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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Sep 22. 2023

그럼에도

(2화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나는 재수를 하지 않고, 대학에 갔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이화여대 앞 거리에 갔다. 전철로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초행길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비교적 새롭게 사귄 탓에 나는 친구에게 물어볼 말이 많기도 하였고, 대학생들이 모여든다는 거리를 간다는 기대감에 한껏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일이 무얼 뜻하는지 몰랐어도, 그 당시 나의 관심은 그 일에 향해있었다.


당시에는 ‘이대 앞’이 핫플레이스였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르륵 늘어선 작은 점포들 수에 놀라고, 가게 안의 옷들이 죄다 근사해 보여서 놀랐다. 스피커에서는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길 속으로는 어른스러운 옷차림의 이들이 쏟아졌다. 나는 촌사람처럼 연신 두리번거렸다.


친구와 나는 기나긴 고민 끝에 연한 하늘색 반바지를 하나씩 샀다. 우리는 똑같은 바지로, 막상 어른이 되려니 두려웠던 마음을 반씩 나누었다.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우리는 새로 산 바지를 입고서 이화여대 앞을 또 가기로 서로서로 약속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흉내를 낸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닌데, 그 당시에는 옷차림이라도 그럴듯하게 따라 하면  금방이라도 어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바지는 다시 입어 볼 수 조차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책상 위로 잘게 조각난 천들이 한데 모아져 있었다. 옆에는 가위가 놓여 있었다. 


거실로 나가보니,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살기 어린 눈을 하고선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책상 위에는 천조각들이 쓸모를 잃은 채 나뒹굴지도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가위를 집어 들고서 엄마가 만들어서 내 방 창가에 달아 둔 커튼을 잘라버렸다. 그러고는 학교를 다녀왔다. 나는 온 집안이 뒤집어질 줄 알았다. 책상이 엎어져있고, 전등이 깨져있고 보란 듯이 내 방이 난장판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한층 풀어진 표정이었고, 내방은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척, 정리가 되어있었다. 가위는 어디에 치워버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해에 수능을 치른 언니가 집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따귀를 후려 맞은 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커다란 보석알이 박힌 반지를 낀 손으로 얼마나 세차게 내리쳤는지, 힘겹게 집에 들어선 언니의 볼에 곧바로 길게 핏자국이 나버렸다. 언니는 상처가 낫는 동안에 볼에 연고를 발라대며 그 상처를 칼빵이라며 실없는 농담을 했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다음은 나였다).


난동을 부린 전적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수능을 망치고도 적어도 현관에서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다. 물론 제 욕심 하나로 뒷바라지를 하던 엄마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고, 이공계 기숙학원의 전단지를 들이밀었지만, 나는 일말의 상의도 없이 대학교 지원서를 내버렸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대학의 그나마 따분해 보이지 않는 학과에.


가위질에는 가위질, 통보에는 통보. 슬프게도 그것이 19살의 내가 우리를 벗어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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