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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어른이 된 70년대생 소년의 WWE 직관기

Januray ~ November 2022

by Clifton Parker

(커버 이미지 : WWE Smack down 이벤트 중 하나였던 'Rk-Bro'와 'The USOS'의 Tag Match. The USOS가 입장하여 링 포스트에 올라서서 포효하고 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추억의 기록 & 정보의 공유를 위해 Albany 주변의 공연, 스포츠 경기, 이벤트 등에 대해 4편에 걸쳐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 미국 소도시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 보기 1/4에서 계속


2. MVP Arena @Albany, NY

작년까지만 해도 Times Union Center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MVP Arena는 뉴욕시티를 제외하면 Upstate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실내 경기장이다. (총 17,500석) 잠실 체조경기장보다는 크다고 한다. 다용도 실내 경기장이어서 농구, 아이스하키, 실내 풋볼, 각종 공연 등을 소화할 수 있는 곳이다. NCAA 대학농구도, 디즈니 아이스 쇼도 여기서 봤고 세인트 패트릭데이에도 이곳에 왔기 때문에 우리에겐 상당히 익숙한 곳이 됐다.

볼만한 공연이 많아서 나는 MVP Arena 홈페이지를 종종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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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MVP Arena 입구. 도로변 주차는 저렴하지만 자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경기장 주변엔 사설 주차장이 많다. (오른쪽) Clear Bag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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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VP Arena 내부 (왼쪽) 2층 좌석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오른쪽) 2층 복도엔 기념품 또는 먹을 거리를 판다.

경기장 앞에는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곳이 서너 군데 있고, 행사가 있는 날에는 경기장 내부에도 푸드부스가 세워진다. 관람객은 2층 복도를 통해 입장해야 하고 간단한 짐 검사를 한다. 규모가 큰 경기장일수록 짐 검사 규정이 엄격하다.

나는 미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을 법한 Clear bag, 즉 투명 비닐 가방을 하나 사서 가족 모두의 짐을 넣고 다녔다. 공연장 같은 곳에 입장할 때, Clear bag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열어서 보여주지 않고 바로 통과할 수 있다.


1990년대 남자아이들의 추억 - AFKN & WWE 프로레슬링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는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으며 TV는 평일 10~18시 사이엔 나오지 않던 시절이다. 요즘 어린이인 세은이는 아마 '화면 조정 시간'이라는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 당시 어린이들은 정규 방송 시작 전 30분 동안 나오던 그 무의미한 화면조차 멍 때리고 보곤 했다. 한국 TV 채널은 달랑 4개 (MBC, KBS1/2/3, 후에 KBS3는 교육방송으로 독립됨) 뿐이고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열심히 봤다. 그것뿐이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아주 특별한 방송, 채널 번호 '2번'에서 나오는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은 하루 종일 볼 수 있었다. 이 방송은 주한 미군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채널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히 영어 방송이다. 그 당시 국민학생 중에 영어회화를 배우는 아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정지화면이나 마찬가지인 '화면 조정 시간'도 보고 있는 아이들이다. 영어 따위 뭐가 문제겠는가.


AKFN은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을 위한 방송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것 그 자체였고 한국의 방송 검열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한국 방송에서 나오지 않는 특별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남자아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인 매주 토요일 오후에 하던 프로레슬링 WWE가 있었다. (당시 명칭은 WWF였으나 기존 단체와의 약어 중복으로 WWE로 변경됨) 이것은 90년대 소년들의 진정한 로망이었고 이걸 보지 않으면 다음 주 월요일에 친구들 사이에서 뒤처질 정도였다. 선수들이 링 위에서 쓰는 기술을 교실에서 따라 하기도 하고, 기술이 진짜네 아니네 말싸움도 하고, 학교 끝나면 오락실에 가서 헐크 호건이나 얼티밋 워리어 같은 캐릭터로 게임도 즐겨했다. AFKN에서 보던 프로 레슬링은 그 당시 남자애들 문화의 큰 축이었고 내 어린 시절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오락실이미지2.jpeg (사진) 90년대 오락실 풍경 (생성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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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0년대 오락실 필수 게임, WWF Superstars(왼쪽)와 속편인 WWF Wrestlefest(오른쪽), 이 게임에 바친 돈과 시간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나는 뉴욕으로 오게 되었을 때, WWE 경기를 꼭 한번 직접 봤으면 했다. 이제는 그 '국민학생 꼬마' 나이 또래의 딸이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미국에서 프로레슬링을 보는 것은 그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웬만큼 가까이 있는 것 같아서... 아내는 통 크게도 '뉴욕시티 정도면 혼자라도 다녀와'라며 긍정적이다. 고맙지만 알바니에서 뉴욕시티 이벤트 보러 다녀오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라서 고민은 된다.


