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라로이드 SLR 690
기억은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하고,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미래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만약 기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영화 <메멘토>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주인공 레너드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이라는 개념의 본질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탐구합니다.
레너드는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새로운 기억을 10분 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는 자신의 단기 기억상실증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죽인 범인 ‘존 G’를 찾아 복수하려는 집념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닙니다. 영화는 컬러와 흑백 장면을 교차시키며 현재와 과거를 병렬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독특한 서사 구조는 관객에게 레너드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체험하게 하고, 그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헤매는 모습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레너드는 자신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는 몸에 중요한 정보를 문신으로 새기고, 메모를 남기며, 특히 폴라로이드 SLR 690 카메라를 활용해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 단서를 기록합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그의 기억력을 대신하는 보조 장치이자, 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붙잡아두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폴라로이드 SLR 690은 1970년대 후반에 출시된 고급 즉석카메라로, 당시 혁신적인 기술을 자랑하던 모델입니다. 이 카메라는 자동 초점 기능과 내장 플래시를 탑재해 어두운 환경에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즉석 필름으로 촬영 후 몇 초 안에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어, 레너드처럼 기억이 제한된 상황에서 빠른 기록이 가능했습니다.
폴라로이드 사진은 레너드에게 단편적인 정보를 저장하는 매개체가 되지만, 동시에 그의 혼란과 왜곡된 시선을 담아냅니다. 사진 아래 적힌 메모들은 그의 판단 기준이 되지만, 그 메모가 진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진은 오히려 그를 더 깊은 미궁으로 몰아넣습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레너드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즉석 필름이 현상되는 과정은 마치 그의 단기 기억이 형성되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필름처럼 그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사라집니다. 이는 레너드가 끊임없이 새로운 사진을 찍고 메모를 남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을 대신해 물리적 기록물에 의존하지만, 그 기록물조차 완벽하지 않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레너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메모와 사진들조차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과 혼란 속에서 사진 아래 잘못된 정보를 적으며 이를 사실로 믿고 행동합니다. 예컨대, 경찰관 테디의 사진 아래 "그를 믿지 마라"라고 적힌 메모는 테디가 실제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관객은 점차 이 메모조차 레너드가 자신의 혼란 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진실과 거짓 사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영화 내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진실을 기록하는 동시에 거짓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레너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찍고 메모를 남기며 그들을 신뢰할지 말지를 판단하지만, 결국 그 판단조차 왜곡된 정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충격적인 진실——레너드가 이미 복수를 완수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존 G’를 찾아 복수를 반복한다는 사실——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얼마나 모호한 역할을 하는지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기억과 기록물을 조작하며 끝없는 순환 속에 갇혀 있습니다.
기억이라는 퍼즐 <메멘토>는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진실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폴라로이드 SLR 690은 이러한 질문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도구입니다. 즉석 사진이라는 물리적 기록물은 레너드에게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기억의 형태지만, 그 자체도 그의 왜곡된 시선과 욕망에 의해 조작됩니다.
<메멘토>는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기억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의 경험에 기반한다지만, 만약 그 경험이 왜곡되었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레너드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복수심을 놓지 못하고 새로운 ‘존 G’를 찾아 나서는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때때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폴라로이드 SLR 690에 담긴 이미지처럼 우리의 기억도 순간적으로 형성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메멘토>는 우리에게 삶과 기억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