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이미지 : 세은이와 첫 돌이 갓 지난 옆집 꼬마 Grant의 동네 산책, Paul & Venus의 집 앞, 2022년.)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우리 집으로 놀러 오세요."
8월 말에 이삿짐을 받고 나서 무려 석 달이 지난 지금에야 집 여기저기 쌓아두었던 짐 정리가 조금씩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뜯지 않은 않은 상자들이 남아있었지만, 지금까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어차피 영원히 열어 볼 일 없는 것들이다.
이제 점점 추워지려 하니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2년 뒤에 다시 싸야 하는 짐이고 필요한 건 사서 쓰면 된다.
우리는 이사 종료를 선언하고 더 이상 정리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남은 짐은 모두 지하실에 처박아 넣었다. 아마 그대로 다시 한국으로 가겠지.
(뉴욕 업스테이트 대부분 집들은 겨울 추위 때문에 지하실을 만든다. 보통 지하실은 보일러나 히터 같은 것을 놓는 공간이고 생활공간은 아니어서 창고로 활용된다. 어떤 집들은 돈을 꽤 들여서 지하실을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Basement Finishing'이라고 한다. 보통은 남편의 여가 공간이 된다.)
짐 정리를 끝내버리려는 또 다른 이유는,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동안 누군가에게 도움 받을 때마다, 집이 정리되면 초대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는데, 겨울이 되기 전엔 그 빚을 다 갚고 싶기도 했다.
우리 집 첫 손님 : 옆집 Lodico 가족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다
누군가를 초대한다면 당연히 옆집 Lodico 가족(Mark, Sarah, Gavin, Grant)을 제일 먼저 초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집에 찾아와서 환영하며 선물과 편지를 전해주었을 때, 앉을 의자조차 없어서 집안에 들어오라고 하지도 못했다.
이사 종료 선언 다음날, 나는 Mark에게 연락해서 저녁 식사 초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 Grant는 첫 돌도 되지 않은 아기라서 집을 비우기가 어려울 텐데, 고맙게도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었다.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나서, 한식에 낯선 미국 꼬마 Gavin이 좋아할 만한 맵지 않고 달짝 지근한 메뉴부터 고민해 보았다.
배달시켜 먹는 것보다는 우리가 직접 요리해 주는 게 의미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짜장밥, 잡채 그리고 미역국이 적당해 보였다. 김치와 단무지도 따로 담아내면 될 것 같다.
한국형 중식, 잔치 음식 그리고 엄마와 아이를 위한 생일 국이라는 메뉴에 담긴 한국의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고, 맛도 자극적이지 않은데 준비도 어렵지 않아서 아주 적합했다.
미국에서 누군가를 식사 초대 할 때는 식습관(종교/건강/취향 등)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할 음식 재료를 손님에게 미리 물어봐야 하는데, Mark는 우리가 물어보기도 전에 "우리는 가리는 거 없이 다 먹어요."라고 알려주었다.
사실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었는데 덕분에 우리가 실수해서 머쓱해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식사 준비는 생각한 대로 하면 되는데, 손님을 집에 초대하고 나서 어떤 얘기를 나누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가 큰 고민이었다.
Mark와 Sarah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어서 평소에 내가 서툰 영어를 해도 잘 참고 들어주었는데, 그렇더라도 집에 까지 초대해서 아무 준비도 없이 말을 더듬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건 솔직히 실례가 될 것 같았다.
우리 집 첫 손님인데, 손님들에게도 뭔가 의미 있고 좋은 기억으로 남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회사에서 PPT 발표를 많이 하니까 우리 가족의 한국, 미국 이야기를 ppt로 만들어서 준비하면 아무래도 말하기가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면 즉흥적이 아닌 미리 준비한 말을 할 수 있고, 글과 사진을 보여주면서 얘기하는 거니까 자료만 잘 만들면 영어를 아주 잘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다.
하루쯤 시간을 들여 우리 가족의 한국 생활, 미국 정착과 여행 이야기를 다 만들고 나니 20페이지 정도 분량이 되었는데 최대한 성의 있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여러 번 읽고 열심히 준비했다.
