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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프랑스1_ 프랑스라는 나라, 그리고 루앙

프랑스 요약. 또한 전 프랑스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에 다녀오다

프랑스는 친구가 있어 일주일 이상 머무를 것을 생각하고 왔지만, 원래 내게 또한 관심이 꽤 높은 나라였다. 먼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에게 프랑스의 톨레랑스(tolerance: 자기와 다른 종교, 종파,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과 권리를 용인하는 일), 즉 관용 정신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둘째로, 정의를 추구해온 국가라고 생각했기에. 예로부터 유럽에 중심에 있으면서 현재까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대체로 주변국 혹은 세계적으로 1차 대전 및 2차대전 등을 겪으면서 대체로 정의에 편에 서온 나라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유로움 속에서 발전해 온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이렇게 '잘 살아온 역사'가 있었기에 군사 및 정치, 음식(기본 음식으로도 먹고살만하니 와인, 디저트 문화까지 발달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여기에 함께하면 좋은 문화적인 교양 및 예술 등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지금의 프랑스라는 나라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예상해 보았다.


프랑스 [ FRANCE; The French Republic ]
프랑스의 국기: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한다.
인구: 6655만 3766명 (2015년 현재)
면적: 64만 3801㎢
정치·의회 형태: 공화국, 대통령제
언어: 프랑스어
종교: 가톨릭, 무슬림, 유대교

개관
정식 명칭은 프랑스공화국(La République de France)이며, 수도는 파리(Paris, 행정구역 상 파리시의 인구는 약 220만 명이나, 위성도시를 포함하면 1,100만 명)이다. 면적은 64만 3801㎢로 한반도의 2.5배이고 유럽연합(EU)의 5분의 1의 넓이이다. 인구는 2015년 현재 6655만 3766명이다.

인종은 북부·중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켈트(Gaule 족)·게르만·노르만계가 대다수이고 소수의 라틴계가 혼재하며, 피레네 산맥 북부의 바스크족 50여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이다. 종교는 가톨릭교(81.4%)·이슬람교(6.89%)·신교(1.64%)·유태교(1.29%)·불교(0.68%)·그리스 정교(0.34%) 등이다.

역사
(1) 프랑크왕국의 건설
서기전 2000년경 북프랑스에 켈트족이 이동, 서기전 5∼3세기 사이에는 프랑스·영국·스페인 등을 정복하였다. 부족국가 간의 대립으로 서기전 2세기경부터 로마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게르만 민족 중의 프랑크인 이 세력을 확대,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 1세(Clovis I, 481∼511 재임)가 프랑크 왕이 되어 가톨릭교로 개종하고 프랑크인 교화에 착수하였다.
그가 죽은 뒤 8세기경에는 카롤링거의 샤를마뉴(Charlemagne)가 뒤에 대제(大帝)가 되었다(768∼814 재임). 그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에 걸치는 왕국을 건설, 그리스도교를 보급하였다.
800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대관되었으나, 샤를마뉴 대제의 사후 분열되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로 3분 되어 현재와 같은 프랑스의 판도가 정립되었다.

(2) 카페(Capet, H., 987∼996) 왕조로부터 대혁명기(1789∼1792)까지
서프랑크에 노르만족이 침입하여 이에 대전한 로베르 각의 후손인 카페가 카페 왕조를 건설함으로써 프랑스 왕국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왕조시대는 봉건제가 성립, 변용하는 시대로서 전체 중세사(中世史)를 통하여 영국과 끊임없이 대립·항쟁을 계속하였으며, 가톨릭교와 왕권을 강화하였으나 1328년에 단절되고 발루아(Valois) 왕조가 수립되었다.
이 왕조의 수립과 동시에 영국이 프랑스 왕위를 노림으로써 백년전쟁을 겪게 되었으며, 또한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여 군비·관료제·재정의 정비 등을 이룩하여 국내의 귀족을 억압함으로써 절대왕정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발루아 왕조는 16세기 말 신·구교도의 대립·격화·내란으로 결국 앙리 3세(Henri Ⅲ)를 최후로 단절되고 앙리 4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르봉(Bourbon, 1589∼1792) 왕조가 시작되었다.
앙리 4세 시대에는 종교적 내란이 종식되고 국력을 회복, 해외 진출이 현저하였다. 그 뒤를 이어 루이 13세(Louis ⅩⅢ, 1610∼1643 재임) 시대에는 귀족과 신교도를 억압, 30년 전쟁에 개입, 루이 14세 시대에 30년 전쟁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끝맺었다.
루이 15세·루이 16세(1774∼1792 재임) 시대에는 빈번한 해외 원정, 궁중의 사치생활 등으로 재정의 악화를 가져와 대혁명을 유발하였다. 18세기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舊體制)에 대해서 신흥 시민계급이 도전한 것이 프랑스 대혁명인 것이다.