중년의 아저씨를 찾아온 소년 시절의 꿈, Albany에서 만나다.

그러던 어느 날 MVP Arena의 일정표를 찬찬히 보니 4월에 WWE가 잡혀있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코비드 전엔 매년 한 번씩 알바니에서 경기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와, 이게 웬일?! 이걸 몰랐다면 뉴욕시티까지 갈 뻔했다. 아내에게 이 소식을 말하니 나 혼자 가란다. '그래, 국민학교 그때도 여자애들은 이런 거 관심 없었지.' 혹시나 해서 세은이에게 물어보니, 엄마가 안 가는 데도 아빠랑 둘이 가겠단다. 의외다. 오랜만에 세은이와 단 둘이 데이트까지 하니 일석이조다.

티켓 가격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다. 우리가 늘 앉던 1층 중간자리는 $70 정도로 다른 게임의 2배 정도인 것 같고, 사람이 워낙 많이 올 것인지 평소엔 선택이 되지 않던 2층 꼭대기 줄 좌석까지 예약할 수 있도록 열려있다. 링 바로 옆에서 선수들을 보는 자리는 무려 $1,000가 넘는다.

'이거 만만한 취미가 아니었구나. TV에서 봤던 링 옆의 관중들은 다 엄청난 사람들이었네.'


경기날에 MVP Arena에 도착해서 늘 가던 사설 주차장에 갔더니 주차비가 좀 비싸다. 이 근처 주차장들은 MVP Arena에 이벤트가 있는 날엔 'Event Parking' 정액제로 받는데, 보통은 $10 정도였는데 오늘은 무려 $25다. 내가 이제껏 본 것 중에 가장 비싸다. 확실히 미국에선 아직도 WWE를 많이 보나 보다. 경기장에 들어가 보니 사람이 정말 많다. 여기에 여러 번 왔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 처음 본다.

아직 경기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30년도 훨씬 넘게 지난 그 시절 친구들과 웃고 즐겼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내가 WWE를 미국에 와서 직접 관람하게 될 줄이야. 영어 한마디 모르던 그때의 한국 꼬마는 이런 순간을 맞게 될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상상할 수 없으니 꿈조차 꿀 수 없던 그런 꿈이었다.

20220422_183057.jpg (왼쪽) 경기 시작 전 경기장 모습. 관객으로 가득 찬 가운데 대형 스크린에 WWE의 로고가 보인다.
20220422_194141.jpg (사진) RK-Bro와 USOS의 Tag Team 경기 장면, RK-Bro의 Matt Riddle이 기술 시전을 준비하고 있다.
"WWE SmackDown returns to Albany, NY"

링 사회자의 소개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에 선수들이 등장할 때마다 폭죽과 화염이 터지고, 가득 찬 관중의 엄청난 환호가 쏟아지고, 링 위에선 선수들의 묘기 같은 기술이 펼쳐진다. 내가 국민학생 때 AKFN에서 보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프로레슬링은 생전 처음인 초등학생 세은이도 열심히 본다.

프로레슬링은 경기 자체가 그리 길지 않고 대부분 몇 분내로 끝난다. 오늘만 열 게임 넘게 하는 모양인데 경기 사이사이에 볼거리는 쉴 틈이 없다. 링 뒤편 화면엔 경기 전후의 선수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 다음 경기 소개, 지난주 경기 요약 등이 나오고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에도 지루함이 없다.

생각보다 여자 선수들도 많은데 날렵한 기술 선수뿐 아니라 큰 체격에 힘을 쓰는 여자 선수도 있다. 사실상 남자 선수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30년 전엔 여자 레슬러는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세상이 많이 변했다. 볼거리가 다양해져서 좋다.


사실, 프로레슬링은 승패를 두고 서로 진심으로 힘겨루기 하는 종목이 아니라 'Sports Emtertainment'라는 개념으로, 어느 정도 정해진 이야기와 틀 속에서 약속된 플레이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려하고 위험한 기술을 쓰는 프로레슬링 특성상 선수들은 심한 부상을 입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짜고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약속된 묘기'를 보여주는데 초점을 두어 생각하면 재밌게 볼 수 있다.

