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y & October 2022, 여행 15 (1/4)
(커버 이미지 : 미국 뉴욕 고속도로 I-87과 캐나다 퀘벡 고속도로 A-15가 연결되는, 캐나다 쪽 국경의 St. Bernard de Lacolle 검문소. 차들이 줄을 지어 캐나다 입국을 기다리고 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운명으로 다가 온 드라마 도깨비의 도시 Quebec City
2016년 겨울에 방영됐던 드라마 "찬란하고 쓸쓸하神 도깨비"
저주를 받아 900년 동안 죽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도깨비(공유 役)와 불운한 환경 속에서 도깨비 신부의 운명을 타고난 한 소녀(김고은 役)의 이야기는 당시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도깨비는 마법을 사용해 아무 문이나 열고 순간이동으로 원하는 장소를 어디든 갈 수 있었고, 그렇게 등장하는 드라마 속 멋진 장소는 따로 찾아가 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 당시 우리 가족 모두는 이 드라마의 대사를 외울 정도로 푹 빠져있어서 도깨비의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중에 오대산 월정사 숲길과 주문진 바닷가는 드라마가 끝나고도 매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겨울마다 찾아갔는데, 그 정도로 가족 모두 '도깨비'의 진짜 팬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진정한 팬임을 자처하더라도 도깨비의 장소 중에는 찾아갈 엄두를 낼 수 없던 곳이 하나 있었다. 도깨비와 신부가 서로의 정체를 처음 깨닫게 되는 그곳. '사고무탁(四顧無託)하고 조실부모(早失父母)한' 어느 소녀가 우연히 도깨비를 따라가 훔쳐본 천국 같은 곳. 바로 캐나다의 퀘벡(Quebec City)이다. 극 중에서 도깨비는 아무 문이나 열고 동네 마실 나가듯 퀘벡을 들락날락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퀘벡을 가려면 최소 휴가를 일주일은 내야 할 것이고 그중 절반은 이동하는데만 써야 하며, 게다가 우리 가족 셋이 가려면 돈 천만 원은 우습게 없어질 곳이었다. 그 아름다운 곳이 그다지도 먼 곳임을 알게 되고는, 퀘벡은 그냥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예쁜 곳인데 나랑은 인연이 없네. 그래도 거기가 어딘지는 알아.' 정도로 설렜던 마음을 씁쓸함으로 덮고 살았다.
그런데. 그랬는데.
나와는 아무 상관없을 것 같던 퀘벡이었는데, 신의 축복인지 우리는 지금 뉴욕에 와서 살고 있다. 그리고 뉴욕 알바니에서 퀘벡은 운전으로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비교적 가까운 곳이다.
뉴욕으로 오는 것이 정해졌던 그 순간 우리의 퀘벡 여행은 사실상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여름과 가을 각각 한 번씩, 두 번을 다녀왔는데 그때 보았던 것을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거기는 Quebec이 아니고 Quebec City야"
도서관 선생님 Owen은 내가 어디로 그렇게 여행을 다니는지 관심이 많았다. 볼 때마다 묻곤 했는데...
"이번엔 미국이 아니고 캐나다로 운전해서 가요. 퀘벡을 배경으로 한 엄청 유명한 한국 드라마가 있었어요."
"퀘벡? 퀘벡시티 말하는 거니? 그래 거기 강가에 호텔이 아주 멋지지."
도깨비가 신부를 데려갔던 그곳은 퀘벡이 아니고 "Quebec City"라고 '시티'를 꼭 붙여야 한단다. 그냥 '퀘벡'이라고 하면, 캐나다를 구성하는 10개 Province (미국의 State와 유사) 중 하나인 'Quebec Province'를 의미한다. 뉴욕과 뉴욕시티가 다른 것처럼 퀘벡과 퀘벡시티는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도깨비의 추억이 있는 그 장소는 퀘벡시티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퀘벡시티까지는 운전으로 6시간 정도 거리다. 이젠 이 정도 거리의 운전은 큰 어려움이 없게 되었지만, 이번엔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갔다 돌아오는 것이라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다. 사실 캐나다에 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여행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올 때 주의해야 한다.
미국에서 우리는 일반 관광객이 아닌 유효한 비자를 가진 합법적인 거주민이다. 그래서 돌아올 때는 미국 출입국 사무소 직원에게 사정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증명할 수 있는 서류들인 가족 모두의 여권(+비자)과 비자 신청할 때 미국 대사관에서 발급받았던 서류(I-129S for L-VISA)까지 잘 챙겨야 했다.
나는 혹시나 출입국 사무소에서 더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영문 번역된 가족관계증명서, 한국 회사가 끊어준 파견증명서, 미국 회사의 재직증명서 그리고 부동산 계약서 사본까지도 들고 다녔다. 돌아올 때 이 서류들을 꺼낼 일이 부디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 차를 운전해서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어간다.
