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 2022
(커버 이미지 :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동북부는 캐나다만큼이나 단풍으로 유명하다. 11월이 되면 온 사방에 흩날리는 손바닥만 한 단풍잎을 볼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단풍놀이'를 하는 것처럼 미국 사람들도 'Leaf Peeping'을 하며 가을을 즐긴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고 단풍잎이 울긋불긋, 다시 돌아온 평범한 가을이다. 주재원 기간이 1년도 남지 않았으니 뉴욕에서 맞는 마지막 가을이다. 우리는 아마 내년 이맘때는 이 느낌을 서울에서 기억하려 애쓰고 있겠지. 미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다는 마음에 모든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가을의 일상을 메모해두려고 한다.
♬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학교에는...♪(오래전 그날 - 윤종신)
미국에선 9월에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가을은 무언가가 새 출발 하는 느낌이 드는 계절이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과 5학년을 보내게 된 세은이는 1년 새 조금씩 자라나서 작년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 올해 담임선생님이 생애 최초로 남자선생님이 되어 싫다는 세은이의 툴툴거림을 들어야 했다.
학년이 바뀌었지만 외국인 학생을 위한 ENL 수업은 여전히 Mr. Sweet에게 배우게 된다. 매일 아침마다 한 시간씩 별도의 교실에 외국인 학생들끼리 모여서 영어 수업을 따로 받는다. 여름 방학 전에 학교에서는 20명 남짓한 ENL 학생들이 자기 자신과 각자 자기 나라를 소개하는 짧은 인터뷰 영상을 보내주었는데 세은이의 영어가 많이 늘은 것 같아서 감개무량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자연스럽거나 유창하지는 않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아이에게 미국생활 고작 1년은 많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코비드가 지나간 뒤 학교의 각종 방과 후 수업은 일제히 부활했다. 작년엔 하지 못했던 것이 많으니 세은이가 최대한 모든 것을 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세은이는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 시작 하기 전 이른 아침에 하는 체육활동인 'Intramural'에도 등록했다. 그 시간엔 스쿨버스가 없기 때문에 아내는 아이를 직접 학교에 데려다줘야 한다. 학교 체육관에서 농구나 풋볼을 배운다는데 역시 미국에 왔구나 싶다.
방과 후 교내 밴드도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세은이는 다룰 수 있는 악기가 하나도 없지만 음악선생님 Mr. K는 그런 건 상관없다면서 세은이에게 트럼펫을 배정해 주었다. 내가 볼 때 운동, 응원 그리고 밴드는 미국 학교 생활의 상징 같은 것이라서 세은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밴드라도 잘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트럼펫을 구하는 것은 학교에서 악기를 대여해 주는 곳을 안내해 주기 때문에 별 부담은 없었다.
가을이 지나면 스키 캠프가 있을 거라는 공지도 받았다. 아내는 여기까지 이미 다 예상했던지 Yard Sale에서 이미 스키복을 구해 놓은 터다. 세은이가 한국에서 하기 어려운 것들을 많이 즐기고 돌아가면 좋겠다. 다음 여름이 되면 이곳을 떠나야 하니 지금부터 맞이하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지막이니까.
세은이가 학교에서 영어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하는 것 같아서 주변 한국 엄마들에게 미술 과외와 피아노 과외를 하게 되었다. 관련 경력이 있는 이민자 가족의 아내 분들이 하는 것인데 정식 비즈니스가 아니라 그냥 알음알음하고 있다. (그래서 과외비는 꼭 현금으로 인출해서 드렸다.) 한국에서라면 세은이가 싫어했을 미술이나 음악 과외를 한국 엄마들과 한국말로 편안하게 보낸다고 좋아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많이 든다. 한국에 가면 다 해결되려나.
미국에서 맞는 마지막 핼러윈
미국의 가을 일상은 핼러윈을 빼고는 얘기가 안 된다. 핼러윈이 휴일은 아니지만 준비 규모를 보면 크리스마스 다음 가는 명절이다. 아이 있는 집은 크리스마스 급의 이벤트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핼러윈은 젊은 사람들이 노는 날이라는 나의 편견과 달리, 작년 핼러윈을 통해 미국에서는 굉장히 아이 지향적인 가족행사임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올해는 코비드가 완전히 지나서 핼러윈 행사가 완전히 정상화된 것 같다.
학교에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주말 핼러윈 파티가 똑같이 열렸고, 올해는 작년엔 코비드 때문에 하지 않던 평일 교내 퍼레이드를 했다. 학부모들이 학교 입구까지 초대되어 짧은 거리를 지나가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지켜보는 행사다. 그런데 정작 세은이는 한껏 준비해서 가 놓고는 퍼레이드로 지나가다가 엄마를 보고는 부끄러운지 후다닥 뛰어서 들어가 버린다. 아... 이 어린이... 정말... 남의 아이들을 보는 건 참 재미있는데 내 아이는 역시 어렵다.
"미국 핼러윈도 마지막이라서 사진을 많이 남겨야 한다고!!"
올해는 Town에서 하는 행사에도 가보기로 했다. Town 공원 주차장에서는, 핼러윈에 사탕 얻으러 간 아이들이 하는 말인 "Trick or Treat"의 약간의 말장난으로 "Truck or Treat"이라는 행사를 한다고 한다.
