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022
(커버 이미지 : 겨울이 한창 시즌인 미국 고등학교의 농구 경기. 이날의 경기는 끝날 때까지 매우 팽팽했다. 적지 않은 동네 사람들이 관람을 왔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미국에선 학교 대항 운동경기, 학원 체육 경기를 통칭하여 바시티 게임(Varsity Game)이라고 부른다. 본래 '바시티'는 대학을 의미하는 University가 어원이고 그래서 바시티 게임은 대학 운동 경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세월이 지나 단어의 쓰임이 넓어지고 환경이 변함에 따라, 현재 미국에선 대학 경기를 College League라 하고 Varsity Game은 대개 고등학교 고학년 경기를 의미할 때가 많다. (저학년 팀은 JV, Junior Varsity)
미국의 고등학교 운동 문화 - Varsity Game & Varsity Jacket
미국 문화에서는 학생들의 학업 이외의 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문화가 그렇다는 것뿐이 아니라 대학 진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다양한 학업 외 활동 중에서 운동 경기와 관련한 것들은 영향력이 가장 크다. 경기를 직접 뛰는 선수뿐만 아니라 응원을 담당하는 치어팀, 밴드부 등도 미국 학교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니, 이런저런 역할로 학교 운동 경기에 참여하게 되는 학생들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이니 학생들은 좋든 싫든 학교 체육 활동에 노출되며 성정하게 된다.
체육 엘리트 중심으로 학교 운동부를 운영하는 한국과 미국 학생 체육 문화는 상당히 다르다. 한국 고등학교 운동부는 이미 운동을 진로로 선택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경우가 많고 고교 경기는 사실상 프로 지망생들의 무대가 된다. 반면 미국 학교 운동부는 엘리트 선수들이 참여하는 상위 리그가 존재하긴 해도 직업 선수까지는 바라지 않는 일반 학생들이 참여하는 리그가 굉장히 두텁다. 미국 학교의 진짜 유망주들은 대학 코치들의 스카우트 과정을 통해 선발되어 프로 진출까지 이어지고, 평범한 실력의 학생들은 운동 경력을 통해 쌓은 성실함, 헌신, 리더십 등의 경험을 '에세이'에 담아 대학 입시에 활용하는 편이다.
이런 분위기이니 고등학교 운동부에서 이름을 알리는 것은 대학 진학을 위해 중요한 항목이 되고 심지어 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학생 개개인에게 큰 자부심이자 학교 공동체가 인정하는 명예가 된다. 그래서 학생들 대부분이 끝까지 열심히 활동하며 팀 문화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 ‘야구잠바’, ‘과잠’이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재킷인 바시티 재킷(Varsity Jacket)은 미국 고등학교 운동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핵심 아이템이다.
사실 재킷 자체는 누구나, 심지어 학교 학생이 아니어도 돈만 주면 살 수 있지만 이것을 어떻게 커스터마이징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운동부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학생에게는 학교 차원에서 특별한 패치인 '레터(letter)'를 수여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마치 훈장과 같은 것이다. 레터는 돈 주고 살 수 있는 여타 패치와는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이 레터 새겨진 바시티 재킷은 매우 자랑스러운 아이템이 된다. (대개 학교는 레터만 지급하며, 재킷 구매와 레터 부착 비용은 학생이 부담한다. 좀 어처구니없긴 하다.)
그래서 학교의 레터 패치가 붙은 바시티 재킷은 성인이 되어서도 소중히 간직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 자녀에게 물려주기도 할 만큼 상징성이 크다. 그렇기에 미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학생이 레터 박힌 재킷을 여학생에게 입혀주는 장면’은 단순한 공식 커플을 인증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의미하는 장면이다. 학교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운동부 에이스(대개는 풋볼 팀 QB)의 재킷을 선물 받아 입는 것은 교내 학생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가 결합된 꽤나 정치적(?) 메시지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요즘 현실에서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런 큰 의미까지는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한 개인이 어린 시절 이뤄낸 것에 대한 상징이니 애착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른이 되어서 고등학교 재킷을 입고 다니면 좀 철없다는 이미지도 있다.)
