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나의 글자들이 안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다소 늦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하고 싶은 일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해 보게 되었었다.
그런 일에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교과서의 여백에 선을 그려 넣는 순간들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얼 표현할지 계획을 하고 하는 행동이 아닌 탓에 그 끄적임들이 언제나 나의 심중에서 내미는 손 같았고,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진솔하게 사는 일이 막상 왜 중요한지는 몰랐어도 그런 방식이라면, 나는 나로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나는 어릴 적 수많은 학원을 전전했어도 공교롭게도 미술학원은 다녀보질 못했다.
지지부진한 받아쓰기 때문에 어릴 적에 글쓰기를 따로 배우게 된 적은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칭찬했고,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내가 쓴 동시들을 한 장씩 따로 출력해서 코팅까지 해 주었다. 날아갈 듯 기뻤지만 나는 이내 글쓰기 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이름 석자를 적어 내버렸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에드나(영화 인크레더블의 등장인물) 같은 단발머리를 한 나의 선생님은 아이가 긴장하면 그럴 수도 있다며 내 편을 들어주었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글쓰기 학원에 갈 수가 없었다.
이내 다른 학원에 보내졌다.
목동에 살 적이라서 동네에 커다란 아이스링크장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덩치가 큰 아이들과 함께 스피드 스케이팅을 배웠다. 수업이 끝날 때면 매번 시합을 했는데 꼴찌는 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링크장에 데려다 놓는 바람에 그러려니 다녀야만 했다.
나의 장래희망도 엄마의 머릿속을 쫓았다.
엄마는 네가 파스텔 톤 원피스를 입고서 의과 대학의 캠퍼스를 걷는 상상을 해보라고 했다. 네가 얼마나 예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좋아할지 모른다며 온 얼굴에 미소를 드러내면서.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었다. 내가 아는 나는 병원을 지독히 싫어했다. 지금도, 점만큼은 한결같이 변하지 않아서 나는 병원에서 머무는 대신에 자연치유를 선택하고선 아이폰을 남긴 채 쿨하게 세상을 등진 스티브잡스가 멋있기만 하다.
아무튼 나는 잘못을 되짚어야 했다. 유치원의 소꿉놀이에서 콩가루가 맛있길래 그걸 포장하여 치료약이라고 말하며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는 간호사 역할을 맡아버린 게 문제였나,...
엄마의 바람과 달리 내 성적은 해를 거듭할수록 떨어졌다. 결국 엄마는 시무룩한 얼굴로 그럼 약대에 가라고 말했다 - 하얀 가운 못지않게,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대학이라는 점도 강조되었다.
불행 중 다행히, 나는 수능시험을 망쳤다.
솔직히 별로 속상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게임을 할 때, 한 판을 장렬히 전사하고 난 뒤에 새로운 목숨을 부여받은 기분마저 들었다. 드디어 미술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굳은 표정이기는 했지만, 엄마는 웬일로 미술입시학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너무 쉽게 떨어진 허락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슬그머니 엄마를 다시 믿어버렸다.
함께 전철을 타고 서울의 어느 미술학원에 찾아갔다. 무표정한 새하얀 석상들 사이로 커다란 하얀 종이들이 세워진 곳이었다.
나는 간단한 면담 후에 등록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의 가방 안에서 나온 것은 하얀 봉투에 든 학원비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나의 일기장이었다.
엄마는 내가 제지할 새도 없이 미리 모든 걸 준비해 둔 교묘함처럼 단번에 특정 페이지를 나와 입시 상담을 맡은 이 앞에 펼쳐 보였다. 그러고는 얘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난리법석을 피웠다.
테이블 위로 얼굴을 내민 - 사적인 - 나의 일기장의 한 페이지에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로는 고개를 하늘로 치켜세운 채 날아오르지 못하는 붉은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