(3) 제1공화정으로부터 제3공화국까지(1792∼1940)
프랑스혁명은 시민혁명이라는 데 정치적 의의가 있다. 절대왕정을 타파하여 봉건제를 일소하고, 입헌 의회제와 공화제(제1공화정, 1792∼1802)를 수립하고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였으며, 대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는 인간 및 민족의 국제적인 해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가 유럽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혁명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나폴레옹(Napoléon, B.)은 군사적 독재를 감행하면서도 혁명의 성과를 보장, 국민의 신망을 얻어 나폴레옹 1세(1804∼1805 재임)로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고 제1공화정은 와해되었다.
그는 혁명전쟁을 계승하여 혁명의 이념과 성과를 유럽 대륙에 전파하였으나, 프랑스의 침략성의 노정으로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을 야기하게 하여 1815년 완전히 몰락하였다.

그 뒤 부르봉 왕조에 의한 왕정복고(王政復古, 1814∼1830)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국제적으로 보수파인 빈 체제(Wien 體制)의 일환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으나 반동적인 성격으로 또다시 혁명을 유발하여 1830년 7월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이어 오를레앙가에 의해 7월 왕정이 성립되었으나, 1848년 2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제2공화정(1848∼1852)이 수립되었다.
2월 혁명은 혁명세력이 시민적 공화파와 사회주의적 공화파로 분열되어 전자가 승리하였으나, 이러한 대립을 이용, 보수파가 그 세력을 만회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와 같은 정세를 이용하여서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éon, B., 1808∼1873) 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1851년 쿠데타로 그 지위를 굳히더니, 1852년 나폴레옹 3세로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제2제정(1852∼1870)이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는 산업혁명의 진전, 크림전쟁에의 참가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함으로써 명성을 얻고,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멕시코 원정·보불 전쟁에서의 패배로 제2제정은 붕괴되었다.

1870년 제3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19세기 말까지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고 아시아·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대하였다. 1907년 프랑스·영국·러시아의 3국 협상체제를 완성하여 독일과 대립하였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 승리하였다. 베르사유조약에 의하여 독일의 약체화와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고자 국제연맹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었다.
독일이 베르사유 체제의 타파와 대외 침략정책을 계획하자 영국과 같이 유화정책을 채택하였으나 실패, 제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되었다.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는 투르, 뒤에는 보르도로 수도를 옮겼다. 여기에서 페탱(Pétain, H.P.)이 수상에 지명되고, 22일 휴전협정에 서명, 수도를 비시로 옮겨 독일군이 직접 지배하는 지역 이외의 지역을 통치하는 괴뢰정부화하였다.
이에 앞서 제3공화국 정부가 취한 최후의 행동은 6월 9일 비시에서 열린 양원 합동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비시 정부를 지지함으로써 제3공화국은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한편, 1940년 6월부터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독 항쟁을 계속 주장한 드골(de Gaulle, C.)은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연합군에 의하여 수복된 뒤부터 14개월 동안 임시정부(1944∼1946) 대통령으로 통치, 1945년 11월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1946년 4월 헌법 의결을 거쳐 9월 새 헌법을 의결하였으며, 10월 국민투표의 승인을 얻어 제4공화국이 성립하였다.