2년짜리 손님으로 미국에 온 나는 세은이 학교 기념품은 빠짐없이 사서 모으곤 했지만 이 재킷을 사기엔 좀 부담이 되었다. 한국보다 가격이 2배 이상 비싸기도 한 데다가, 이민자, 그것도 다 큰 어른이 입고 다니기에는 이 문화의 배경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미국 학교에선 거의 모든 학생/학부모들이 바시티 게임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학교 문화, 미국 전반적인 문화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어른이 되어 미국으로 온 나는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학창 시절에 겪으면서 자라게 되는 바시티 문화가 늘 궁금했다.
가을 시즌 매주 금요일엔 고등학교 풋볼
대학 풋볼 이야기 : 미국 대학 풋볼 @UConn Huskies
프로 풋볼 이야기 : NFL 직관기, Let's Go Giants
미국의 가을은 풋볼의 계절이다. 대학 리그(NCAA)는 8월 말부터, 프로리그(NFL)와 고등학교 리그는 9월부터 시작하게 되고 다음 해 2월에 NFL의 결승전 Super Bowl이 모든 풋볼 시즌의 마지막이 된다. 이 소중한 풋볼 경기를 미국인들이 한 개라도 더 볼 수 있도록 각 리그는 경기일이 겹치지 않는데 매주 월/목/일요일은 NFL, 토요일은 대학리그가, 금요일은 고등학교 경기가 있다. 대학리그나 프로리그를 보려면 멀리 가야 하기도 하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웬만해선 자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고등학교 게임은 비용도 저렴(한 사람당 $3)하고 집에서도 가까우니 스포츠에 관심 없는 아내와 세은이를 데려가기에 부담도 없다.
9월이 되어 Varsity 리그가 시작되어 동네 고등학교 경기 일정을 찾아서 예매(Go Fan.com)를 했다. 내가 살고 있는 Clifton Park에는 고등학교가 단 하나뿐이다. 그래서 세은이 학교가 속해 있는 학군의 Shen 고등학교 풋볼팀은 사실상 우리 동네 대표팀이다. 세은이는 학교 체육시간에 풋볼도 배워서 그런지 물어보니 아예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약간의 호기심도 있어 보이니 데려가는 게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도착해 보니 경기장엔 차들로 가득 차있는데 지금껏 봤던 동네 행사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 입구에서 티켓을 보여주고 입장하면 입구에서부터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학교 기념품과 간단한 스낵을 팔고 있다. 꼬맹이들에게는 페이스페인팅도 해주고... 경기날이 아니라 아주 그냥 축제 분위기가 난다.
고등학교인데도 경기장이 굉장히 크고 넓으며 조명도 아주 밝은 게 관리가 잘 된 느낌이 든다. 물론 등받이 없는 관중석은 경기를 보기에 편안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고등학교 시설치고 매우 훌륭하다. 흙밭 운동장에서 축구, 농구했던 한국 40대 아저씨는 이런 환경의 미국 아이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미국에서 바시티 게임은 선수들만 하는 경기가 아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치어팀과 댄스팀, 그리고 학교 밴드가 오늘의 승리를 위해 자기 몫을 열심히 하고 있다. 밴드의 연주에 따라 치어팀 공연을 하고 있는 여자 아이들은 체조를 따로 배우는지 실력이 상당하다. 아마 다들 이런 특기를 살려 진학도 하고, 대학에서도 활동을 이어가는 것일 테지. 이것만 구경하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학교에서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한 세은이에게 좋은 볼거리가 되는 것 같다.
경기 시간이 되자 어디서나 그렇듯 원정팀은 간단히 이름만 불리고 초라하게 입장한다. 그 뒤 홈팀이 나올 땐, 치어팀이 입구 양쪽에 서서 승리의 문구가 적힌 'Run-Through Banner'를 들고 있고, 선수들은 힘차게 달려와 종이로 된 배너를 찢으며 필드로 뛰어든다. 고등학생 경기에서 연출할 수 있는 ‘최대한의 멋짐’인데, 그래서 더 귀엽고 정감이 있다. 이렇게 선수들이 모두 입장하고 나면 미국의 모든 스포츠 경기에서 그러하듯 미국 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경기가 시작된다.