사실 미국인과 식사를 하며 영어로 몇 시간이나 얘기하는 건 나도 처음이다. 정말 긴장되는 일이지만 아내와 세은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다들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내가 불안해하면 어찌하겠는가. 내가 이걸 성공해 내야 아내와 세은이도 따라올 수 있다. 리더는 외로운 법.
분명히 어려운 숙제였지만, 그동안 Lodico 가족에게 받은 것들을 생각해서라도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했다.
약속한 날이 되고 아내와 나는 점심때부터 짜장을 볶고 미역국을 끓였고, 거실(Dining Room)에서 PPT를 다 같이 볼 수 있도록 컴퓨터와 모니터 설치도 마쳤다.
미국 이웃과의 첫 가족 식사 그리고 Mark와 Sarah의 사연.
"띵똥~띵똥"
약속 시간에 맞춰 Mark와 Sarah, Gavin이 우리 집으로 왔다. "Welcome to our home"
막내 아기 Grant는 너무 어려서 할머니 집으로 갔고, 이번에도 고맙게 과자와 와인을 집들이 선물로 주었다.
아직도 어수선하지만, 간단하게 집 소개도 하고 우리가 사용법을 몰랐던 집안 장치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근황도 듣고 식사 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I have something to show you." 식사 시작 전에 준비한 PPT를 시작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우리 가족은 어떤 곳에서 살았으며 나는 어떤 일을 했고 미국에선 뭘 하는지, 동네에 오기 전에 상상했던 미국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국의 여행지와 지난 몇 달간 미국에서 여행 갔던 곳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특히 타이어 터진 것과 사슴 이야기에서는 Mark와 Sarah도 살짝 놀란 것 같았다. (13화 나이아가라 여행기 참고)
자료의 마지막엔 앞으로 미국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얘기했는데, 맺음말로 미국에서 많은 여행 및 경험뿐만 아니라 '좋은 이웃으로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썼다.
끝나고 나니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있었는데, Mark와 Sarah는 자료를 보면서 중간중간 자신들의 경험을 말해주기도 하고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하면서 상당히 관심 있어했다.
저녁 초대받아서 PPT 발표를 보는 일은 아마 없었겠지, 물론 나도 처음 해보는 것이다. 재미있었다.
아내가 음식 식는다고 눈치를 주어서 바로 식사를 준비했다. 음식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도 해주고, 특히 미역국은 애 낳은 지 얼마 안 된 Sarah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미역국은 "Sea Weed(잡풀) Soup"이라 하지 않고 "Sea Vegetable(채소) Soup"이라고 알려주었다. "Sea Farm Grown Vegi"이라고. 그들에겐 생소한 음식일 테니 처음 듣는 단어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낯선 음식일 텐데 다행히도 한식이 입맛에 맞는지 맛있다 해주었고 Gavin도 자기 몫을 다 비웠다. 어른들은 맥주도 한 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진) 내가 준비했던 발표자료의 첫장. 한국의 소개, 한국에서의 생활, 미국에서 했던 일과 앞으로의 이루고 싶은 일들을 함께 얘기 나눴다. (왼쪽) Lodico 가족의 집들이 선물, 디저트 상자와 와인을 선물로 주었다. (오른쪽) 동네 이탈리안 베이커리에서 만든 페스트리들, Lodico 가족의 선물
Mark는 30분 정도 아랫동네인 길더랜드(Guilderland, NY)에서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하고 있고 Sarah는 연구소에서 연구비를 담당한다고 했다.
Mark는 매일 아침에 출근을 해야 했고 Sarah는 요일별로 재택근무와 출근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Sarah가 출근할 때는 아이들을 건너편 집(Toni, 은퇴한 보육교사)에 맡기거나 시댁이나 친정 부모님께 부탁한다 했다.
'아... 그래서 Gavin이 종종 다른 집 마당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옆집에 여러 종류의 차들이 정기적으로 다녀갔던 거였구나.' 그들의 생활이 이해가 되었다. 미국이라서, 뉴욕이라서 우리랑 다른 건 하나도 없네.