(4) 현대 프랑스(제4·5 공화국)
제4공화국(1946∼1958) 은 의원내각제의 모순, 군소 정당의 난립, 만성적 인플레이션,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베트남·모로코·알제리)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알제리 문제를 둘러싼 혼란 속에서 난국 해결을 위한 인물로 드골 장군이 지목되어 1958년 6월 1일 의회는 그를 수상으로, 또한 국민투표에 의한 승인을 거쳐 대통령으로 당선시킴으로써 제5공화국(1958∼현재)이 성립되었다.
1958년 10월 15일 수립된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드골은 1965년 12월 재선 되었으나, 1969년 4월 국민투표(상원 개편·지역 창설)에서 패배하자 퇴진하였다.

뒤를 이은 퐁피두(Pompidou, G., 1969∼1974 재임)가 1974년 4월 병사하자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 V., 1974∼1981 재임)이 정권을 인수받았으며, 1980년 5월 선거에서 야당인 사회당의 후보 미테랑(Mitterrand, F., 1981∼1995)이 당선됨으로써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제5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였으며, 군소 정당의 분립으로 인한 정국 불안을 막기 위하여 의회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였다.
대통령은 1962년 11월 6일 개정된 헌법에 따라 직접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7년이다. 대통령은 수상 및 내각의 임면권과 의회 해산권을 가진다. 수상과 각료는 국회의원을 겸직할 수 없으며, 하원(국민의회)이 정부에 대하여 불신임을 결의하면 내각은 총사퇴하여야 한다.
의회는 국민의회(577석, 임기 5년)와 상원(321석, 임기 9년)으로 구성되며, 국민의회 의원의 임기는 5년이고, 소선거구제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한다. 단 1회에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자가 없을 경우 2차 투표에서 최고 득점자가 당선된다. 상원은 지방 공공단체 대표로 임기는 9년이며, 3년마다 3분의 1씩 개선하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1995년 5월 7일 프랑스 대통령 선거 제2차 결선투표에서 공화국연합(RPR)의 시라크 후보가 조스팽 사회당 후보를 누르고 프랑스 제5공화국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시라크의 당선으로 14년간 계속된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권이 막을 내리고 보수주의 우파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5월 18일 주페(Juppé, A.)를 신임 수상으로 하는 주페 내각(각료급 장관 26명, 담당 장관 및 국무 상급 16명)이 출범, 주페 내각은 범우파 화합 내각으로서 제1당인 공화국연합(RPR)과 프랑스 민주연합(UDF), 공화당(PR) 등 우파의 각 계파의 안배가 고르게 이뤄졌다.
시라크 정권은 실업과 재정적자 등 프랑스 경제·사회의 당면 문제 해결을 우선 과제로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유럽 통합에서 주도적 역할 수행 등 프랑스의 독자적인 영역 유지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높은 실업률과 주페 내각의 유럽 단일 통화체제(EMU) 추진을 위한 긴축재정 정책에 국민의 불만이 높아졌다.

