다 한국에 있는 나의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다.
언젠가 Bar에서 Owen이 해준 젊은 시절 이야기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엄마의 등쌀에 경찰을 지원했고 막상 경찰에 합격은 했지만 총기면허를 받을 수 없는 나이였다고. 그래서 처음부터 내근직으로 빠져서 타자나 치면서 40년을 쉽게 다녔다며, 지금 생각해 보면 행운이라고 한다. (스스로는 그렇게 익살스레 얘기해도 Owen은 구글 검색으로도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현재의 미국 전체 사법 및 범죄 검색 시스템 구축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영국 런던 사는 아가씨였던 Jean을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며 만나게 된 이야기, 그렇게 결혼하여 아이들 키우고 뉴욕 이 동네에 살게 된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인생은 앞날을 알 수 없다 말해준 Owen.
그러면서 나에게도 혹시나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Owen과 Jean을 언급할 때 "My US mom and dad"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들과의 이 모든 순간이,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쉽게 잊혀 버릴 것만 같아서 무척 겁이 났다.
그 집 거실에서 그들과 함께 한국 월드컵 경기를 보던 그 순간은 오랫동안 잊고 싶지 않다. 어느 날 근처 한인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일어서던 순간 Jean이 날 보고 웃으며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너는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아이야."
뼛속까지 선생님 Judy. 그녀의 한국과의 인연
Judy는 내가 도서관 시민권 수업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처음 만난 선생님이다. 수업 코디네이터 Alison은 학교 선생님을 오래 하고 은퇴하신 분이라 소개했는데, 그 말대로 Judy는 첫 수업 전에 아주 잘 쓰인 자기소개와 수업 커리큘럼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수업을 들으면서 정말 이 분은 평생을 선생님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역 도서관 무료 수업이라기엔 조금은 과한 세심함과 친절함이 담겨있다고 할까. 무료로 듣는 수업이니 수강생 중에 이 정도 관심을 기대하고 온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엔 정말 미국은 다 이런 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현역일 때는 엄한 선생님이었을 것 같아 보이는 Judy는 매주 숙제를 내고 제출받아서 틀린 것을 수정해 돌려주기까지 했다.
나는 시민권 시험 자격은 애초에 없었지만 그래도 '청강생' 티 내기는 싫어서 숙제는 꼬박꼬박 했다. 그것이 대단한 열정을 가진 선생님을 대하는 학생으로서 예의가 아니겠는가.
나는 Judy의 수업을 들으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잘 몰랐던 미국 역사의 여러 이유를 짧은 시간에 이해할 수 있었고, 각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과 그 배경까지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Judy를 통해서는 현재의 뉴스거리, 보통의 미국사람들의 생활, 교양 있는 사람의 화법 등 배울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았다. Judy는 내가 어떤 것을 물어봐도 항상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배우게 된 많은 지식들은 이민자인 나에게 '현지인이 알고 있는 것들을 나도 알고 있다'는 배짱을 심어주었고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나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Judy는 가끔 자신의 아주 어릴 적 사진을 자료에 첨부해서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때는 그랬지'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한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똑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Judy는 옛날 얘기를 할 때 이상하리 만치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나에게 자주 질문을 하곤 했다.
아무리 미국 역사 선생님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Judy의 한국 이야기는 현역 역사 선생님인 Mark보다 더 구체적이다. 그냥 연륜의 차이인가? 이 궁금증은 Judy의 집에 갔을 때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시간 날 때 차 한잔 하러 집에 오라는 빈말 같은 초대를 놓치지 않고 약간은 뻔뻔하게 Judy의 집에 찾아갔던 날 Judy는 나를 위해 여러 이야깃거리를 준비해 두었다.
차를 마시며 사진첩 몇 권을 꺼내 놓고, 20년 전 한국 여행 갔던 이야기, 지금은 여기를 떠나고 없지만 친하게 지냈던 한국 가족과의 추억 등을 나에게 자랑하는 Judy의 모습은, 어떻게 해서 먼 곳에 있는 나의 작은 나라에 이렇게 관심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어쨌든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으니 나 같은 한국 사람 만나서 반가웠나 보네...라고 생각하던 그때 Judy는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마지막 사진첩을 꺼냈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그 흑백 사진첩 속에는 할머니 Judy와 언니 동생의 아주 어린 꼬마시절 모습도 있다. 한국 부모님의 옛날 얘기를 듣듯이 Judy의 설명을 들으며 1950년대 살았다는 작은 집을 구경하다가 한복을 입은 세 자매가 그 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어? 이거 뭐예요? 이거 한복이잖아요?!"
"그래. 그렇지 역시 잘 알고 있네." 그러면서 Judy는 아버지가 젊었을 때 육군 조종사였다며 다음장을 넘겨 큰 수송기 옆에 서 있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 Judy는 Korean war veteran의 딸이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내가 놀람을 감출새도 없이, Judy는 씩 웃더니 잠시 이쪽으로 와 보라 하며 옷장을 열어 그녀의 가장 소중한 소장품을 보여주었다.
"이거 우리 아빠가 한국 다녀오면서 사 왔어. 어때 아직 괜찮지?"
나는 정말 '흐억'하며 소리 내서 놀랐는데, 흑백 사진 속에 있던 그 작은 비단 저고리가 분홍색이 여태 바래지도 않은 채로 옷장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사랑이 담긴 한복은 그대로였지만, 한복 주인인 사진 속 단발머리 꼬맹이는 그 사이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되어있다.
한국 전쟁은 이미 70년도 넘게 지난 일이라 그 당시 참전했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만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되어버린 참전용사의 딸이, 그 옛날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파병 갔던 나라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음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도 그녀의 그 인연 중 하나였던 것이고.
그 당시 젊은 미군 병사의 전쟁 속 삶은 어땠을까? 생사를 넘나드는 그곳에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얼마나 많은 회한이 있었을까?
이 예쁜 옷을 사들고 오면서 미국에 있는 딸들의 웃음을 떠올렸을 아빠의 마음도 너무나 공감된다. 그 옷을 여태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래서 그 먼 한국까지 여행도 가고, 경복궁에서 한복 사진까지 찍고 온 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진첩을 덮으며 내가 Judy를 나의 선생님으로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Judy는 가끔 한국과 관련된 책들을 권해주곤 했다.(내가 Judy에게 권한게 아니고 Judy가 나에게) Judy가 스쳐가듯 말한 것이라 해도 어쨌든 권유를 받고 나면 꼭 읽고 피드백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Judy와 대화를 이어가고 싶으니까. 또 한국 이야기 책인데 내가 모르면 창피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한국 문화 배경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미국 작가가 쓴 영문 원서다. 원서 읽기가 버거워서 속도가 나지 않아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누가 한국에 다녀온다고 하면 어떻게든 번역본을 구해다 읽었다.
Linda Sue Park의 책들도 좋았고 2세대 이민자가 쓴 엄마 회고록인 'H-Mart에서 울다'는 현재의 내 처지와도 닿아있어서 공감이 되었다. 나는 그 책들의 배경이 된 한국 문화/풍습을 정리해서 PPT로 만들어 보내주기도 했는데 Judy는 무척 고마워했다.
나를 환영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뜨내기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보살핌 받으며 지내는 느낌을 받는다.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민자에게 이런 소속감은 자신감이 된다.
나는 이젠 이곳이 정말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