Mark가 할아버지대에 미국으로 온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이어서 Lodico라는 Family Name을 쓴다.
나이도 궁금했다. 보통 미국에서 나이를 묻는 게 실례라고 하지만 식사 초대까지 할 정도의 사이면 큰 결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직장 이야기, 육아 이야기 같은 걸 하다 보면 본인의 나이가 궁금하기도 하다.
Mark는 Sarah보다 10살 많고 나보다도 4살 더 많은 형님이라고 했다. 건장해 보이고 외모가 젊어 보일 뿐만 아니라 굉장히 활동적인 사람이다. 학생들과 같이 있어서 그런지 늘 젊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놀랍네요. 난 나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내 말을 들은 Mark가 씩 웃었다.
"애들도 어리고 Sarah가 30대니까 나까지 어려 보이는 거지 뭐." 이 말을 듣고 Sarah가 씩 웃는다.
학교에서 수업할 때 한국 얘기를 해야 할 때(Korean War)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 관심도 많고, 최근 한국 뉴스에 대해서도 꽤 잘 알고 있었다.
Mark는 오징어 게임도 봤다고 했는데, 나는 안 봤다고 했더니 너무 잔인하니 애들 보여주면 안 된다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보통의 미국 아저씨답게 야구랑 풋볼을 엄청 좋아하고 뉴욕 양키스와 버펄로 빌스의 광팬이라고 했다. 그래서 Mark의 픽업트럭엔 두 팀의 앰블럼이 나란히 붙어있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우리 집에 찾아와서 선물과 편지를 주면서 환영해 줬던 일이 정말로 고마웠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너무 힘든 시기였는데 크게 감동받았다고...
"한국에 살 때도, 여러 번 이사 다녔는데 이런 식으로 환영을 받아본 적은 없었어요.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때 나는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데 완전히 지쳐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삿짐이 정리되자마자 제일 먼저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었어요."
Mark는 내 얘기를 듣더니 그날의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어릴 때 사라토가(Saratoga Springs, NY) 시골에서 자랐거든. 시골에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누군가 이사 오고 가는 게 굉장히 드문 일이야. 그래서 내가 어릴 땐 누가 이사오거나 가면 서로 인사하고 파이 같은 선물도 주고받았었는데 요즘은 미국에 그런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우리가 결혼해서 알바니(Albany, NY) 시내에서 살다가, 6년 전에 애들 때문에 이 동네로 이사 왔는데 그때 아무도 우리를 찾아오거나 환영해 주지 않더라고. 물론 지금은 동네 사람들이랑 서로 잘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때 너무나도 조용했던 건 좀 실망스러웠지.
그래서 우리는 옆집에 누군가 이사를 오면 옛날 방식으로 환영해 줘야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그 새로 이사 온 집이 바로 너희 가족이야. 난 우리 애들도 이런 걸 보고 자라면 좋겠어."
나는 Mark의 얘기를 듣고 정말 소름이 돋을 만큼 놀랐다.
Mark와 Sarah가 몇 달 전 우리에게 보여준 환영 인사는, 정말 특별한 것이고 현재의 미국 이웃 분위기에서도 당연하게 여길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었다.
우리가 운 좋게도 친절하고 친화력 있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났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사려 깊은 고민 속에 나온 배려라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밤이 되어 Lodico 가족이 돌아갔다. 다음엔 자기 집에서 만나자면서.
나는 설거지를 마치고 아내와 한참을 대화를 나눠봤는데, 그동안의 몇 가지 일들은 그냥 우연한 것이 아니라 옆집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세심하게 배려했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다니 우리는 정말 복 받았구나. 그리고 나는 다짐했다.
나도 그들에게 좋은 기운을 주고 도움을 주는 그런 이웃이 되고 싶다. 2년 스쳐가는 여행자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 동네 사람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싶다.