1996년 6월 총선에서 사회당의 죠스 팽이 수상으로 피선, 우파의 시라크 대통령과 좌파의 조스팽 수상이 이끄는 코아비타시옹(Cohabitation:동거) 정부가 탄생, 1986년과 1993년(미테랑 대통령 집권 시절)에 이어 세 번째 좌·우파 동거 정부가 탄생하였다.
6월 4일 조스팽 수상은 각료 26명 중 사회당 18명, 급진 사회당 3명, 시민운동당 1명, 환경당 1명, 공산당 3명 등 좌파의 거의 모든 정당을 망라하여 26명의 작은 정부를 추구하였는데, 여성 각료가 8명을 차지하였다.
동거 정부 하의 조스팽은 실업난의 해소,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 중단, EMU 정시 출범을 위한 긴축정책 추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조스팽 내각의 당면 과제는 실업 해결인데, 이와 관련 1997년 12월 17일 법정 주간 근로시간(35시간)을 단축하는 정부 측 안을 확정함에 따라 우파의 비판이 확대되어 동거 정부 내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1998년 1월 27일 법정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감축하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 3월 31일 2차 표결을 거쳐 최종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임금 수준을 감축하지 않으면서 2002년부터 법정근로시간을 35시간으로 단축하고, 그 이전에 자발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주요 원칙을 설정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프랑스는 미·소 등 초강대국에 맞서는 국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독자적 외교정책이 드골 대통령 이래 계속되고 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탈퇴, 핵확산 금지조약 비준 서명, 유럽공동체(EC) 경제권 강화, 대 러시아 외교 등에서 미국과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어느 강대국보다도 아프리카에 대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드골 대통령 이래 대소(1992년 대 러시아로 변경) 자주성 견지, 유럽 통합의 주도적 역할 수행, 제3세계 개발 지원 등을 통하여 미·러에 대응하는 세력권 형성을 추구하며, 국제사회에서 미·영 등 영어 사용국의 문화적 주도권을 견제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으로 의욕적인 범세계적 프랑스어 보급 확대 정책과 프랑스어권의 결속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유럽과 아프리카 중시 경향, 특히 아프리카 프랑스어권과는 막대한 경제원조 제공, 안보 협력, 연례 프랑스어권 정상회담 등을 통해 구 식민 종주국으로서의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국제경제기구 및 서방 경제 정상회담에서 아프리카 제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번영하는 경제권인 태평양 지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1993년 3월 수립된 우파 행정부도 유럽 통합 추진에 있어서 미테랑 전 대통령과 기본적으로 입장을 같이하고 있으나 유럽 통합 추진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1996년 6월 3∼4일 베를린 외무장관 회의에서 프랑스가 주장해 오던 ‘유럽 독자 안보 방위제’ 개념이 실현되었으며, 프랑스는 유럽 안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통일 독일을 동맹체 속에 묶어 놓는다는 NATO 정책을 수립, NATO 제반 기구 내에서의 프랑스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와 NATO 내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미국과의 알력 확산이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유럽연합 등에서 제3세계권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프랑스는 1998년 재발 조짐을 보이는 걸프 사태에서 미국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자제하고 정세를 관망하며 이라크와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유엔평화 유지군 안전보장을 위한 신속 대응 군(Rapid Reaction Forces) 창설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영국·네덜란드와 공동으로 신속 대응 군을 창설하여 2,000여 명의 중무장 병력을 파견하였다. 프랑스는 또한 최대의 평화 유지군 파견 국가이기도 하다(약 4,500명).

프랑스는 핵보유국이기도. 핵실험 재개 결정 이후 1995년 9월 5일, 10월 2일, 10월 28일, 11월 22일, 12월 27일, 1996년 1월 27일에 6회에 걸쳐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핵실험 횟수를 당초 8회에서 6회로 축소하여 1996년 1월 29일 핵실험을 완전히 종료한다고 발표하였다.

프랑스의 국방정책 목표는 유럽 안보 유지 및 자주국방 확립, 세계 안보에 기여하며 국가이익 보호, 국제적 무기 억제에 적극 대처함에 있다.ㅡ그 기본 원칙으로는 독자적인 국방정책 결정 및 우방국과 돈독하고 연대성 있는 관계 유지에 있다. 국방의 사명으로는 외부 위협 및 침략으로부터 국토방위 보장, 서유럽 방위에 참여, 해외 영토에 주재하는 프랑스 국민의 안전보장, 해운을 위한 해로 안전보장, 그리고 국제법 준수에 따라 국제 평화 유지 임무 수행에 있다.

프랑스군과 NATO 군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966년 이후 NATO 작전 지휘관에서 탈퇴하였으나 연락단을 상주시키며 NATOR NSDML 작전 활동에 계속 참여하고 있다. NATO 예산 부담은 1989년도에 17%(미국 23%, 영국 19%, 독일 16%, 이탈리아 6%, 캐나다 65%, 노르웨이 1.11%, 포르투갈 0.635% 등)이며, FATAC · AAFCE 협약을 준수하고 있다(공군). 프랑스군의 편제를 보면 육·해·공군 및 헌병 군의 4개 군으로 구성되며, 작전 기능별로는 전략 해군·전술핵 군·기동 군(기능 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8년 5월 현재 육군 23만 5,834명, 공군 8만 3,448명, 해군 6만 5,195명, 헌병대 9만 5,242명, 기타 공공서비스 분야 6만 8,561명 등 총 54만 8,280명이 된다.

