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네. 꼭 맘먹고 운동 나가려면 비가 오더라 짜증 나게.
어째 운동은 매번 ‘시작’만 하는 것 같아서 영 언짢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지. 두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시험과 매달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다 보면 별수 없는 일이긴 하다. 날씨라도 내 맘 같으면 좋으련만, 가볍게 몸을 풀고 뛰러 가야 할 텐데 늘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럼 그렇지 싶은 거다.
처음 필라테스를 시작하게 된 건 아는 언니의 추천이었다. 사실 나는 원래 필라테스라는 운동에 꽤 부정적인 인식이 있지 않았겠나. 팔자 좋고 몸매 좋은 애들이나 하는 뭐 그런 거라는 인식 말이다. 일단 나는 팔자도 그닥, 몸매도 별로였으니까.
다만 당시 잦은 밤샘 작업으로 컨디션 난조가 심했고, 밥 먹듯이 손이 저렸던 나는 “병원은 죽고 나서 리스폰 하는 곳이 아니야”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병원엘 갔는데, 난데없이 디스크 위험군이라며 도수치료를 권장받았다. 하지만 여전히도 의사 말을 듣지 않는 나는 맨들맨들, 오밀조밀하게 생겨서 좋아하는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믿어 버린 게 그 시작이었다.
한데 막상 시작해보니 필라테스가 생각보다 나와 잘 맞는 운동이라는 걸 알아버린 거지. 격렬하지도 않고, 조용하고, 남의 시선에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되는 운동. 무엇보다 한 겹 한 겹 속 근육이 시원하게 뜯기는 기분에 꽤 고취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전히도 “척추를 하나씩 하나씩 쌓는다는 느낌으로 세워보세요~”라던가, “갈비뼈를 하나씩 하나씩 닫아보세요~”라는 말은 당최 무슨 난해한 헛소린가 싶지만 말이다.
나는 필라테스를 하면서 총 25kg를 뺐다. 이렇게 말하면 내 친구들은 당장이라도 수강권을 끊을 듯이 구는데, 유감스럽게도 필라테스는 다이어트 기여 비율이 0이다. 그저 온갖 나쁜 습관은 다 갖고 있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을 맘먹고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공교롭게도 필라테스를 함께 했을 뿐이다. 아, 물론 필라테스를 하면서 저질 체력과 더불어 갖고 있던 지병으로 조금만 움직여도 쌓이던 피로 때문에 움직일 엄두도 못 내던 기초 체력을 길러주고, 운동하는 습관을 만들어주었으니 기특한 녀석임이 확실하다. 다만 누가 다이어트를 위해 필라테스를 하겠다면 나는 말리겠다. 나는 혹독한 식단과 러닝으로 살을 뺐다. 이건 확실하다.
필라테스를 처음 시작할 때 심리적으로 가장 큰 허들은 운동복이었다. 그래, 그 쫄쫄이 레깅스 말이다. 나는 지금도 레깅스만 입고 다닐 용기는 없지만, 그때는 그 숭한걸 도대체 어떻게 입고 운동을 한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 생각은 딱 사흘만 했다. 지금은 운동복의 기능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레깅스 위에 대충 패딩으로 가려 입고 다닐 수 있는 겨울이 더 편한 것 같다.
그다음은 아무래도 매번 드는 멍인데, 이건 이제 반쯤 포기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다리뼈가 약하게 태어났다. 그래서 늘 잘 못 뛰었고, 다쳐도 유독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맨바닥에선 단 몇 초도 무릎을 못 꿇는다. 아무리 그 기구와 매트가 말랑거려도 금세 멍이 들어있는 다리를 보면 한숨만 나오지만, 뭐, 다리 예쁜 아이돌을 할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지.
타 운동은 아마 안 그러겠지만, 필라테스는 매주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시간표와 강사의 수업을 예약해야 한다. 강사마다 수업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초보 시절엔(물론 지금도 개허접이다) 부러 한 번씩 돌아가면서 받아봤다. 나에게 맞는 선생님을 찾아야 하니까. 이분은 너무 말을 자주 거시네…왕 부담스럽다…. 이분은 땀도 안 나고, 운동한 느낌이 전혀 안 나는걸? 헉 이 쌤은 날 죽이려나 봐.
그러다 적당한 강도의 만족스러운 선생님을 겨우 찾은 것인데, 아무래도 사람들 생각하는 건 다 똑같은 것 같다. 인기 있는 선생님의 수업은 정말 아이돌 티켓팅 현장을 방불케 한다. 오픈 시간 땡 하자마자 서버가 잠시 먹통 되었다가 풀리면 이미 인원이 풀로 차 있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대기 번호나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하여 이번에는 간만에 몸이 뻐근해 알람까지 맞춰놓고 티켓팅을 준비해 대기 번호 2번을 받았다. 이 정도면 꽤 고무적인 성과다.
“와, 쌤 진짜 오랜만이에요. 쌤 수업 예약 너무 빡세요~”
“그러게요~ 그동안 수업 잘 나오셨죠?”
“아뇨, 저 진짜 오랜만에 왔는데요?”
“아하하, 오늘 큰일 나셨네~”
“그러니까 살살해주세요~”
그런데 강사 선생님이 의욕 넘치게 손뼉을 짝 치더니 말하지 않겠나.
“자! 회원님들 추석 연휴 길게 쉬셨으니까, 오늘은 유산소 섞어서 좀 세게 가볼까요!?”
…뭐라고요 선생님…? 우리 이런 합의는 없었잖아요.
하여튼 필라테스는 기본적으론 근력에 기반한 운동인데, 가끔 이렇게 그들의 재량에 의해 유산소까지 굴리는 날이면 나는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수면욕이 쏟아지곤 한다. 아… 차라리 밖에 나가서 쓰러질 때까지 뛰는 게 낫겠어…. 고구마 엣지가 올라간 포테이토 피자 한 판을 혼자서 다 해치우고 혈당 스파이크가 터지면 딱 이런 기분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불안정한 기구 위에서 이딴 자세를 취하면서 이토록 졸음이 쏟아질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속으로 ‘선생님 너무 졸려서 죽어버릴 것 같아요…’라고 생각하면서 부들부들 그 자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전부 흘러있는 것이라 오랜만에 쏟아낸 체력이 기진맥진해 그저 쓰러져 드러누워 버리는 것인데,
“아, 마른틈님~~!! 아직 안 끝났어~~!!”
‘아아… 안 들려요 쌤…’
“수고하셨습니다~”
“와, 마른틈님. 그래도 체력이 많이 느셨어요!”
“아, 감사합니다. 하하”
그야, 쌤 수업 예약하기가 빡세니까요… 다른 수업이라도 들어야지 어쩌겠어요…
땀범벅인 몸을 이끌고 질끈 동여맨 머리를 풀어 헤치며 건물 밖으로 나오면 훅 불어오는 공기가 더 이상 여름의 것이 아니다. 그 쌀쌀한 공기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카디건의 심심한 구멍 속으로 끼치면 오소소 소름이 돋아선, 문득 완연한 가을이다 싶다.
하늘을 바라보건대 여전히도 내리는 가을비에 생각하기를, 아ㅡ 오늘은 안 뛰어도 되겠네. 다행이다. 푸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