미국에서 육로로 캐나다 국경을 넘는 것은 준비할 게 없다. 한국인은 캐나다에 무비자로 최대 6개월까지 체류가 가능하고 입국할 때 보통 미리 받는 ETA(전자여행허가)는 비행기로 입국할 때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실질적인 섬나라니까 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는 건 조금 특별한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서 I-87을 타고 2시간 가까이를 북쪽으로 달렸다. 국경 근처에 가니 아직 미국 뉴욕인데도 프랑스어로 된 교통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달려 어느덧 캐나다 국기가 휘날리는 국경 검문소(@St. Bernard de Lacolle)에 도착했다. 검문소는 꽤 큰 규모다. 면세점도 보이는데 집에 올 때 한번 들러봐야겠다.
차들이 줄을 지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생긴 부스 위에 설치된 신호에 맞춰 한 대씩 순서대로 들어간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창문만 내려서 심사를 받는 방식이다. 이제 곧 내 순서가 온다. 아내에게 미리 준비한 서류 봉투를 잘 갖고 있으라 하고 심사 부스 바로 옆에 차를 대었다.
별건 아니라고 생각은 해도 살짝 긴장이 된다.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Hi, Good Morning, Officer." 젊은 여자 심사관은 손만 까딱하고 별 대답이 없다.
나는 모든 창문을 열어서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셋, 여권도 셋임을 보여주고 어디를, 왜 가는지, 얼마나 있다 올 것인지를 얘기했다. 심사관이 차에 술이나 총이 있냐고 물어서 없다고 했고, 한국 시민권자가 왜 미국에 살고 있는지를 물어서 그것도 간단히 설명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질문하던 굉장히 사무적인 분위기의 그녀는 무심하게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다.
"Have a nice trip."
그렇게 우리는 '단풍국' 캐나다에 입국한다. 검문소를 빠져나오니 속도의 단위가 mile/h가 아니고 km/h라는 교통표지판이 줄지어 나타나고 퀘벡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프랑스어 표지판이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Bonjour Quebec"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해서 다행이다. 하지만 퀘벡시티까지 가려면 앞으로 4시간은 더 운전해야 한다. 긴장이 풀리면서 캐나다의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뉴욕을 포함한 미국 동북부(NY, VT, NH 등)에 펼쳐져 있는 빨간 단풍은 여기 퀘벡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 같다.
뉴욕과 퀘벡은 둘 다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라 얼핏 보면 풍경이 비슷하지만 자세하게는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주유소가 Gas Station이 아니라 Petrol Station이라고 되어있는 것도 신기하고 미국보다는 현대식 건물이 눈에 많이 띄는 것도 신기하다. 고작 국경을 건넜을 뿐인데 뉴욕 업스테이트에 흔한 나무집은 없어지고 한국이나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 꽤 많다.
영어 도로 표지판이 별로 없는 게 불편해서 적어도 요일이나 동서남북 정도는 프랑스어로 외우고 다녀야겠다고 아내와 얘기할 때쯤 퀘벡시티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가 관광지 근처에 있고 체크인을 하고도 오후가 아직 많이 남아서 짐을 빨리 풀고 밖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도깨비의 추억과 'Old Quebec City'로 계속
여행을 가기 전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 미리 공부를 좀 하는 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퀘벡에 오기 전부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캐나다는 영어 쓰는 영연방 나라인데 왜 퀘벡에서는 프랑스어를 쓰고 있는 거지?"
캐나다라는 나라의 기원은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1534년에 대서양을 건너 쌩 로렝 강(St. Lawrence River)을 따라 몬트리올 일대를 탐험한 것, 그리고 수십 년 뒤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퀘벡시티를 세우고 정착한 것이라고 한다.
자크 카르티에가 이곳에 왔을 때 원주민이 이곳을 'Kanata(마을)'라고 답했던 것에서 캐나다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여기가 어디요?"라고 물어서 "여긴 우리 마을인데"라고 답을 했더니 훗날 지명이 '우리마을'이라고 된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까르티에와 샹플랭 이후 프랑스는 퀘벡을 시작으로 하여 서쪽, 남쪽으로 뻗어나가면서 이른바 누벨 프랑스(Nouvelle France) 식민지 개척을 하게 된다. 프랑스인들은 대서양에서 쌩 로렝강을 타고 서쪽으로 5대호 인근까지 도달하게 되고 그 뒤엔 5대호에서 이어진 미시시피 강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 멕시코 만(Gulf of Mexico)까지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는다.
그렇게 프랑스가 거침없이 영역을 확장하던 중에 미 대륙 동부해안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과 충돌을 빚게 된다. 욕심 가득한 두 세력이 가까이 있었으니 싸움이 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 상황에서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의 전쟁(인디언 프렌치 전쟁 1754-1763)을 피할 수 없게 되었는데, 결과는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고 누벨 프랑스의 북쪽 지역인, 퀘벡이 포함된 현재의 캐나다 동부 일대를 영국에게 빼앗기게 된다.