해외 주둔군 및 파견 현황을 보면 프랑스의 해외 도(島) 및 영토(DOM-TOM)의 안전보장과 자국 국민의 보호 및 시간적·지역적으로 극히 제한적인 적대행위에 대응하기 위하여 해외 도, 영토에 군사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ST. Pierre & Miquelon(30명), Antilles(4,670명), Polynésie(3,710명), Guyane(3,620명), Réunion(3,690명), Nouvelle Calédonie(3,670명) 및 태평양 등 3개 해역(2,150명)에 주둔하고 있다.

좌파 정부의 경제정책 기본방향은 전통적 사회철학 기반 위에서 케인스 경제학의 재정정책을 전개하는 것인데, 노동 계층의 권익향상과 전 국민의 사회복지 수준 제고를 추구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가계 구매력 향상을 위한 조치를 통한 실업 및 성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또한 자유시장 경제 원리(기업가 중심)보다는 정부 주도의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실업 해소 및 경제성장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되, 그 방법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고용 창출에 노력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부의 출범으로 프랑스 텔레콤(France Telecom)·톰슨 씨에서 에프(Thomson CSF) 등 일부 주요 국영기업체의 민영화가 중단되었다.
프랑스 경제는 1994년 2.8%, 1995년 2.2%에 이어 1996년 1.3% 성장에 머물러 성장세가 계속 둔화되었으며, 1997년에는 약 2.3%의 성장을 기록, 임금 및 물가 상승은 계속적으로 안정적인 추세에 있다.

주요 산업은 철강·자동차·화학·농업 등이다. 미테랑 정부는 1982년 대대적인 국유화 법안을 발효시켜 전기통신공사, 유리·강철 공사, 알루미늄, 화학제품, 전자회사 등 5개 주요 기업그룹과 39개 은행 등 41개 금융회사를 국유화하였다.
프랑스는 서유럽 제1의 농업국으로 주요 농산물은 밀·보리·옥수수 등이며, 포도주 생산은 세계 제1위이다. 이밖에도 항공산업·방위산업 등 첨단과학 산업에서 주목받고 있다.
1993년 농산물 및 농구공 제품의 교역규모는 수출 1978억 프랑, 수입 1384억 프랑 규모로 563억 프랑의 흑자를 기록하였다. 프랑스는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농산물 수출국이다.

의무교육은 6세부터 18세까지 실시되고 있다. 일간지 약 100개와 세계 4대 통신사의 하나인 AFP가 있다. 라디오 방송은 국영인 ORTF 등 14국인데, 미테랑 사회당 정권의 등장 후 자유화되어 사설 방송국이 난립하고 있다. ORTF는 텔레비전 3국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랑스 [The French Republic]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프랑스 국기 및 삼색의 각 상징성
프랑스 지도 <구글>
<두산백과 두피디아 - 프랑스의 행정구역 등>

참고로, 현재 프랑스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은 최근 재선에 성공했고 2017년 당시 만 39세에 프랑스 역대 최연소 대통령. 중도우파의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하며 마크롱이 연임에 성공한 것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도 크다고 한다. 또한 그의 배우자인 영부인이 무려 25살이나 연상이라고 하니, 이 또한 프랑스의 문화적인 톨레랑스를 떠올리면 이해가 될 법도 했다. 물론 25세의 나이차는 프랑스에서도 꽤나 높은 거지만, 10살 내외로는 크게 문제 되는 것도 없는 것이 프랑스에서 특히 느낄 수 있는 문화인 것.


이제는 나도 이런 역사 탐구가 재미있는 거 보면, 뭔가 변태가 되어가는 느낌... 의미심장한 변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좋은 의미로의 변태를 의미한다.



