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드러나잖아요?
말을 할 때, A를 A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A를 B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핑계는 주로 이렇다. '직설적이면 상처가 되니까.'라는 경험적 배려라던가, '돌려 말하는 게 낫지.'라는 맹목적인 학습의 결과. 전자의 경우에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태도로 상대를 배려한다는 이름으로 우회해서 꼬아 말한다고 지적할 수 있고, 후자는 맹목적으로 기준도 없이 대답했다며 지적할 수 있다. 보통 대답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 중 꽤 많은 부분은 '내가 싫어서, 혹은 내가 감당하기 싫어서.'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싫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싫은 일들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고통을 알고 있으니 남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자신이 듣기 불편했던 말들을 남들에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표현에서만 그렇지 않은가 생각한다. 나는 꼰대의 불편한 조언이 듣기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조언이나 피드백이랍시고 남들의 입장과 의견을 덜 고려한 채로 내 의견을 덧붙이지 않았나. 꼰대처럼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표현만 쓰지 않았을 뿐.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과연 조언으로부터 당당한가? 표현이 다르면 메시지가 달라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싫어서'의 정의도 분명해져야 하지 않을까. 표현이 싫은 것인지 본질이 싫은 것인지. 누군가는 조언이고 멘토인데, 누군가는 지적이고 꼰대라면 그 차이는 무엇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결국 나는 조언의 본질보단 비논리적인 껍데기가 싫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비논리가 싫은 나처럼, 누군가는 욕설이 싫고, 폭력적인 표현이 싫은 것이다. 불호의 화살을 제대로 겨눠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하면 돌려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런 표현은 쓰이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감당하기 싫어서.'는 어떤 항목인가. 이 경우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해가 확실한 사람들이겠다. 누군가는 하고픈 말을 한 뒤에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 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항상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 저거 아닌데.' 표현의 자유는 표현을 통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그 의견에 대한 상대의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는 상호작용에 대한 선언이다. 한마디로 내가 누군가에게 의견을 내비치고 난 뒤, 합법적 영역에서 상대도 내 의견에 저항하거나, 동조하거나, 불편을 느끼거나, 묵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결괏값의 자유까지를 존중하는 것이, 세상이 이야기하는 표현의 자유일지언데. 정말 소수의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왜 발설의 자유+대답의 금지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나 역시, 상대의 침묵을 버티지 못한다. 내 표현에 대한 상대의 '침묵 표현'을 잘 버티지 못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제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결국 내가 감당하기 싫다는 말은, 에둘러서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그냥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 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인데. 이 또한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세상에 끝까지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있었던가? 이년 전쯤 친구들과 재밌게 본 영화가 있다.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에서는 서로가 홈파티 식사 자리에서, 핸드폰 연락 내역을 모두에게 공개하자는 내기를 제안한다. 결국에는 가정법으로 마무리되는 if의 세계였지만, 영화의 끝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수신 내역이 내게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다. '진실이라면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고, 아무도 모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은 결국 드러난다고 한다. 아무도 모른다고?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그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있기에, 진실은 결국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나는 진실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서서 꺼내놓는 건 조금 부끄럽거나, 수치스럽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이겠지만. 필요한 상황에서 적절한 때에 진실을 숨기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귀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관계를 조금 정리했다. 사람에게 귀찮다는 말을 붙이기가 참 어려웠지만, 애정이 부족한 관계이거나, 구속력 없는 책임감만 남은 관계가 그런 사례에 해당했다. 이런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어리석게도 내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정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슬프고 힘들었지만, 서로에게 쌓인 오해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누군가를 잠식하는 일이었다. 내가 잠식당하던 순간들을 해방시켜준 그들처럼, 나도 누군가를 잠식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다가. 진실을 인정할 타이밍을 발견했을 뿐이다. 나는 진정으로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고, 언젠가 서로가 닿게 될 때에 또 다른 진실로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어제의 우리는 서로를 속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