영국은 프랑스에게서 얻은 이 새로운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여 자치령으로 하고 영연방에 포함(1867)되는 하나의 국가인 캐나다로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캐나다는 서쪽으로으로 영토가 확장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고, 비교적 최근인 1982년에 비로소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영국의 승인 없이 헌법 개정이 가능해짐) 진정한 자주국이 된다.
현재의 캐나다 사람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82년이 아니라 영연방 자치국이 된 1867년 7월 1일을 'Canada Day', 나라의 생일로 기념하여 축하한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식민지에 대한 개념과 감정은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다시 얘기를 퀘벡의 프랑스어로 돌아와 보면....
인디언 프렌치 전쟁 직후를 퀘벡에 살고 있던 프랑스 이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관리자가 프랑스 사람들에서 영국 사람들로 바뀌게 된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갑자기 영국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게, 어떤 지역이 영국의 점령지가 되었다고 해서 거기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영어를 하게 되거나 영국인으로써의 소양을 갖추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식민지에는 주입식 강제교육이 횡행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런데 당시 영국은 퀘벡 남쪽에 있는 기존 식민지(=미국) 관리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퀘벡의 프랑스 이주민들 까지 자극하거나 계몽(?)에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퀘벡 주민들에게 기존에 살던 그대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문화대로 살 수 있게 정책적으로 보장해 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형태로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퀘벡엔 프랑스어, 프랑스 문화가 그대로 굳어졌고, 영국이 새로 개척하여 영국 이주민들이 정착한 캐나다 서쪽 지역과는 차별되는 문화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배경을 이해하면 캐나다의 시초가 되는 퀘벡 사람들이 갖는 자부심도, 약 10여 년 전 퀘벡 독립을 시도했던 사건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프랑스 문화를 지키며 살고 있는 퀘벡에서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의 상징인 백합 문양, '플뢰르 드 리스(Fleur De Lis)'를 굉장히 자주 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창의 끝처럼 보이지만 백합 꽃잎을 표현한 것이다.)
사무엘 샹플랭이 퀘벡을 세운 것에서부터 최대 확장된 누벨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르봉 왕조의 통치 하에 일어난 일이라서 퀘벡 사람들에겐 플뢰르 드 리스가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프랑스에서는 왕정이 사라졌지만 이 백합 문양은 퀘벡의 상징으로 되살아나 지금껏 남아있다.
그래서 퀘벡의 공식 깃발에도 당연히 플뢰르 드 리스가 있고 퀘벡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문양이다. 참고로 부르봉의 흔적은 스페인의 국기(국장의 정중앙)에서도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스페인 국왕이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시대를 이끌었던 부르봉 왕조의 누벨 프랑스는 캐나다 남쪽인 미국에도 많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미시시피 강 탐사를 시작한 절대 왕권 '태양왕 루이 14세', 그의 영토라는 뜻인 'La Louisiane'는 영어식으로 루이지애나(Louisiana)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당시의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 강 상류인 5대호 인근에서 시작해서 하류인 뉴올리언스에 이르는 아주 거대한 땅을 의미한다. 프랑스가 인디언 프렌치 전쟁에서 패배하고 북쪽땅을 잃고 나서는 누벨 프랑스에는 루이지애나만 남게 되는데, 그 후 40년 뒤에 나폴레옹은 이 마저도 매각하면서 프랑스의 아메리카 대륙 내 식민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 정도 가치가 있는 땅을 팔아버렸다는 걸 쉽게 믿기는 어렵지만, 영국과의 전쟁으로 더 이상 식민지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기조하에 미국에 매각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는 하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지도를 볼 때 실수를 해서 원치 않게 큰 영토를 팔게 되었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 관리가 어려워져 처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아마 결정의 번복은 없었을 것 같다.
루이지애나를 구입한 미국은 이 땅의 영토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남부의 최대 도시인 뉴올리언스와 그 주변만을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으로 한정하고 그 외의 지역은 새로운 지명으로 구분하였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연으로 현재의 미국 지명에서도 부르봉 왕조의 흔적을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디트로이트(Detroit=해협)나 세인트 루이스(St. Louis, 루이 9세를 기념), 뉴올리언스(New+Orleans, 신新 오를레앙) 같이 프랑스식 지명을 가진 도시들도 많고, 이런 도시들에는 퀘벡에서와 마찬가지로 깃발 또는 휘장에서 백합문양을 확인할 수 있기까지 하다.
특히 버번위스키의 '버번(Bourbon)'은 말 그대로 부르봉을 말하는 것인데 옛날 루이지애나에 속해있던 켄터키의 '버번'이라는 지역에서 생산한 술이기에 붙은 말이다.
조금 더 자세한 퀘벡의 역사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래 선생님의 글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 브런치 작가 보현님 - "Je me souviens: 퀘벡의 명세"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