그렇게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이젠 유럽의 마지막 나라로 여기서 출국을 앞뒀고 친구 집이어서 그랬는지 긴장이 풀어졌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간 밀린 잠을 푹 자고, 음식을 먹고, 이렇게 프랑스와 프랑스 여행지에 대한 관련 책들을 봤다. 또 지금 다시 프랑스에 대한 자료를 찾고 읽어가면서, 예상보다 많이 적고 있다(사실 한국과의 관계 문헌까지 읽다가 너무 길어져서 작성 포기. 지식백과 '프랑스' 적어보시면 나옴). 자국을 먼저 선진화를 이뤄놓고, 과거의 식민지 개척을 한 국가들까지도 현재에 지원을 해주고 관계를 이어가는 것으로 해외 관계국까지 관리를 하면서, 동시에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여러 활동으로도 연결해 지금까지도 세계에 영향력을 건설적으로 끼치고 있는 점 등... 이런 사실들을 보면 참 배울 게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 지금도 들었다.

데워먹은 냉동 피자
이따금 먹곤 한, 친구가 만든 마카롱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음식인데 겉바속촉. 맛있었던
맛이 좋던 수프
이것도 이름을 까먹었는데, 친구가 조리해 줬다. 의외로 신선했고 잘 먹었던 기억
프랑스의 1664크로넨버그 맥주 / 내가 밀라노에서 사 온 이탈리아 와인으로 기억

그날은 이런 음식들을 먹고, 뒹굴뒹굴했던 기억이...






다음날, 오전 느지막이 프랑스의 옛 수도였다는 루앙으로 향했다. 사실 여기는 원래 여행 계획에는 없었던 도시. 여행 막바지라 에너지가 좀 소진되었을 때라 천천히 파리와 몽생미셸 말고는 크게 가고 싶은 곳이 없었는데, 편도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친구가 추천해서 가보았다. 친구가 유학 생활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프랑스에서 의미 있는 도시로도 통한다고...

오전에 먹은 닭 파스타. 이게 당시 대략 3천 원 정도의 물가
파리 동역 - 루앙 역(Gare de Rouen), 2시간 소요. 유레일 소유 시 무료였음
나비고를 살 수 있는 키오스크
Navigo(나비고)
1. 개요
프랑스의 비접촉식 교통카드. 나비고, 이 마지네라고 부른다.
정기권용 카드와 통상 승차권용 카드가 별도로 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처럼 금액 단위로 충전해서 쓰는 식이 아니다. 정기권 용 카드의 경우 기간은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으로 충전할 수 있으며, 본인이 원하는 존을 설정 가능하며 지정하는 존마다 가격이 다르다. 일주일, 한 달은 각 지하철역의 나비고 충전 기계에서 충전 가능하며 일 년짜리는 인터넷으로 따로 신청해야 하며, 약 두 달 치 요금 정도의 할인 효과가 있다.

2021년 1월부터는 Apple Pay로도 사용 가능.
참고로 유명 관광지의 유료 화장실에서 나비고 카드가 있다면 무료로 사용 가능하다.

2. 가격(2017년 8월 이후)
1) 일주일 권
 - 모든 존: 22.8유로 / 주
 - 2~3존: 20.85유로 / 주 등
*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유효(유효기간이 7일이 아니다).
전 주 금요일부터 이번 주에 쓸 일주일권을 충전 가능
모든 존이 아닌 2-3/3-4/4-5 존 나비고 신청자의 경우 몇몇 경우에 한해 모든 구간을 이용 가능
나무위키 - 나비고

어휴, 지금 다시 찾아봐도 내용이 다소 복잡하다. 이처럼 관광객에겐 이용 방법이 조금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보통 프랑스 여행객은 파리로 들어와 숙소를 잡고 파리 주변으로 여행을 많이 해서 하루씩 며칠 분, 혹은 일주일 분을 구매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난 당시 적은 기록을 보니 1회 권 10장 묶음 티켓을 11유로에 샀었다(위의 나비고 가격이 5년 이상 지났지만, 대략 하루에 3유로 정도 하는 셈). 이렇듯, 프랑스 여행에서는 보다 자세히 계획을 세워둬야 그에 맞는 합리적인 교통수단을 구매하여 보다 여행비를 아낄 수 있을 것. 보통 나비고 일주일 이상 티켓은 가격이 좀 비싼 편이기에.

