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년차이고, 이제 불과 약 한달 뒤면 그 유명한 직장인 369의 첫 시기인 3년차가 된다.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말 많지만(좋은 것도 많고 싫었던 것도 많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어떤 일을 하든 일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트위터에 올라온 재미있는 문장을 모아 둔 게시글에서 보았던 문장인데, 나는 이것을 보고 정말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문장이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내용은 이랬다. (어디 필사라도 해둘 걸 그랬다)
일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과 맞지 않다. 그 증거로 일을 하면 피곤하다.
2~3문장으로 군더더기 없이 통찰력 있게 사람을 꿰뚫어보다니 이 사람은 고수다! 라는 감탄이 나왔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아니! 난 일하는 게 행복한데? 일이 적성에 딱 맞는데?”
물론 일을 통해 나의 자아를 실현하고 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중 하나이다.
이는 메슬로의 욕구 중에서도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니즈가 아닌가.
하지만 그 사람조차도 자는 시간 외에 모든 시간을 일한다면 그 때 역시 행복의 찐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직장을 다니며 어떤 날은 행복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힘들고 고된 때도 있다.(물론 이 둘의 비율에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일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있다. 미친듯이 업무가 쏟아지는 날에도 어쨌든 언젠가는 이 일이 마무리되고 나도 퇴근을 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나에게 퇴근이 없다면?
내가 이 일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이 일이 나의 천직일지라도 퇴근없이 직장에만 메여있다면 나라는 사람의 취향과 생기는 메말라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단정지을 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의 경험상 그랬다.
나는 처음 일을 시작한 1년 간 퇴근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직장에서 먹고 자고 명절을 포함한 모든 휴일을 직장에서 숙식한 사람 같지만
아니다, 나는 야근을 한 적이 많았지만 제 시간에 칼퇴근한 날들이 더 많았고 주말에 출근한 날도 있었으나 출근하지 않은 주말이 훨씬 많았다.
그럼 꼬박꼬박 퇴근을 다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를 퇴근 시키지 못했다. 아니 퇴근을 하지 않았다.
퇴근을 해서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괜히 곱씹으며 분노의 쌈바를 추기도 하고 분노의 양치질은 물론이거니와 눈물을 줄줄 흘린 날도 많았다. 그리고 친구를 만나 불평불만을 늘어 놓으며(이 때의 나의 표정은 어땠을까) 부정적인 말을 하고 부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퇴근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 일은 끝났는데, 어제의 그 상황은 이제 종료되었는데, 이제는 나는 괜찮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일 속에 있었고, 그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괜찮을 수 있는데도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누군가에게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고 돌아오는 그 길이, 그 밤들이 결코 마음이 후련하거나 편하지는 않았다. 혹시 그 카페에 있던 화분 속에 가려진 누군가가 사실은 내 직장동료가 아니었을까, 사실은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던 건데 내가 너무 불평만 말했던 것은 아닐까 하며 또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걱정도 많은 편인데 안해도 될 걱정까지 추가되니 나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출근을 하고 밥은 먹지만, 책은 읽지 않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공원을 걷지는 않았다. 안가면 핑계나 사유를 꼭 대야할 모임과 약속에는 자리를 지켰지만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다음으로 미뤘다. 이렇게 걱정이 불평이 그리고 퇴근을 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이 나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퇴근 했으면 정말로 퇴근하기로. 열심히 일했으니 퇴근해서는 깔끔하게 ‘직장에서의 나’는 스위치를 꺼두기로.
퇴근했으면 정말로 퇴근하기로. 내 몸과 마음 모두를 퇴근시키기로.
나의 삶은 ‘당찬 결심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다음 날’이 항상 콤보세트이기 때문에 결심은 아주 당찼으나 바로 이것이 지켜진 것은 아니다.
또 운전을 하고 돌아가는 차안에서 오늘을 곱씹거나 괜히 내일을 미리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이런 생각을 완전히 OFF 시킬 수 있는 나만의 스위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는 수영을 등록했다.
수영은 정말 대중적인 운동이나 ‘수영을 등록’한 것은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내겐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결코 내 일이 아닌 것 같은 것들’이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수영이었다.(이 중에는 운전도 있었는데 운전면허에 관한 글도 다음에 써보려고 한다.)
나는 고통을 잘 참는 편이 아니고 겁이 많은 편이다. 두 가지의 특징이 합쳐진다면 운동젬병은 따놓은 당상이다. 물을 무서워하는 나에게 수영등록은 약간의 도전이었는데 이 때의 나는 ‘당찬 결심’을 한 지 얼마 안된 시기였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용기가 내 안에 솟구쳤다. 그리고 이 도전은 나에게 아주 아주 성공적인 도전이었다(라고 내년이면 수영을 등록한 지 1년 정도가 되는 수린이가 말했다.)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수영강습을 듣는 그 순간에는 정말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수영을 마치고나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행복하고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수영강습을 빠지게 되거나 강습이 없는 주말에도 내 생활에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던 원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 마치 수영예찬론자 또는 프로수영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수영 예찬론자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프로수영인은 절대) 아니다.
그저 혹시 칼퇴근만으로는 퇴근이 부족하다면 나만의 확실한 ON/OFF 스위치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의 스위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린이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아이패드로 그린 첫 그림이라 많이 헤맸지만 그려놓고 매우 뿌듯했다.
(추신) 이 글은 작년에 수영을 한창 다니던 시절에 쓴 글인데, 작가 승인이 난 지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당연히 수영은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언젠가 다시 수영장을 등록할 그 날을 드릉드릉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 때 글을 썼을 때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진심이다. 수영은 메타포일 뿐, 모두의 스위치는 저마다 존재할 것이다.