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전우애를 전하며)
가끔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대개의 경우에는 지금의 생활에 있어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나 고민, 또는 미래나 과거에 대한 것이지만 가끔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기 위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래 봬도 나로 살아온 지 2n 년인데 이쯤이면 나에 대해 정확히는 몰라도 가장 잘 알고는 있어야지라는 마음이랄까.
그러다가 문득 “내 취미는 대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가 뭐예요?” 정말 흔할 것 같은 질문이고 고리타분한 질문의 대표 격이지만 생각해보니
의외로 나는 이 질문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다. 이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도 새삼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툭치면 그냥 무조건 반사마냥 답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이 질문에 내가 대답을 바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내 취미도 자신 있게 못 말하다니!’
나는 나름대로 나의 세계를, 나의 취향을 완성해나가는 것에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는데, “취미가 뭐예요?” 이 질문에 어버버하고 있다니! “What is your hobby?” 이건 초등학교 때 배웠던 영어교과서의 제임스과 앤도 기계마냥 대답했던 당연한 질문이 아닌가! 나는 나를 굉장히 잘 알고 있다고 나름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해 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을 말하고 싶었다.
첫 번째로 생각한 건 수영이었다. 수영은 대부분의 모든 운동에 대부분의 경우 평균 이하의 실력과 흥미를 보이는 나에게도 ‘아 이건 그래도 내가 따라갈 수는 있겠다.’라고 느끼게 해 준 첫 번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러 달째 수영 강습을 듣고 있고 수영장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뭔가 자신 있게 수영을 취미라고 말하기는 망설여졌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취미이기도 하고 접영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때 “아 저 수영이 취미이긴 한데 아직 잘은 못해요.” 이렇게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아도 될 때 그때 ‘나의 취미는 수영’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건 독서였다. 확실하게 나는 책을 비롯한 글 읽기를 좋아한다. 큰 서점이나 햇살 가득한 도서관을 가면 정말로 행복하고, 세상 벅찬 기분이 든다. 책을 읽다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말로(또는 글로) 형용할 수 없었던 내가 느꼈던 기분을 묘사된 구절을 발견했을 때이다. 한국어라면 그래도 100%에 가깝게 패치가 완료되었다고 자부하는데 내가 느낀 감정을 말로 또는 일기장에 적을 글로 도무지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의 답답함이란! 그럴 때는 결국 ‘그래서 그 날은 왠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낀 날이었다.’라는 말로 대충 일기를 마무리 하지만, 사실은 일기를 쓰면서도 찝찝하다. ‘아 이게 아닌데, 뭐랄까 더 다른 감정이었는데 말로 표현을 못하겠네.’하고 말이다. 그렇게 정의하지 못했던 나의 감정들을 경험들을 표현해주는 구절이나 글을 읽었을 때는 정말 “아 맞아!!! 내 말이 그 말이야!!!”라고 마음속에서 기쁨의 환호가 터져 나온다. 그것이 슬픔의 감정을 표현한 구절이어도 그 순간만큼은 기쁘다.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 못했던 답답함에서 벗어난 행복이랄까. 의심할 여지없이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긴 하나 그것이 나의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고전이 훨씬 많고 나는 반찬은 편식하지 않아도 책 편식이 조금 있는 편이라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끝까지 잘 못 읽기도 한다. 그리고 뭐랄까 독서를 취미라고 말하거나 단정 지어버리면 내가 독서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약간의 의무감이 생길 것 같아 싫었다. 책을 읽는 것만큼은 내가 부담을 가지지 않고 어떠한 책임감도 지지 않고 영원히 누리고 싶은 자유니깐.
사실 상 위의 두 가지는 “나의 취미는 ㅇㅇ”의 공백을 매울 가장 강력한 후보지였는데, 이 두 개에서도 막히니 그냥 ‘에휴 몰러”하며 더 이상 내 취미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차피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굳이 나서서 고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당장 출근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더 이상 고민을 얹는 건 버거울 것 같았다. 그렇게 취향을 정의하는 일을 접어두고 매일의 일상을 살았다.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내 하루에 이벤트가 그저 ‘출근하고 퇴근한 일’로 남는 게 괜히 속상해서 그냥 혼자서 카페에 가서 책을 읽다가 돌아오고 그랬다. 퇴근을 하고 조금은 우울한 기분으로 갔다가 카페에서 책을 읽고 조금은 행복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취미는 슬럼프 극복이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의 홈버튼을 눌러서 시간을 확인하는 것만큼 아무렇지 않지만 명확하게 내 취향이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내 안의 모든 자아가 만장일치로 동의를 하고 기립박수를 칠 만큼 분명한 생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뭐 이게 큰일이라고’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생각이 들었을 때의 나는 너무 기뻐서 버스에서 크게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물론 일절의 박수 없이 조용히 버스 손잡이를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영을 시작한 것도, 책 속의 장면과 문장을 마음에 담아 둔 것도 모두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들이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싶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면 거리를 두는 나였기에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나는 자주 행복하고 자주 우울한 사람이라서 우울을 견디고 일상을 다시 살아갈 방법을 익히는 게 필요한 사람이다. 괜히 또 우울해져서, 외로운 기분이 들어서 혼자 카페에 갔다가 일기를 쓰고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조금은 기분이 좋아져 괜히 밤공기에 배시시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나는 꾸준히 나를 위로하면서 살고 있구나. 그래도 대견하다. 너무 사소하고 자주 일어나서 아무도 모르는 나의 슬럼프를 이렇게 조용히 치열하게 싸우고 견뎌내고 있구나.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나라도 칭찬해줘야지. 나라도 기록하고 기억해두어야지. 나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고 조용하지만 혼자서는 치열한 슬럼프 극복 연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