숙소 - 시외 철도로 갈 수 있는 생 라자르(Saint Lazare) 역까지 나비고를 이용해 메트로 등을 타고 가서
여기서 유레일패스 소지 면 탑승 가능했고, 보통 1등석이 추가 요금을 내야 탑승 가능. 난 2등석으로 타고 루앙 역으로 향했다




루앙 [ Rouen ]
프랑스 노르망디 레지옹(Région) 센마리팀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
위치: 프랑스 노르망디 레지옹(Région) 센마리팀 데파르트망(Département)

프랑스의 도시.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23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는 프랑스 북부 행정 구역인 오트 노르망디(Haute-Normandie)의 중심 도시였으나, 2016년의 레지옹 개편으로 오트 노르망디가 노르망디에 합병되어 노르망디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센 강이 시내를 통과하는데 센 강을 기준으로 오른쪽의 구시가지와 왼쪽의 신 시가지로 나뉜다.

켈트 시대부터 있었던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고대 로마가 켈트를 정복한 이후로는 로마 제국의 도시가 되었고 이 당시에는 '로 토마 구스'로 불리었다. 서로마 제국 붕괴 후에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였으며, 9세기에 롤로 휘하 노르드 딘에게 정복당하고 서프랑크 국왕 샤를 3세가 이들을 회유하면서 루앙 백작령이 성립하였다. 루앙 백작령의 노르드인 집단은 곧 세력을 확장하여 노르망디 공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곳에서 라틴화를 겪으면서 탄생한 노르만인이 윌리엄 1세를 따라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법적으로는 프랑스 왕국에 속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잉글랜드 왕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도시는 프랑스 왕국 군주들이 권력을 강화하고 국내 영역 제후들을 제압해나간 결과 1204년에 다시 프랑스령으로 탈환되었으나, 백년전쟁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1449년에야 다시 프랑스 소유로 돌아오는 등 그 소유권이 양국을 자주 오고 가곤 했다. 양국 간 왕위 계승문제가 마무리되고, 15세기 이후로 평화를 되찾는 듯싶었으나 16세기 위그노 전쟁에서 피해를 입었는데,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회하여 개신 교도들의 반 이상이 도시를 떠났다. 19세기가 되어서는 직물 교역으로 번영을 맞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도시의 많은 부분들이 파괴되었다. 이렇듯 전쟁을 많이 겪은 역사적으로 굴곡이 큰 도시이다.

현재의 루앙은 수도 파리와 가깝고 항구가 있는 쩍 환지(積換地)의 이점 덕에 중화학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루앙이 중화학 공업의 도시로 거듭난 데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한 노력도 있다. 또한 19세기부터 직물 교역이 번성해서인지 현재도 면 제조업이 활발한 편이다.

관광지로서는 시계탑, 루앙 대성당 등 고딕 양식과 플랑 부아 양 양식의 건물들이 주요 볼거리이며, 잔 다르크가 화형 당한 곳이자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모리스 르블랑, 프랑수아 올랑드 前 대통령, 영화감독 자크 티베트의 고향이기도 하다.
루앙 - 나무위키
루앙역(프랑스 발음으로는 후앙)
루앙역에서 만난 SNCF 철도 직원분들 / 삼성전자 폰을 쓰고 있던 삼성전자 폰을 쓰고 있던, 큰 누나인 줄 알았으나 친구뻘인 프랑스녀

혼자 다니는 여행길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미소로 나를 대해주며 루앙에 간 것을 환영해 주었다.

참, 왼쪽 직원분들에겐 파리로 돌아가는 차편을 정확히 물어보았다. 유레일 타임테이블 표가 있지만, 가끔 시간이 틀리다고 했다. 그래서 차편 시간을 언제까지 돌아와야 하는지 알기 위해 습관적으로 물어보곤 했다.