선수들은 현실감을 위해 진짜로 (다치지 않을 정도로) 때리기도 하고, 재미를 위해 과장된 행동도 한다. 선수에 따라 관중들에게 밉상이 되는 역할도 있고 그것을 무찌르는 정의의 사도도 있다. 프로레슬링은 일종의 드라마다. 오늘 경기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몇 번 나왔는데 세은이는 그게 좀 헷갈리나 보다.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세은아, 나이 든 아저씨인 아빠는 유치하기보다는 관중을 위한 선수들의 노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단다.'

(왼쪽) Cage 경기를 승리로 마친 Drew McIntyre가 철창 위에 올라서서 포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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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UFC 전 챔피언이자 WWE 최고 인기스타 Ronda Rousey의 등장. (오른쪽) Ric Flair의 딸 Charlotte과의 경기 중인 Ronda Rousey

어릴 때 WWE를 봤다고 해도 안 본지가 워낙 오래되니 요즘 선수들은 세세히 알턱이 없다. 그냥 흐름 따라 즐기고 있는데, 가장 마지막 경기의 선수들은 누군지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성부 경기, UFC 챔피언 출신인 론다 로우지(Ronda Rousey)와 샬럿 플레어(Charlottte Flair)의 경기가 오늘의 메인이벤트다. 론다 로우지는 이종 격투기 단체 UFC에서 여자부 흥행 전체를 책임질 정도의 최고의 스타였다. 격투기를 은퇴하고 WWE로 이적했는데 오자마자 여자부 최고의 인기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상대 선수인 샬럿 플레어는 아버지가 릭 플레어(Ric Flair)다. 릭 플레어는 50년을 프로레슬러로 살았던 WWE의 레전드 중의 진짜 레전드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 약간은 비열하지만 익살스러운 그의 캐릭터를 꽤 맘에 들어했다. 지금은 그의 딸이 챔피언이 되어 무대 위에 있고 내 딸과 나는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고 있으니 정말 뭔가 감개무량하다.

WWE 여자부의 라이벌답게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진행되었다. 재밌게도 딸은 아버지의 플레이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상대를 조롱하는 표정마저도 똑같아서 웃음이 났다. 샬럿, 아니 릭 플레어의 트레이드 마크인 조롱의 함성을 관중 모두가 따라 한다. 'Wooooo!'

[꾸미기]20220422_220857.jpg (사진) 경기를 보고 나와 레슬러들처럼 난간에 올라서 포효하는 우리 어린이.

팽팽하던 경기는 론다 로우지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돌아가고, 오늘의 모든 경기가 끝이 났다. 무려 4시간이나 경기를 했는데 이 정도면 비싼 티켓 값을 충분히 한 것 같다. 특히 릭 플레어의 딸이 경기하는 모습을 직접 보다니 정말 제대로 된 추억 여행이다. 정말 소원 풀었다. 관중석엔 우리처럼 (엄마 없이) 아빠와 아이가 같이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대를 이어서 즐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오늘 경기를 본 아이들은 나중에 자기 아이들을 데려오겠지. 불평 없이 끝까지 봐준 세은이에게도 좋은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도서관 수업에서 Owen과 Judy가 주말에 뭐 했나고 묻길래, 세은이랑 WWE를 보러 갔다고 했더니 선생님들이 그야말로 박장대소를 한다.

"그거 보기에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니니?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배우고 왔니?"

나도 웃기긴 한다. 미국에서도 프로레슬링이 40대 아저씨가 보는 이미지의 취미는 아닌가 보다. 한국도 그러하니 그럴 법도 하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 친구들에게, 수십 년 전 한국의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걸 보며 자랐는지, 그리고 내가 미국에 와서 직접 보게 되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등등을 얘기해 주었다. 선생님들은 내 얘기에 공감하며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를 '뭔가 엉뚱한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는 것도 기분 좋다. 사람들 사이에서 무색무취한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

생각해 보니 WWE는 추억 여행만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눌 좋은 얘깃거리까지 되어주었네.


정말 잘 다녀왔다. '어느 국민학교 소년의 꿈'


진짜 미국의 쇼 : Monstere Jam & Rodeo 3/4로 계속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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