(사진) RC 카를 몰고 나온 Gavin과 세은이. Gavin은 자동차를 정말 좋아해서 동네 이웃들의 자동차 이름을 다 외우고 있었다. (왼쪽) 헤이니네와 같이 갔던 Thatcher Park 뉴욕 주립공원 (오른쪽) 우리집에 놀러와서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Madison(우)과 세은이(중앙)
우리는 어울려 살기 위해 이곳에 왔어
우리가 신세를 여러 번 졌던 세은이 한국 친구, 주재원 동기 헤이니네 가족도 빼놓으면 안 된다.
Lodico 가족과의 약속 며칠 뒤, 헤이니네 가족과 함께 낮에는 주립공원 나들이를 하고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한국 친구들이니 메뉴 고민할 것도 별로 없다.
2층에 있는 세은이 방은 여전히 정리가 안되어있기는 했는데, 아이들은 뭐가 좋은지 방에 들어가서 깔깔대며 나올 줄을 몰랐다.
우리가 항상 헤이니네에 신세만 지다가 이제는 식사 초대할 정도로 상황이 좋아져서 앞으로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아이들 통해서 엄마들끼리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세은이 학교 단짝 Madison도 드디어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같이 밀집된 아파트에 사는 게 아닌, 집들이 띄엄띄엄 있는 곳에 사는 미국 아이들은 "Play date"라고 해서 방과 후나 주말에 친구들끼리 미리 약속을 하고 만나서 노는 게 다반사다.
어딘가 밖에서 만날 수도 있지만 서로의 집에서 모여 노는 것이 흔하다. 사실 아이가 친구집에 가서 놀아야 부모들은 집에서 짬이 난다. 일종의 미국식 육아 품앗이인 셈이다.
Madison은 아주 좋은 놀이 친구(Playmate)가 되어 주었다. 아이들끼리 관계도 괜찮고 서로의 집에서 멀지도 않다.
세은이가 아직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데도 같이 게임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숨바꼭질도 하고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노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노력하는 세은이도 그렇고, 세은이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Madison도 참 기특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한인 커뮤니티 글을 보면 이웃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사실 한인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이민자들 공통의 문제지만.
한인들 사이에서만 살면서 한국말만 하면서 살겠다는 사람도 있고, 잘하고 싶지만 주변 환경이 안 된다는 글도 있다. 오래 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고 함께 일하고 있는 회사 주재원들도 자기 동네 이웃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의든 타의든 사람과의 관계가 없으니 얘기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렇다.
이민 온 사람들이 현지인과의 인간관계를 잘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민 올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고향에 놓고 왔으니까.
더구나 어른이 되어서 이민 온 사람들은,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아이들과는 달리, 현지인들이 어릴 때부터 배우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지식이 전혀 없고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없다.
그러다 보니 매번 주변 사람들의 도움에 의존하게 되는 경향이 되는데, 나는 이걸 입장을 바꿔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되어야 한다.
Mark나 Madison 엄마는 무엇이든 물어보고 부탁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나는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없다. 한국에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호의는 무제한이 아니다.
만날 때마다 사소한 것까지 도움만 바라는 사람,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 하는 사람, 영어도 못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조차 없는 사람, 누가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할까?
한국의 인간관계에서 내가 해왔던 것처럼, "도움만 받는" 사람이 아니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국에선 내가 가진 근본적인 부족함을 없앨 수는 없지만, 내가 한국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했던 역할을 여기서도 최대한 똑같이 할 수 있어야, 사람들에게 그런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국에서와 동일한 수준의 인간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아쉬워도 일방적으로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는 관계가 되어선 안 된다.
사소한 건 일부 손해가 될지라도 혼자 감수해야 하고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별거 아닌 걸 부탁해서는 안된다. 작은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큰 부탁은 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대화할 때 수준이 어느 정도 엇비슷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하고 있음을 우선 보여주어야 한다.
Lodico 가족과 다음번 식사할 때는 PPT 도움 없이 몇 시간을 같이 보내야 한다. 그전까지 역사, 사회 지식, 동네 지리, 상식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독학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일단 다행히도, 우리에겐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맺어지고 있고 언젠가는 우리 가족도 미국에서 여러 사람들의 친구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마음속에 있었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