루앙은 크지 않은 도시로 기억하며, 걸어 다니면서 산책하기 좋았던 거 같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루앙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
루앙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
노르망디 대 주교가 있는 전통적인 프랑스 북부지역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 침략과 파괴의 역사로 인해서 끊임없이 계속 부수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다. 151m로 프랑스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가지고 있으며 생 로망 타워(La Tour de Saint-Romain)와 버터 타워(le tour de Beurre, 75m) 등 2개의 탑인데, 특히 버터 타워는 사순절 기간 금기했던 버터에 매긴 세금으로 세워졌다. 4세기경 세워진 성당이 있던 자리에 바이킹 두목 롤로(Rollo)가 성당을 부수었다. 다시 세워진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이곳에 묻혀 있다.

생 로망 타워는 1035년에 지어졌으나 12세기에는 번개로 불타기도 한다. 13세기 최고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자랑하는 샤르트르의 파란색도 지금 일부 남아 있다. 이후 번개로 인한 화재를 경험하다가 15세기가 돼서야 현재 생 로망 타워의 층이 세워지고 16세기에 버터 타워가 건설된다. 종교 전쟁, 프랑스혁명, 허리케인, 세계 2차 전쟁을 경험하고도 지금과 같은 형태가 남아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모네의 대성당 연작 시리즈로 유명한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앙 대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 (프랑스 루앙 여행)


루앙 시계탑
루앙 시계탑(대 시계) [ Le Gros Horloge ]
오래된 지역의 역사를 가진 지구에 위치한 14세기 만들어진 기계식 시계이다. 고딕 라요 난타(Gothic Rayonnant) 양식에서 플랑 부아(Flamboyant)가 모두 잘 나타나는 것으로 고딕 양식의 오래된 종탑이 있었는데, 루앙의 거주자들이 새로운 종탑을 건설한다는 핑계로 기존의 탑을 없애고 시계 부분만 남겼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기계식 시계라고 볼 수 있다. 시계는 처음에는 문자판 없이 만들어졌고 시침으로만 시간을 표시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웰스 대성당 시계(Wells Cathedral clock)보다 2배의 크기를 가지고 있고 그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가장 큰 크기와 형태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달의 모양을 보여주는 상단의 원형의 눈이 있고, 아랫부분은 요일 표시하기도 하며, 시침만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탑 내부에 입장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루앙 대 시계 [Le Gros Horloge] (프랑스 루앙 여행)
뾰족한 탑을 가진 건물이 많이 보였다

이 뾰족한 탑은, 전에 독일에서 스트라스부르를 여행했을 때 본 건물들과 비슷했다. 아마 건축양식이 비슷하지 않을까 예상한다.


이렇게 큰 성당은 유럽 곳곳에서 볼 수 있었으며 그들의 문화이자 삶

이렇듯 루앙은 위에 적은 대로 프랑스 및 유럽 역사 관련하여 역사 여행지로 방문하면 좋을 곳이라고 생각한다. 참, 프랑스에서 1400년 초에 활동한 여전사인 잔 다르크가 처형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거긴 열차 시간이 늦어질까 봐 가지 못했다.


잔 다르크. 꽤나 유명한 인물이라,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잔 다르크(Jeanne d'Arc)
가톨릭의 성녀(聖女).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17세 때)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신농성(城)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 파(派)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 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갔다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戴冠式)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 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찍혀, 이단(異端)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잔 다르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백년전쟁' 요약표 <두산백과>

요약하면, 그녀의 엄청난 활동은 단 2년 정도에 이뤄졌다. 어느 고향에서 소녀로 살던 1429년의(17세 때)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여군이 되어 1년여간 각지에서 엄청나게 영국군을 무찌르는 위대한 업적을 세우다가, 부르고뉴 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져 다음 해인 19세에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찍혀 화형을 당하였다고...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이었다.

어느덧, 열차 탑승 시간이 가까워서 역으로 바삐 발걸음을 돌렸고
다행히 파리로 가는 열차에 늦지 않게 탑승
다시 2시간쯤 걸려 파리역으로 돌아왔고

8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와, 그날도 일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 그리고 일본 친구인 유사쿠와도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음료 맛이 났던 와인
에스카르고 - 식용 달팽이 요리
이 역시 이름을 잊었다. 맛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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