공원 주차장을 비우고, 그 이름대로 핼러윈 분위기로 꾸민 트럭 여러 대가 대기하고 있어서 자원봉사자들이 사탕을 나눠주는 행사다. 동네 집들을 다니면서 Treating을 하는 게 핼러윈 main event이긴 하지만 모든 동네,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수도 있으니 Town에서 이런 행사를 마련해 준 게 아닐까? 길게 줄 서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 의도가 참 세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핼러윈이 되기 한참 전부터 세은이의 사탕 바구니는 가득 차고 넘친다.
이번 우리 동네 핼러윈 퍼레이드에서도 고맙게도 Mark와 Sarah가 함께 하자고 해주었다. 세은이는 스크림 가면 분장을 했고, Gavin은 Yankees 유니폼을 입고 아장아장 Grant는 야구공 분장을 했다. 작년하고 똑같이 퍼레이드 시작은 Tanya의 집이고, 모두 모여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을 앞세워서 동네 한 바퀴를 도는 방식이다.
세은이는 작년과 달리 많이 익숙해져서 같은 반 Madison 및 다른 아이들과 저 멀리 앞장서서 뛰어가기 시작한다. 사탕을 받으러 여기저기 다니는 세은이를 다른 부모들과 대화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천천히 산책하듯 뒤따라 간다.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친절한 동네 사람들, 신나면서도 따뜻하고 인정이 넘치는 미국 핼러윈의 분위기를 세은이가 오랫동안 기억하기를 바랐다. 나 역시 그러길 바란다.
♬ 소중했던 기억들이 감춰진 나의 동네에...♪(동네 - 김현철)
뉴욕은 너무 덥거나 춥지도 않고 비도 적당히 오는 곳이라 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다. 그중에도 특히 사과가 유명한데 생산량으로는 미국 내 2위이고 한국 전체 생산량보다도 많다고 한다. 생산하는 사과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마트에 가서 한국에서 먹던 것을 찾으려고 헤맸던 적도 있다. (Honeycrisp나 Fuji가 맛과 식감에서 한국 품종과 비슷하다.)
농사를 많이 짓는 뉴욕 업스테이트의 여러 농장에서는 계절별로, 작물별로 수확 체험을 운영하는데 가을엔 사과와 호박 체험이 압도적으로 많다. 작년 가을에 헤이니네가 사과농장을 다녀와서 사과 한 봉지 가득 선물해 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우리가 한번 가보기로 했다.
"Pick your own." 농장 입장할 때 봉지 가격을 내고 거기에 사과를 자유롭게 따서 담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봉지 크기는 Half Bushel(~18L, 우리의 한 말 정도) 짜리가 $29인데 이 정도만 채워도 사과 30개는 넘게 담으니 우리 가족 먹기엔 충분하고도 남는다.
들어가 보면 사과밭이 끝도 없이 넓고 품종별 구획이 나뉘어 있다. 사과 품종이 너무 다양하니 처음엔 땅에 떨어진 걸 주워서 살짝 맛을 보고 골랐었는데, 다니다 보니 먹어보지 않고도 어떤 것이 인기 품종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이미 다 따가서 손에 닿을 만한 위치에 사과가 달려있지 않은 것들이 맛이 좋았다. 우리는 세은이를 무등 태워 따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안쪽 깊숙한 곳까지 가서 따오기도 했다.
미국에서 도시가 아닌 교외(Suburb)에 산다는 것은 숲과 동물들과 함께 살 수 있어서 너무 멋진 일이지만, 그만큼 관리를 잘해야 유지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을이 되면 특히 마당에 떨어진 낙엽 치우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Raking Leaves)
우리 집 앞마당 커다란 단풍나무는 평소엔 너무나 예뻐도 가을이 되면 낙엽이 말 그래도 우수수 쏟아지기 때문에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꼭 쓸어줘야 했다. 이걸 방치하면 낙엽이 바람에 날려서 주변 집들로 퍼지게 되기 때문에 상당한 민폐가 된다. (정도가 심하면 옆집과 다툼의 소지가 되고 HOA의 경고도 받는다.)
옆집도 그렇고 대부분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센 바람을 불어주는 Blower($100~200)를 사서 편하게 낙엽청소를 하지만, 2년짜리 가짜 이민자는 그런 게 없으니 Yard Sale에서 산 Leaf Rake로 일일이 긁고 쓸어 담아야 한다. 그렇게 쓸어 담은 낙엽들은 쓰레기로 버리거나 소각해서는 안 되고, 마트에서 Yard Waste용 종이백을 사서 거기에 담아 버려야 한다.
시간이 지나고 미국 생활에 적응이 되어 갈수록,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세는 버릇이 생겼다. 1년도 안 남은 미국에서의 나의 시간. 이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이젠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 이곳에 두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벌써부터 아쉬움이 밀려온다.
핼러윈이 지나고 11월이 되자마자, 봄에 시계를 한 시간 앞으로 당겨 맞춰놓는 Daylight Saving Time이 끝났다. 라디오에선 크리스마스 캐럴만 나오기 시작하고 때맞춰 동네엔 눈이 오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눈.
이제 겨울이 온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