이 경기는 순위차가 큰 두 팀이 맞붙어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양 팀의 실력차가 한눈에 드러난다. 다행히도 홈팀은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게임을 압도하고 있어서 보는 동안 마음이 편안하다. 경기에 관심 없는 꼬마들은 즐겁게 떼를 지어 휘젓고 다니고 계단 아래 구석 자리에 연애를 시작하는 듯한 풋풋한 고등학생 커플의 모습이 흐뭇하게 느껴진다. 홈팀이 많이 앞선 상태에서 하프타임을 맞는다. 오늘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을 댄스팀과 컬러가드(Color Guard, 밴드 소속으로 깃발 묘기를 담당)의 하프타임 쇼 볼만하고 동네 풋볼 아카데미에서 나온 꼬맹이들 달리기 챌린지도 소소하게 즐거움을 준다. 고등학교 운동부의 경기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동네 축제 같다.
후반전이 시작되었지만 원정팀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원정팀은 스키넥터디(Schenectady, NY)에서 왔는데 그 지역은 낙후된 도심지역으로 우리 동네보다는 경제사정이 좋지 못한 곳이다. 자세히 보니 원정팀은 선수가 부족해서 플레이가 애초에 잘 되지 않는 반면, 사이드 라인에 대기 중인 많은 선수와 화려한 치어팀, 밴드, 관중석의 꽉 찬 관중이 있는 홈팀과 굉장한 대비감을 준다.
결과는 "41-6", 오늘 경기는 Mercy Rule(큰 점수차로 역전이 어려운 상황이 되면 잔여 경기 시간을 조정하는 규정, 즉시 종료하는 Called Game과는 다르다.)에 따라 비교적 빨리 끝났다. 홈팀의 승리는 언제나 즐거운 것. 다들 행복해진 표정으로 경기장을 떠난다.
미국 사람들의 일상을 살짝 엿본 하루. 옆집 Mark와도 얘기 나눌 거리가 생겨서 뿌듯한 하루다. 세은이도 여기서 자라면 저런 모습 속에서 적응하며 살게 되겠지.
Owen과 함께 한 Varsity 농구
시민권 수업이 끝난 후에도 Owen은 종종 내게 연락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내가 재택근무 하는 날에 점심을 함께 하거나 주말에는 Owen이 집으로 불러서 NFL 중계를 같이 보기도 했는데, 겨울이 되자 그는 바시티 농구 시즌이 시작되었다며 함께 가자고 한다. 농구는 풋볼보다 입장료가 저렴해서 $2다. 나중에 Owen이 말해줘서 알게 되었지만 65세 이상은 무료란다.
스포츠에 진심인 미국인만큼 보통 고등학교의 실내 체육관인데도 시설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오늘 게임은 우연히도 풋볼에서 대승을 거뒀던 스키넥터디 고등학교다. 농구는 장비가 크게 필요하지 않고 한 팀을 구성하는 선수 수가 많지 않다 보니 열악한 환경에서도 변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목이다.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승패가 일방적이었던 풋볼과 달리 오늘 농구게임은 상당히 팽팽하다. 다행히 홈팀이 약간 앞서있지만 만만치 않은 느낌이다. 경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양 팀 선수들과 감독들은 초반부터 이미 상당히 흥분되어 있다. 감독들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지시를 하고 있는데 하프타임이 되지도 않았는데 양 팀 감독 모두 이미 목이 쉬어있어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는다. 치어팀의 묘기까지 더해지니 체육관은 그야말로 격렬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대단하다.
경기가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승패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선수들끼리 몸싸움도 치열하고 신경전도 벌어져 험악한 분위기도 연출된다. 고등학생이지만 열정만큼은 프로 경기 못지않다. 다행히도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경기에 집중한 홈팀의 승리로 경기가 끝이 났다. 홈팀의 승리는 언제나 즐겁다.
몇 주 뒤 Owen과 여자팀 농구 경기도 함께 봤다. 여자 농구라고 해서 그 분위기와 긴장감이 다르진 않다. 학생들은 똑같이 진지하고 경쟁은 치열했으며 거센 신경전도 동일하다. 그리고 홈팀의 승리로 끝난 것까지도 같았다.
나를 데리고 다녔던 Owen의 입장에서는 내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웃들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었겠지만 나는 공부까지 해가면서 이해해야 하는 새로운 것이니 느낌의 차이가 크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과 경험의 차이가 조금은 좁혀졌길 바라며 Owen이 좋아하는 피자집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