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축복이다

by 오로라

니체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다.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정의인가!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서 인간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잊을 것이라는 위로


고등학생 때였다. 성당 학생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을 뽑는 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모든 학생이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뽑힐 확률은 아주 낮았다. 그리고 당시 나는 직책을 맡는다는 것 자체에 흥미도 없었고, 내가 그 일을 즐겁게 해낼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가만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는 이유로 부회장에 뽑히게 되었다.

어머나 세상에! 망연자실 그 자체.. 정신이 멍한 상태로 어영부영 임명장을 받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억지로 지워진 책임에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하며 일 년을 보냈다.


문제는 일 년을 마무리하던 날에 발생했다. 그저 적혀 있는 대로 글을 읽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무 떨린 나머지 첫 입을 떼는 순간부터 난리가 났다.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로 울리는 내 목소리가 마치 염소의 울음소리와 같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흑역사 감지 사이렌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컨트롤 타워가 작동하며 “이 순간을 짧게 만들라! 어서 빨리 글을 읽어버려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는 미친 듯이 빠르게 글을 읽어댔는데, 오.. 신이시여! 숨 쉴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숨이 막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무리하고 말았다. (워후.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니 수치스럽다.)


나조차 놀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몇몇은 킥킥거리고 웃어 댔고, 또 다른 몇몇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또 다른 몇몇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 한숨을 쉬고 단상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인데. 왜 나는 대담하지 못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다 끝나고 친동생이 나에게 걸어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누나. 괜찮아. 별일 아니야. “


별일이구나 싶었다. 아웅다웅 거리는 동생이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이 정도 말하는 거라면 정말 별일인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별것 아니라면 놀려야 하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었다. 그리고 한동안 이불 킥을 하며 밤잠을 설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일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만큼 별일이 아닌 게 되었다. 인생 최고로 창피했던 순간이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에 대한 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 이외의 타인은 아마도 이 일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것이다.


망각의 축복이다.


망각의 축복은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만약 나와 있었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헉! 저 사람은 내가 한 작은 실수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거야.’라는 생각에 그 사람은 이미 나에게 편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숨 막힌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 저 사람 나에게 이런 실수를 했었지.‘라는 마음을 가지고는 그 어떤 사람과도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고로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에도 어느 정도의 망각은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종종 이런 망각의 존재가 아쉬울 때도 있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망각과 마주하게 되면 그 속에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는 것이 그렇다.


소설을 쓰면서 내가 잊고 지냈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가 종종 있는데, 글을 쓰지 않았다면 이 순간을 떠올렸을까? 싶은 것들 말이다. 그 당시에는 잊지 않을 거라고 일기도 쓰고 머릿속에 꼭 저장하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기억들을 채우느라 점점 희미해져 버린 추억들 말이다.


사실 잊고 있었기에 당시를 떠올리면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기억 보정 필터가 작용하여 나의 청춘은 풋풋하고 아름다웠다고 추억하며 기억의 앨범을 넘기곤 한다.


그러고 보면, 망각을 꼭 아쉬워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당시의 첫 감정은 희미해졌지만,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망각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기억들은 조금씩 남겨줘~ 대신 창피했던 기억들은 모두 다 너 줄게~(윙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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