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라는 단어를 보면 머릿속에 어떤 색깔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아마도 회색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도시는 바닥을 바라보면 특징 없는 보도블록과 검은색 아스팔트 포장 도로, 고개를 들면 다닥다닥 붙은 무채색 계열 건물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을 대표하는 색깔로 회색을 떠올리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죠. 많은 사람에게 도시는 삭막한 공간입니다.
그런 도시에도 식물원 못지않게 수많은 식물이 자라며 계절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도시에서 꽃을 볼 수 있는 곳은 길가에 조성된 화단뿐만이 아닙니다. 과장을 보태자면 흙이 조금이라도 드러난 모든 곳에서 수많은 식물이 다채로운 색깔의 꽃을 피웁니다. 누가 키우고 돌보지 않아도 말입니다. 제 눈에 도시는 꽤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다만, 거저 보이는 존재는 아닙니다. 논어(論語)의 ‘학이(學而)’ 편을 인용하겠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약간의 수고와 관심을 기울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우선 저의 오래된 이야기로 운을 띄워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지난 2003년 초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이 ‘똑딱이’(콤팩트 디지털카메라)를 대체했지만, 그 시절엔 ‘똑딱이’도 귀한 물건이었죠. 당시 처음 ‘똑딱이’를 마련한 저는 렌즈에 담을 무언가를 찾는 데 혈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 겨울의 때를 제대로 벗지 못해 무채색이더군요.
하릴없이 땅을 보며 걷던 저의 눈에 하늘빛을 가진 조그만 무언가가 들어왔습니다. 겨우내 삭은 낙엽을 뚫고 올라온 작은 꽃 한 송이. 그 들꽃이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접사로 꽃을 촬영한 뒤 가까운 서점에서 식물도감을 뒤져 녀석의 신원을 파악했습니다. 이름은 구슬봉이. 쌍떡잎식물 용담목 용담과의 두해살이풀. 생김새처럼 앙증맞은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다음 날 구슬봉이와 만난 장소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곳의 세입자는 구슬봉이만이 아니었습니다. 냉이, 꽃다지, 봄맞이꽃, 큰개불알풀 등등. 제가 몰랐던 이 작고도 넓은 세상에선 이미 봄이 한창이었습니다. 그 순간 무채색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일어서더군요. 구슬봉이의 꽃말은 ‘기쁜 소식’입니다. 꽃말은 절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십수 년을 보내오는 동안 제게 새로운 들꽃들과 만나 연을 맺고, 익숙한 들꽃들과 재회의 인사를 나누는 일은 중요한 일상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풋기가 도는 곳에는 어김없이 색깔이 번지더군요. 만만치 않은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외로움이 물컹 만져질 때마다, 들꽃은 제게 말없이 위로가 돼줬죠. 도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들꽃들의 소박함은 심산유곡에서 발견되는 희귀한 꽃들의 아름다움 이상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저는 도시라는 아름다운 정원의 가이드 역할 맡아 계절에 맞춰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꽃들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숨어있습니다.
구슬봉이를 만나는 방법 : 구슬봉이는 봄에 산과 들판의 양지바른 풀밭에서 피어납니다. 도시에서 구슬봉이를 만나고 싶다면 3월에서 5월 사이에 햇살이 쏟아지는 잔디밭을 살펴보세요. 작은 꽃이 바닥에 들러붙어 피어나기 때문에 곁에 두고도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제 경험상 구슬봉이는 그리 흔하게 보이는 꽃이 아니니 마주치면 사진으로 꼭 담아놓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